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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딱좋은나 Oct 31. 2023

좋은 날은 오는 게 아니라 만들어 가는 것

토닥토닥 나를 위로하다

현실성 떨어지는 미대오빠를 남편으로 선택했더니

결혼이란 걸 한 순간부터 매일 매일이 고생길이다.


남자를 안 사겨본 것도 아니고

이 놈 저놈 그놈 좋은 놈. 나쁜 놈. 그저 그런 놈까지 다 만나봤으면서

왜 하필 이 남자랑 결혼을 해서 지지리 궁상도 이리 풍년인지 모르겠다.


내 선택이라 남 탓 할 것도 없다.




원망도 할 수 없는 속상함에 한탄이라도 해본답시고 

"빤스 잘못 벗어서 내가 이러고 살아" 했더니


"그 빤스, 벗기는 거기만 벗었나? 지가 좋아 벗어놓고 왜 괜히 빤스 탓이야?" 

하고 대꾸하는 언니 말에 배꼽을 잡고 깔깔깔 웃었다.


"그러게!~ 빤스는 아무 잘못이 없는데!! 

벗기는 내가 벗어놓고 빤스 탓을 했네!"








"그러고보면 자기는 결혼 생활 하면서 남들 안겪어도 되는 일, 참 많이 겪었어.

그런 일 겪으면서도 잘 헤쳐 나가는 거 보면 또 신기하고 대단해!"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은 후에 알게된 지인이 내게 말했다.

응원 같은 그녀의 말과 더해져 나를 보는 그녀의 눈빛에 측은함도 보인다.


"헤헤, 그래서 덕분에 배우는 것도 많았어요." 라고 대답했다.


목이 졸리는 것 같은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살았고, 결국엔 헤쳐나왔다.

나를 괴롭히던 현실을 대차게 때려눕힌 것도 아니지만

어떻게 해서든 빠져나왔다.


매번 다른 얼굴로 적이 되어 나타나는 내 삶의 문제들을 

여지껏 나는 재주껏 해결해왔고 요령껏 헤쳐나왔다.

그리고 그 처절한 노력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다만, 관성처럼 들러붙는 그 어려운 문제들에 이제는 직시 할 수 있을만큼

남들 눈에는 안해도 될 경험들은 내게 많은 가르침을 주고 힘이 되어주었다.








부모 슬하를 떠나 혼인을 통해 완전한 어른이 되며 나에게도 온전한 책임과 의무라는 게 생겼다.

그 때부턴 정말 그 무엇도, 아주 작고 사소한 어떤 것도, 단 한 순간도 쉬운 것이 없었다.


오만가지 반대를 무릅쓰고 쟁취한 결혼처럼 모든 것들을 나는 어렵게 용을 쓰며 얻어야했다.

내게 저절로 그냥 주어졌던 것은 단 하나, 남편의 사랑 말고는 없었다.


"어쩜 나는 이렇게나 멀쩡한 거야. 암이라도 걸림 보험금이라도 받지!" 

등짝을 찰싹 소리나게 맞을 정도의 헛소리를 할 정도로 돈 때문에 힘들었던 적이 많았다.


"미친년아. 그딴 소리 하지도 마라.

아무리 돈이 필요해도 그런 말 하는 거 아니다.

니 그러다 진짜 살고 싶을 때 못 살고 죽는다!"


나는 목숨과 바꿔서라도 넘기고 싶은 위기였건만 (어쩌면 그 상황을 피하고 싶었던 진심인지도) 

내 말을 들은 언니는 나를 크게 혼냈다.

이렇게 철 없는 생각과 소리를 할 정도로 돈 걱정은 끈질기게 나를 괴롭히던 내 결혼생활의 바탕이었다.


내 손으로 없애버린 남편의 사업자만 3개니 우리 남편이 마이너스의 손인가 싶다.

마지막으로 정말 크게 망하고선 울음도 한숨도 사치였다.


망해버린 남편의 사업으로 인해 빚쟁이들에게 쫓겨도 보고

자동차와 통장 뿐만 아니라 

경기도 외곽 변두리의 작은 집을 채우고 있던 좋지도 않은 오래된 신혼 살림에 딱지가 붙기까지 

압류란 압류는 골고루 다 당해봤다.

돈이 없어 변호사를 못사니 젖먹이 아이를 안고 발품을 팔아가며 법률 상담을 받으러도 다녔다.


내 수중뿐만 아니라 친정이든 시댁이든 빌려올 수 있는 돈이 있었다면 

돈 못받아 망해버린 남편 사업쯤이야 돈으로 치대서라도 해결을 봤을테다.

그러나 갖고 있던 돈도 빌릴 돈도 없던 나는 

집을 팔고 예물을 팔고 돌반지를 팔아봐도 아무것도 해결할 수 없었다.


피폐해져가는 남편의 정신상태를 곁에서 지켜보며

이대로 끝일지도 모른다는 절망감,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기력함을 느꼈다.


