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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딱좋은나 Oct 28. 2023

우리 엄마의 실수 많은 인생

그 실수는 다 딸 때문이라요

우리 엄마는 아빠를 잘못 선택한 대가로 이날 이때껏 힘들게 살고 계신다.

실수라고 하기엔 엄마는 같은 실수를 너무 많이 반복하셨다.

실수 많은 엄마 인생이 조금 더 행복해지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드는 주말이다.





5남매(4남1녀)의 중간에 딱 끼여 태어난 고명딸 우리 엄마는 국민학교 문턱만 겨우 넘으셨다.

중학교는 졸업도 다 못하고 시골에서 부산으로 올라와 어린나이에 친척집에서 식모살이로 사회생활을 시작하셨다.

남의집 가사일과 애 봐주는 일을 하며 받은 돈은 쓰지 않고 입지 않고 먹지 않고 모으기만 했다.


힘들게 모은 돈으로 성인이 되자 어릴 때 부터 아버지께 듣고 자라 당연하단 듯 성형 수술을 하셨다.

그 때 당시에 부산에서 잘나간다 유명하다는 성형외과에서 

비싼 돈을 주고 쌍꺼풀 수술도 하고 콧대도 높였는데, 

안타깝게도 엄마의 쌍꺼풀은 그 의사 인생의 오점이다 싶을 정도로 완전 대실패작이다.


가만 놔뒀어도 될 얼굴을 성형한 것에서부터 엄마의 실수가 시작되었다.


얼굴이 바뀌면 팔자가 바뀐다고 하지 않던가!

우리 엄마는 잘못된 성형 수술로 인해 성질이 아주 더러워 보이는 인상을 갖게 되었다.

욕 한번 못할 정도로 착하고 순해빠진 우리 엄마는 잘못 성형 된 쌍꺼풀 때문에 

무속인이 보면 같은 일을 하냐 묻고, 처음 보는 사람은 말 붙이길 어려워 한다.






성형 수술을 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엄마의 이모로부터 중매 선을 보게 되었다.

신발 공장의 공장장이라 돈을 잘 번다는 소리에 혹해 엄마는 어느 겨우날, 우리 아빠를 처음 만났다.


쌍꺼풀 수술을 한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자리를 잡기는 커녕 

팅팅 부은 눈을 한 맞선녀의 상태도 개의치 않았던 아빠가 엄마와의 찐 인연이었던건지.

아니면 조카 인생 말아먹지는 않겠다 싶은 친이모가 한 중매라서인지. 

만난지 얼마 되지 않아 결혼을 전제로 살림부터 합친 게 엄마 인생의 가장 큰 실수였다. 


엄마와는 세살 차이 난다 뻥을 쳤던 아빠의 나이는 어느날 우연히 보게 된 신분증으로 거짓이 탄로났다.

고작 한살 차이면 예상보다 젊은 남자를 데리고 살아 좋아했어야 하는데 엄마는 속은 게 억울했단다.

그리고 공장장이라 돈을 많이 번다더니 

그건 어디까지나 '장'을 달지 못하는 일반 사원의 기준이었다.

게다가 아빠는 자신이 버는 것보다 더 많이 쓰는, 요새 말로 진정한 욜로족이자 소비요정이었다. 

엄마는 아빠에게 속은 게 한두가지가 아니라면서 그 때부터 알아봤어야 한다고 푸념하곤 했다.



동거부터 시작했다가 그런 사람인 줄 알게되었으면 호적이 더렵혀지기 전에 도망부터 갔어야는데.

쓸데 없이 엄마는 한번 결혼은 영원한 결혼이라고 생각하는 고지식함의 결정체였다. 

엄마의 오빠들을 비롯한 주위의 만류에도 엄마는 꿋꿋이 아빠의 아내자리를 지켰다.


돈 개념도 없고 생각 없고 철 없는 것도 모자라 미래까지 없던 아빠가 뭐가 그리 좋았을까.

나와 동생을 낳고 키우는 동안 엄마는 떡볶이 장사, 호떡 장사를 비롯해

의류 공장에서 미싱 일을 하시기도 했었고, 미용을 배워 미용실도 운영하셨다.

안벌어오면 다 죽는다 한번 버텨라도 보지, 엄마는 니 안벌면 내가 벌지 하며 안해도 될 고생을 사서 했다.

도망도 안가고 미운 놈 떡하나 더 준 것 또한 엄마 인생의 실수이다.


