낳은 김에 키웁니다 39
"엄마 배고파."
이사를 앞두고 있어 냉장고를 비우고 펜트리 안에 저장된 음식물을 비우고 있는 요즘,
장을 보러 가지 않으니 한창 자랄 나이인 아이들이 하교하고 와서 먹을 것이 마땅찮다.
"라면 지겨워."
그 좋아하는 라면이 물릴만큼 많이 먹긴 했다.
사다 놓으면서도 손을 몇 번이고 머뭇 머뭇할 정도로.
"엄마 카드 가져가서 둘이서 마라탕 먹고 오면 안돼?"
며칠 전에 딸 둘이 기분 좋게 내 카드를 들고 나갔다가 마라탕집의 정기 휴무라 그냥 되돌아왔었다.
와플을 먹자, 나는 싫다. 편의점을 가자, 나도 싫다 하며 투닥거리다
결국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집으로 바로 와!" 하는 내 말을 들어야만 했다.
하필이면 정기휴무여가지고 딸들의 마라탕 데이트가 파국으로 치닫았다.
뭐라도 입에 먹고 오면 되지, 단호박인 엄마 밑에서 크느라
집으로 오란다고 엄카찬스를 날린 딸들의 진솔함에 엄마의 마음이 동했다.
"지금 먹는 마라탕은 밥 아니고 간식이니까 둘이서 12,000원. 음료수는 안돼."
카드를 내밀며 내건 조건에도 딸들은 환호했다.
"알았어 엄마, 고마워!"
그리고 얼마 후 수신된 결제 알람 문자.
12,000원을 넘기지 않으려고 애쓴 11,200원이 결제 되었다.
조건을 걸었더라도 자식 입에 들어가는 그게 무어라고,
둘이서 먹으니만큼 제시된 금액을 좀 넘겨도 암말 안했을 텐데.
그 어려운 선 지키기를 정확히 하며 정직하게 자라주는 딸들이 새삼 참 고맙다.
(언젠가 한번 금액 상한선을 두지 않고 가족 외식에 먹을 걸 담으라 했더니
보이는대로 막 담았다가 마라탕과 마라샹궈를 6만원치 먹고 남기고 포장한 적이 있다.
그래서 마라탕을 먹는다하면 간식 또는 식사 그 목적에 따라 금액 상한선을 제한하고 있다.
이유없는 제한은 아니니 오해는 마시라~.)
-엄마, 나 오늘 언니랑 자매의 날 하고 노래방 가면 안돼? 응? 제발요!
간드러지는 둘째 예삐의 부탁이 수화기 너머에서 들린다.
"갑자기?"
-응, 나 오늘 언니랑 사이좋게 마라탕도 먹었고. 참! 엄마 언니 이제 버섯 먹어! 내가 언니 버섯 먹였어.
-맞아 엄마. 나 오늘 하얀색깔 꼬불꼬불 버섯 그거 먹었어. 예삐가 먹어보라고 해서 먹었는데 맛있었어.
편식이 심한 첫째의 의기양양한 목소리도 넘어왔다.
"알았어. 5천원만이야."
마라탕 가게 근처에 있는 코인 노래방에서 몇 곡 부르고 오길 허락했다.
한참 뒤 다시금 걸려온 전화.
"바쁜데 왜 자꾸 전화야! 집에 빨리 안들어오고?"
여보세요도 없이 쏟아지는 내 잔소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예삐의 웃음소리가 들린다.
"엄마 너무 재밌어서 그런데, 언니랑 스티커 사진도 찍으면 안돼?"
"응? 응! 응? 제발요!"
자기가 필요할 때에만 나오는 친절한 목소리와 제발이라는 간드러지는 애교.
어이가 없지만 알면서도 속아주는 게 부모 마음 아닐까.
"제일 작은 거 싼거로 하나만 찍고 와! 끊어."
"예!!!!!!!!!!!!!!!!!!!!!!!!"
"오늘 둘이 나가서 좋았어?"
저녁을 먹으며 딸들에게 물었다.
"엉! 엄마 나가서 한번도 안싸우고..."
예삐는 자신들이 얼마나 친하게 잘 지내다 온 것인지 설명하려는 것 같은데
눈치 없이 우직하고 강직한 내 큰 딸이 솔직히 말을 한다.
