않은 김에 키웁니다 38
나는 내 커피를 사러 카페에 가지는 않지만 가끔 지인들에게 커피 쿠폰을 보낸다.
그 사람의 생일이라서도 아니고, 기념일이라서도 아니다.
그냥 차 한잔 마시며 수다 떨고 싶은 사람이 문득 생각 나는 날,
나는 간단한 안부인사와 함께 커피 쿠폰을 보낸다.
남쪽 끝에서 고향을 떠나 멀고 먼 서울로 시집을 온 것도 모자라
메뚜기 뛰듯 3년마다 이 동네 저 동네 이사를 다니며 1n년을 살았다.
그러다보니 동네 친구라 부를만큼 가까운 사람이 없다.
(경기도 동쪽 끝에는 딱 한 가족과는 그래도 부부 모두 가깝게 잘 지냈고 여전히 그 인연을 이어오고 있다)
경기도 서쪽 끝인 이 곳에 이사와서는, 동네 장사를 하고 있다보니
이러쿵 저러쿵 나에 대한 말이 도는 게 싫어
어느순간부터는 집밖에 나가 사회적 교류를 일절 하지 않게 되었다.
무척이나 사람을 좋아하던 내가 은둔형 외톨이를 자처하고 있다.
매우 사회적이었던 한 인간의 삶이 이렇게 은둔형으로 바뀐 것이 애통할 정도로 고독하고 외롭다.
예전 동네처럼 이 곳에도 나와 반갑게 인사와 안부를 주고 받고
서로의 집을 드나들며 커피 한잔 씩 하는 시간을 가지며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이가 가까이 있었으면 좋겠다.
지금은 집 밖에 나가도 인사할 사람이 없다.
가족이 아니라면 고립이다 싶도록 외롭게 지내는 나와는 달리
우리 딸들은 이 동네에서 꽤나 유명하기도 하고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아는 사람도 많다.
어쩌다 딸들과 함께 아파트 단지를 걷을 때면 딸들은 이리 저리 인사하며 다니기 바쁘다.
만나는 사람마다 머리를 꾸벅 꾸벅 잘도 숙이고, 손도 쉴 새 없이 흔들어 댄다.
그런 딸들 옆에서 나는 어정쩡하게 함께 인사하며
"저 분은 누구시냐", "쟤는 누구냐" 하며 묻기 바쁘다.
경비 아저씨, 청소 아저씨, 동네 아줌마, 슈퍼 아저씨.
누구 엄마, 누구 아빠, 누구네 할머니, 누구네 베이비시터 이모,
태권도에 같이 다니던 오빠, 누구 동생, 누구네 형,
지난번에 코피 났을 때 도와주신 분, 핸드폰 잃어버렸을 때 전화 빌려주신 분 등등등
우리 딸들은 나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을 안다.
어떻게 다 저렇게 기억하나 싶을 정도로 말이다.
아주 잠깐 스치고 지나간 인연들에게도 딸들은 꼬박 꼬박 인사를 잘 한다.
주에 한 번 곱창이나 순대를 팔러 오는 푸드 트럭 아저씨께도,
아파트 단지 내를 깨끗이 해주시는 미화원 할머니 할아버지들께도,
로테이션 근무를 하며 게이트를 지키고 계신 경비원 아저씨들께도,
아파트 엘레베이터 앞에서 마주치는 같은 동 사람들에게도 인사를 잘한다.
딸들이 어렸을 때 처음 아파트 생활을 하면서
엘레베이터나 공동현관 입구에서 만나는 어른들께 먼저 인사하는 거라 가르쳤는데,
머리가 굵은 지금까지도 엄마 말을 잘 따라주고 있어서 참 어여쁘다.
외향적이고 모르는 사람에게도 쉽게 다가가 말을 붙일 정도로 사람을 좋아하는 우리 딸들.
대체 누굴 닮아 저리 스스럼 없고 붙임성이 좋나 하고보니
인사성 없고 맨정신에는 숫기 없는 남편보다 나를 더 많이 닮은 것 같다.
인사 잘해서 손해 볼 것 없다고 가르치신 우리 엄마 아빠 덕분에
나도 한 때는 동네를 다니면 인사하느라 허리와 목이 아플 정도였으니까....
어릴 때에는 잘 몰랐는데 어른이 되고 나니 확실히 알겠다.
인사 잘해서 손해 볼 것 없다는 엄마 말씀이 맞다는 걸.
인사 잘해서 뭐라도 하나 더 얻어먹고,
인사 잘했던 덕에 잘못도 실수로 덮여질 수 있었다.
평소에 인사를 잘한 사람은 조금 서툴고 모자란 부분도
결정적인 순간에 커버가 되기도 했다.
(당연히 인사성 밝은 이가 아닌 아첨꾼 경우는 제외다)
회사 다녔을 땐 인사 잘해서 승진을 빨리 한 사람도 봤다.
(물론 그의 실력이 인사고과게 기본 전제가 되었겠지만)
"딸들아, 엄마는 너네따라 인사하느라 정신이 다 없다!
그래도 우리 딸들이 이렇게 밖에서 인사 잘 하고 다니는 거 보니 엄마가 참 기분이 좋네.
엄마가 너네를 잘 키우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오랜만에 나온 내 칭찬에 딸들의 어깨가 볼롱 솟는다.
그래, 적성에도 맞지 않는 그까짓 공부 좀 못하면 어때.
사람이 인성이 먼저 되야지.
예의 없이 눈이 마주쳐도 인사를 하지 않는 무례한 아이들도 얼마나 많은데.
거기에 비하면 너희들의 인사성은 백점 만점이다!
(물론 내가 가끔 무례하다 생각하는 아이의 부모님들이 그리 가르치지는 않으셨을테다.
아이들은 키우는 대로 크지는 않고 순간 순간 기분에 따라 태도가 바뀌기도 하니까,
인사를 하지 않는 것도 그 아이의 그 순간의 선택일 뿐이다.
하지만 나는 나에게 인사를 해야하는 데 하지 않는 아이들은 억지로라도 인사를 시킨다.
그것이 어른으로서 내가 아이들에게 무조건 가르치는 기본이고 예의이다.)
칭찬이 담긴 나의 말에 큰딸과 작은 딸이 너도 나도 제 자랑을 하더니
결국 상대보다 더 높아지려고 서로에게 면박도 주었다.
큰 딸은 요즘 머리가 컸다고 인사를 잘 안한다고 작은 딸이 내게 제보했다.
그러는 너는 어른들께만 인사 잘하지, 네 친구들이나 동생들한테는 불친절 하지 않냐고 큰딸이 되받아쳤다.
'아아...... 내 앞이라 인사를 잘 하는 척 했던 거구나, 요놈들!'
살짝 괘씸해지려 하지만 내가 없는 시간까지 들쑤시며 혼낼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앞으론 엄마가 같이 없어도 오늘 처럼 인사 잘 해줘! 알았지?"
"네에!!"
합창하듯 둘이서 대답을 하는 목소리가 믿음직 하다.
딸들과 생각 없이 잠시 나가 동네 한바퀴를 도는 동안
인사 잘하는 아이로 계속해서 자라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져본 날이었다.
아이들에게 나는 그리 착한 엄마나 현명한 엄마이지 못하다.
하지만 언제나 강요하는 기본은 예의이다.
백 번을 가르치고 천 번을 잘 하더라도 하나의 실수나 잘못으로 예의없는 인간으로 낙인 찍힐 수 있으니.
언제 어디서든 어떤 기분이든 누구에게나 차별없이 기본적인 예의는 지키는 딸들로 키우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