종가의 맏이로 누릴거 다 누리고 살다 집안이 기운 우리 아빠 같은 사람은 

어르고 달래서 시켜야 말을 듣는 사람인데 엄마는 남자를 몰라도 너무 몰랐다.


IMF가 터지고 아빠의 사업이 쫄딱 망했을 때에도 

우리 엄마는 가장이 되어 우리 네 식구를 먹여 살리셨다.

그러면서 아빠의 재기를 위해 온갖 중장비 학원을 다 보내 면허를 따게하는 내조를 퍼부었다.


안타깝게도 배운게 도둑질이라고 아빠는 

기껏 다 따놓은 중장비 면허를 제대로 한 번 써보지도 못하고 다시 신발 공장을 차리셨다.

생활비도 제대로 가져다 주지 않고, 빚더미에 앉게 한 것도 속에 천불이 날 것 같은데

그 일을 다시 시작한 걸 엄마는 제대로 한번 말리지도 않으셨다.


"말린다고 네 아빠가 들을 사람이가?"


주어진 현실을 모두 제 탓이겠거니 하며 인내하고 감내하셨다. 

아빠의 무능력함과 다정하지 않은 심성과 못된 성질 머리까지 모두 엄마는 참으셨다.

약강강약이라고 엄마가 받아주니 아빠는 엄마 위에서 더 논 것인데 그것도 모르고 말이다.

몇 번쯤 피터지게 죽을 각오로 들이받았다면 아빠의 버릇은 쉽게 고쳐졌을텐데,

몇 십년을 살아도 우리 엄마는 아빠를 너무 몰랐다. 

그 결과로 엄마는 이렇게나 힘들게 살고 있다. 이 역시도 인내심이 강한 엄마의 실수이다.


여리고 순하고 지고지순한 엄마라도 고집을 넘어선 아집은 또 얼마나 또 센지

남한테 폐가 되지는 않을 거라며 독하다 싶을 정도로 자신을 몰아붙이며 우리 가정을 지키셨다.

생활력만큼은 정말 억척이다 싶을 정도로 엄마는 직업을 수차례 바꾸어가며 일을 하셨다.

그러면서도 새벽마다 밥을 짓고 도시락을 싸고 종갓집 맏며느리 역할을 다 해내셨다.

못한다 힘들다 죽겠다 엄살이라도 피웠으면 좋을텐데, 꾹꾹 참고 하니 가뜩이나 많은 일복이 넘쳐난다.

눈치 챙겨서 제 살길을 찾지 못한 우직함 마저도 엄마의 실수이다.


IMF를 지나는 동안 동네 미용실에서 나오는 수익이 더이상 예전같지 않아졌다.

그러자 엄마는 새벽부터 어시장에 나가 쪼그려 앉아 생선을 분류하고 다듬는 일을 하셨다.

비린내 나는 돈이 파마약내가 나는 돈보다 더 크다는 단순한 이유였다.

그리고 어시장에서 받아오는 생선들로 반찬값은 굳는 것도 컸다며.


하루종일 생선을 만지다보니 엄마에게는 머리카락과 손끝까지 짙게 비린내가 배여있었다.

나는 그 때 당시 사춘기라는 핑계로 엄마의 고단함을 이해하려 하지 않았다.


"내가 왜 엄마 선택 때문에 이혼녀의 자식이 되어야 하는데?

엄마 때문에 내가 이혼녀 딸이라고 편견 받고 눈치보고 주눅들어야 되나?

멀쩡한 내 배경을 왜 엄마가 깨트리는데!

엄마가 선택한 사람이니까 엄마가 끝까지 책임져라.

엄마든 아빠든 이혼하면 내가 죽어버리든지 아무도 안보고 막 살 거다!"


한때, 도저히 아빠랑 사는게 이젠 너무 힘들어서 못하겠다던 엄마에게 나는 저렇게 말했다.

이 걸 들은 동네 아줌마들이 '딸이 왜 엄마를 이해를 몬하노?' 하고 혀를 내두를 정도로. 

나는 아주 이기적이고 못되고 냉정한 딸이었다.


되려 내 남동생이 엄마 고생한다고 붙잡고 울며 이혼하라고 안타까워했다. 

매번 고단하게 잠이 든 엄마 이불을 챙겨주는 것도 힘든 엄마의 곁에 있던 것도 아들인 내 동생이었다.


나는 한번도 엄마를 여자로 이해하지 못했고, 이해하려하지 않았다.

그저 나를 낳은 엄마로서의 책임감만을 강요했다.

내가 워킹홀리데이를 떠나고 동생이 군에 있을 때, 

할머니 병간호까지 하는 엄마를 아빠가 때려서 엄마가 집을 나갔는데.