지금에야 힘들어 죽을 것 같아도 생이 끝나지 않는 한 살아는 진다고 스스로를 위로하기도 하지만

나라고 왜 주저앉고 무너지고 놓아버리고 싶은 순간이 없었겠나.



아직 어린 애 셋 때문에 차마 죽지 못해 사는 거, 나도 해볼만큼 해봤다.








누군가가 그랬다.

사람은 누구나 한 가지 걱정은 하고 사는데, 돈 걱정이 제일 편한 걱정이라고.


살아보니, 정말 맞는 말이다.


나도 잠시지만 둘째가 선천적 장애를 가졌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과 공포에 시달린 적이 있다. 

낳아놓긴 했는데 그 장애를 평생 어찌 돌보아야하는지 자신이 없었다. 

어쩌면 아닐지도 모르고 어쩌면 맞을 지도 모른다는 미칠 것 같은 불안을 짧게나마 겪어 봤다. 

6개월간 나를 좀먹던 그 불안과 공포는 정상이란 의사의 말에 세상에 없었단 듯 단번에 휘발되었다.

그리고 나는 그때 둘째로부터 평생 받을 효도를 다 받은셈 쳤다. 

그후부터 지금까지도 나는 아이들에게 기본적인 예의라는 테두리를 지키는 것 외에는 몸건강 마음건강만 바란다.


몸과 마음이 건강해야 제대로 살 수 있으니까.






자식이 아프면 대신 아파주고 싶은게 부모 마음이다.

애 셋을 키우다보니 독감이나 노로, 아데노 같이 흔한 바이러스성 질환은 물론이고

코로나 팬데믹에도 동참을 했고 시시콜콜한 온갖 바이러스 질환들은 수 차례 겪게 된다. 


아들놈은 신우신염에 걸렸음에도 슈퍼박테리아가 있어 항생제가 듣지 않았다.

약을 바꿔가며 아이의 자가 면역을 통한 치유를 기대하는 것 말고는 별 다른 방도가 없었다. 

며칠 째 말도 못하고 열이 절절 끓는 아이를 붙들고 간호를 하며 애간장이 녹아들어가는 고통을 느꼈다. 


나는 아이들의 건강을 걱정해야 할 때마다 마음을 크게 먹어보려 한다.


시간 지나면 낫는 병은 괜찮아요. 

약 먹고 낫는 병은 괜찮아요.

아파도 터록 일어날 수 있는 병은 괜찮아요.

그리고 내 아이들이 다른 아이들처럼 보통 평범하게 살게만 해달라고 기도한다.

엄마인 내가 더 착하게 살겠다고, 다른 건 무엇도 욕심내지 않겠다고, 아이만 건강하게 해달라고.


이렇게 나는 건강이 가장 중요하다는 말을 아이들이 아픈 순간마다 깨우치고 산다.





속이 너무 답답해서 바람 쐬러 강원도로 여행을 갔다는 친구의 말에 


"니 팔자가 최고다! 니가 제일 부럽다" 했더니


"그것도 아니다. 진짜 여러가지로 복잡해서 머리 터지겠다!" 한다.



"쉽게 사는 거 같아 보여도 남들도 다들 저마다 걱정하고 복잡하게 산다.

그만만 해도 괜찮은 거라 생각하고 세상하고 타협 좀 하고 살아라.

니 기준에만 갖다 붙이지 말고!"


이런 식으로 얘기를 하는 내 뜻을 친구는 다 모르겠지만.


나는 친구와의 대화를 이렇게 마무리 지었다.


"기왕 여행간 거 복잡하고 머리 아픈 거 그냥 내려놔라.

내 몫까지 맛있는 거 먹고 좋은 구경해라.

어차피 좋은 날은 그냥 안온다. 만들어 가는 거지.

니는 지금 너의 좋은 날을 만들고 있는 거다."





미대오빠 앞에서 빤쓰를 벗었기에 나는 아내도 될 수 있었고 엄마도 될 수 있었다.

고생할 줄도 모르고 찐하게 사랑을 해서 힘든 결혼생활도 버틸 수 있었다.

이쁘게 가꾸기만 할 줄 알았던 가정도 깨트려봐서 제대로 잘 살 준비를 해서 재혼하고 싶다.


아픈 아이를 걱정해봐서 내 아이의 건강이 얼마나 고마운 지 안다.

크게 망해봐서 사업의 영위가 얼마나 값지고 소중한지 안다.


사는 동안 이리 넘어지고 저리 자빠져봐서 다시 일어나는 법도 배웠다.


좋은 날은 올 거다.

그런데 그냥 오는 건 아닐 거다.


너무너무 슬퍼서 눈물을 흘려봤기에, 

이걸 어쩌냐며 좌절했기에, 

왜 나는 아니냐고 분해봤기에, 

왜 나한테만 이러는 거냐고 억울해봤기에.

나의 좋은 날은 진짜 좋은 날이 되는 것이다.


보통 평범한 오늘이 만들어 낼 특별한 내일을 꿈꾸며.

나는 오늘도 좋은 날을 열심히 만들어 가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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