"아니지! 싸우긴 싸웠는데 금방 화해했고. 별로 크게 싸우지도 않았어."
"아니, 언니. 그 정도면 안싸웠다고 해야 엄마가 또 자매의 날 해주는데."
"싸운 건 싸운 거지. 근데 싸웠다 하기 좀 그럴 정도로 금방...."
"그럼 싸운 거 말고 말다툼...."
"다투는 게 싸운 거지."
나를 앞에두고 또 투닥 투닥..... 끝이 없는 무한 반복 도돌이 여정.
"의견충돌 정도로 하자, 그만. 싸우든 말든 밖에서 딴 사람들이 너네 이상하게 보지 않게 행동해라."
깔끔하게 정리해주는 내게 서로를 마주보고 웃던 딸들이 우렁차게 대답했다.
"네에!!!"
"그래서 오늘은 뭐가 제일 좋았는데."
"마라탕 먹은 것도 좋았고. 노래방도 좋았고. 스티커 사진 찍은 것도 좋았고.
엄마, 언니 이제 부터 그 버섯 먹는대!"
"맞아. 내가 먹어는 보고싶었는데 망설이니까 예삐가 조금 뜯어줘서 먹었는데 맛있었어.
엄마 나 그 버섯 또 먹을거야, 사주세요."
"이야, 예삐 대단하네. 엄마보다 더 낫네. 엄마도 못 고친 언니 편식도 고치고."
"내 덕이야, 언니!"
"오늘 스티커 사진 찍은 건 왜 엄마 안보여줘?"
"내가 보여줄게!" 하고 첫째가 가방 안에서 스티커 사진을 꺼내보여주었다.
사진한번 찍으려면 오만가지 인상을 다 쓰던 딸들이
서로를 마주보거나 살을 맞대고 자발적으로 웃고 있다.
보통은 원수 같지만 때로는 둘도 없는 절친인 자매사이.
나는 없지만 너네는 있어서 좋겠다 싶은 자매사이.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내 딸들의 모습에 기분이 좋아졌다.
건강 생각해서 먹어야 된다고 수백 번도 넘게 잔소리를 하였다.
세상에 있는 맛있는 것들을 함께 먹고싶다고 회유도 해봤다.
그러나 그 무엇도 편식을 너무 심하게 하는 큰딸의 입을 열지는 못했다.
하지만 둘이서 먹으러 간 마라탕집에서 내 딸이 버섯을 먹었다.
치고 받고 차고 꼬집고 긁고 날 선 말이 오가던 딸들의 싸움.
매일 반복되고 매 순간 계속되는 딸들의 전투 본능.
말을 하고 화를 내고 때려도 봐도 고쳐지지 않던 서로를 향한 날선 시선.
하도 싸우고 투닥거려 전생에 원수였나 싶었던 자매의 관계가
둘이서 함께 쓰는 엄마 카드 찬스 덕에 세상 부러울 게 없는 우애로 변신했다.
잔소리를 하고 혼을 내고 협박을 해도 안되던 것들이 자발적으로 되는 매직. 마법.
입은 닫고 지갑을 여는 것이 효과적이란 걸 여실히 알게 했다.
"그래, 오늘 자매의 날로 갑자기 바뀌긴 했는데.
딸들이 사이좋게 잘 지내줘서 고맙다.
이렇게 잘 있다가 또 자매의 날 하자."
딸들에겐 일상의 선물 혹은 행운 같은 엄카찬스와 자매의 날.
비록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엄마 주머니에서 나오는 돈으로
딸들에게 좋은 추억으록 간직될 하루가 완성되었다.
(그래봐야 마라탕 11,200원, 노래방 5,000원, 스티커 사진 4,000원 합계 20,200원이다.
시간을 돈으로 살 수 없지만, 2만원 남짓으로 내 딸들의 시간이 야들야들 보들보들해졌다.
내가 만약 돈이 많다면 돈을 주고 사서라도 돈독하고 우애좋은 자매로 만들고 싶은 엄마 마음이다.)
오늘의 엄마로서 다짐 : 입보다는 지갑을 열자.
이 정도로 사소하고 소소한, 딸들이 하고 싶은 것 정도는 함께 하며 행복 할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