나는 그때 모두와 연락을 두어달 끊고 생사를 모르게하는 방법으로 엄마를 되돌아오게했다.

엄마 인생보다 내 정체성과 배경이 부모의 이혼으로 인해 반쪽짜리가 될까 겁을 내 더 모질게 했다.

어리석게도 말이다. (지금 나는 애 셋 딸린 이혼녀이다)


이렇게 우리 엄마는 번번이 나 때문에 아빠에게서 벗어나지 못하고 억지로 혼인을 유지했다.

인생은 타이밍이라는데 우리 엄마는 모질고 독한 딸 때문에 아빠에게 벗어나지 못했다.

눈 딱 감고 제법 다 자란 애들을 놔두고서라도 제 살 길을 찾아갔더라면,

분명히 알뜰하고 능력 많은 우리 엄마는 지금까지 고생을 하고 살지 않았을테다.





머리가 어느 정도 큰 두 아이를 키우는 데 드는 돈을 충당하기 위해 

엄마는 어느 순간 조선소의 방수일을 배우시고 건축현장의 도장일까지 하셨다.


페인트 냄새와 신나 냄새에 취해 머리가 어지럽다, 눈이 따갑다 하며 

퉁퉁 부은 눈과 손으로 고통스러워하면서도 새벽마다 일을 나가셨다.

그렇게 번 돈으로 힘들어하는 엄마의 동생들을 도우셨고, 나와 동생을 키우고 결혼까지 시키셨다.


내 아이가 아플 때 지방에서 막노동을 하다 말고 달려와준 것도 엄마였고,

내가 집을 샀다며 옮겨갈 때마다 부모가 도움이 되지 못해 네가 고생한다며 봉투를 주신 것도 엄마셨다.


아무도 나를, 우리 부부를, 내 가족을 돌봐주지 않아 무너지려할 때마다 엄마가 손을 뻗어주셨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이 집도 애 셋 딸린 이혼녀 딸을 둔 엄마가 

정말 억지로 억지로 영혼까지 끌어모은 대출을 받아 매매하셨다.

엄마가 나를 낳았고 키웠고 살게한다, 내가 그렇게 못된 딸임에도.


그리고 엄마의 세상을 유지하는 원천는 70에 가까운 엄마가 여전히 하고 있는 막노동이다.





험한 일을 시작한 지난 20여년간 엄마의 인생은 정말 신체적으로 정신적으로 몇 배는 더 고단했다.


친구들은 좋은 집에서 살며 좋은 차를 타고 놀러를 다닐 때 엄마는 초라한 행색으로 일을 나서는 상대적 박탈감은 기본이고, 서방은 뭐하는데 밖으로 아줌마가 이리 나와 고생을 하냐는 핀잔어린 염려도 매 순간마다 겪어야 했다.

일이 일인 만큼 더러운 꼴을 보며 제 처지도 그들와 같음에 좌절을 했다.


일을 하다 사다리에서 떨어졌지만 근로 계약이 제대로 되어있지 않아 산채 처리도 못받으면서 골절 수술을 받기도 했다.

다리 연골이 다 닳아 없어질 정도로 고단한 일을 많이 한 까닭에 엄마는 다리 수술도 받으셨고, 뜬금없이 발견된 갑상선 암 때문에 수술도 받으셨다.


매 번 서울에 살던 내 곁으로 모셔 수술을 시켰는데,

그 때마다 아이 키우느라 신경쓰는 내게 짐이 된 것 같아 미안하다고 아픈 엄마가 되려 사과를 하셨다.


"별 소릴 다 한다. 서울이 기술이고 뭐고 다 좋으니까 두번 세번 손 안갈라고.

내 편할라고 요기서 하자고 한 거니까 미안하지 마라." 하는 내게 엄마는 

"내가 이래 암이나 걸리려고 그렇게 열심히 살았나 싶다" 하고 눈물을 보이며 한탄하셨다.


"그렇게 몸고생 맘고생 하며 살았는데, 암 하나 없는 게 이상하지. 

이정도인게 다행이다 여기고, 이젠 스트레스 받지 말고 앞으론 즐겁게 사소."

하고 싹퉁머리 없는 위로 밖에 전하지 못했던 나였다.


이쯤되니 그렇게 키우지 않았는데 이렇게 커버린 나라는 딸이 우리 엄마의 최대 실수가 아닐까 싶다.





힘든 수술을 몇 번 겪는 동안 여전히 아빠는 한 걸음 멀찍이 있었다.

병원비도 내지 않았고, 서울이란 핑계로 한번이나 엄마를 보러 올까말까 했다.


젊은 날의 애정이나 사랑이 다한 거라 해도, 

부부로 산 세월에 대한 예의라도 지켰으면 좋았을텐데 우리 아빠는 정말 끝까지 예의도 없는 사람이었다.


거기서 완전히 마음이 상해버렸는지 어느날 엄마는 진지하게 아빠와 이혼하겠다 하셨다.

이혼 아니면 죽을 거 같냐니 그건 또 아니란다.

그래서 또 나는 이혼만은 안된다, 차라리 졸혼이나 별거를 해라며 막아섰다.


그렇게 엄마는 아빠로 부터 2년을 도망쳤다.

달라지지 않는 생활, 변하지 않는 생활고, 늘 무책임해서 곁에서 한발짝 떨어진 남편.

아이 둘이 각자 가정을 꾸리고 나니 엄마의 지나온 인생이 허무했을 법도 하다.

늙고 병들고 지칠 것만 남은 불안한 미래에서 아빠를 도려내는 게 낫겠다고 판단할 만큼.


그런데 두 해를 다 채우기도 전에 아빠와 엄마는 다시 살림을 합쳤다.

엄마 없이 말라가는 아빠와, 늘 아빠의 안부를 묻는 엄마, 혼자 살아봤지만 나아지지 않는 생활.

벗어나 봐야 달라지 않는다는 걸 엄마가 느끼셨다.


둘이 같이 있으면 적어도 하나가 쓰러지면 119에 신고라도 해줄 사람이 있으니

자식들이 안심하고 살 수 있지 않겠냐는 내 말에 엄마는 아빠에게로 돌아갔다.


그리고 살림을 합친지 얼마 되지 않아 아빠가 119에 실려갔다.

그 때부터 엄마는 모든 것을 아빠에게 맞추어 살았다.

간병인이 되어 좁은 간이침대에서 먹고 자고 하면서 아빠의 똥오줌도 받아내고, 욕창 때문에 돌려 눕히고 때마다 데리고 다니며 재활치료를 시키고 영양제를 먹이고 기력회복을 위해 보양식을 만드셨다.

그렇게 엄마는 아빠의 보호자로서 모든 것들을 다 했다.


"미워죽겠는 원수 같은 놈 고마 버리고 가지 뭐한다고 붙어 있노?"

하는 엄마 친구 말에 엄마가 그랬다.


"내가 안하면 우리 애들이 다 해야하잖아.

한창 애 키우고 지들 살기도 바쁜데, 부모가 되어서 애들한테 짐이 되서야 되겠나."


이 선택은 엄마 인생의 또 하나의 실수가 아닐까 싶다.

엄마만 생각하고 엄마만 편하면 되지,  나같이 못되먹은 딸과 아들을 위해. 

엄마는 결국 또 아빠에게서 벗어나지 못하고 짐을 떠안았다.







9월이 지났으니 아빠가 수술을 받은지도 꼬박 1년이 넘었다.

아빠는 수술로 인해 장애를 갖게 되어 하던 일도 진작 접었고, 

뒷방 늙은이가 되어 집에만 계신다.

그런 아빠를 오롯이 엄마가 책임지고 있다.


실수로 얼룩진 엄마의 인생을 감히 되돌아보건데, 큰 실수를 하게 만든 장본인이 나인 것 같아서 미안해진다.


말을 해도 들어먹지 않는 남편과 남편을 똑닮아 모질고 독한 딸을 감내하느라 고생한 우리 엄마.

그 덕에 나는 엄마 만큼은 아니지만 제법 억척인 여자이자 아내이자 엄마가 되었다.

그래도 다행인건 엄마보다는 나은 인생을 살고 있어서 엄마가 늘 걱정을 하면서도 응원해준다.


삶의 낙이 없어 나에게 전화를 자주 걸어오는 엄마가 

며칠동안 지방에서 일하는 걸 들키지 않으려고 한동안 무소식이었다.


"엄마가 전화 안하면 평생 가도 우리 딸은 엄마한테 전화 한통 안하제!?"


주말을 맞아 전화를 걸어온 엄마의 목소리와 그 말이 오늘따라 가슴을 콕콕 두드린다.


딸 때문에 실수할 수 밖에 없었던 우리 엄마 인생, 

딸의 행복함으로 보상해드리고 싶다면. 

못된 딸의 고약한 심보가 만든 너무 큰 욕심인걸까.


엄마가 급격히 보고 싶어진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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