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가 죽었다.

자살이 아니라 다행이라 생각했다.

by 딱좋은나

열네살, 우리는 중학교 2학년 때 부터 친구였다.

5명이었다가 4명이 되긴 했어도 우리 무리는 넷이 꽤나 잘 지냈다.

중학교 때 처음으로 친구들과 당일치기 여행도 갔고

성인이 되어서는 같이 술잔을 기울이고 연애 상담, 진로 상담 같은 걸 서로 했다.

지금 내 나이 마흔 세살.

우리가 친구가 된지 거의 30년이 지난 2025년.

뜬금없이 친구의 번호로 부고 알림 문자가 왔다.

친구가 죽었다.






부산에서 했던 우리 둘째 돌잔치에 마지막으로 봤으니 못 만난지 십년도 더 지났다.

나는 결혼을 하면서 부산을 떠났고, 친구 또한 부산이 아닌 창원에 살고 있다.

그래도 애들 어릴 땐 한 번씩 얼굴이라도 보고 살았는데

친구도 뒤늦게 엄마가 되고 나도 아이 셋을 키우다보니 볼 기회가 없었다.

죄책감인지 미안함이 서운함인지 아쉬움인지 나도 몰래 눈물이 죽 흘렀다.

발발발 떨리는 손으로 부산에 있는 친구에게 전화를 먼저 걸었다.


"으네 죽었단다."

"뭐?"


문자로 부고 알림을 받은 나와는 달리 친구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내 전화번호는 몇 번이나 변경되었는데 죽은 친구가 바뀐 번호를 가지고 있어준 것만도 순간 고마웠다.


"자살 아이가, 이 가스나!" 하는 내 말에 "그럴 수도 있지." 하던 친구.


친구가 사는게 녹록치 않았다.

나도 힘들어 죽겠는데 더 힘든 친구를 돌봐줄 여력이 되지 않았고, 친구 또한 도움을 바라거나 원하지 않았다.

그래서 알아도 모르는 척 살았다.

명절에나 겨우 안부 카톡을 주고 받으며.


친구에게 부고 알림을 전달하고 곧바로 죽은 친구의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남편이 받았다.

인사를 하고 어쩌다 그리 되었냐 하는 내 물음에 뇌출혈이라고 했다.

두통이 심해 제 손으로 119에 신고를 하고, 부축을 받긴 했어도 제 발로 응급실에 걸어들어갔단다.

CT상 뇌출혈이 확인되어 세시간을 기다려 응급 수술을 하였고, 깨어나 남편과 의사소통도 했단다.

그리고 심정지가 왔고 뇌사상태에 빠졌다고 했다.

청천벽력도 이런 청천벽력이 없었다.


심장이 미친듯이 벌렁거렸다.

부산에 있는 친구에게 상황을 알리고 부천에 사는 친구에게로 전화를 걸었다.

통화를 하며 비행기를 예약했다.

부천에 사는 친구 하나와 함께 나는 비행기를 타고 부산으로 급히 내려갔다.

부천 사는 친구도 몇 년 전 장례식장에서 본 게 마지막이었다.

부산에 사는 친구가 픽업을 나와 창원으로 향했다.

부산에 사는 친구 또한 둘째 돌 잔치에 보고 마지막이었다.


"장례식장에서 그만 좀 보자. 이제 내 차롄가 싶어 무섭다." 하는 내 말에 친구들이 쓰게 웃었다.







아무도 없는 장례식장에 엉거주춤 여자 셋이 들어갔다.

엄마와 오빠가 맞이해주었고 그 뒤로 친구를 똑닮은 딸과 아빠를 닮은 아들이 나왔다.

눈물도 말랐는지 모두 표정이 없었다.

허망한 죽음이었따.


뇌사 상태로 2주 넘는 시간동안 힘들게 생사를 오가던 친구는 말 한마디는 커녕

눈 한번 뜨지 못하고 다시 찾아온 심정지에 영원히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말도 많은 녀석이 하고 싶은 말이 얼마나 많았을까.

누워서 일어날 거라고 얼마나 아이들에게 말해주고 싶었을까.

유쾌를 넘어서 통쾌하게 깔깔대며 웃던 친구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특히 판에 찍은 듯 친구를 너무나도 닮은 딸을 보니 울컥했다.

웃으면서 보내줘야지. 맘 편하게 떠나라 보내줘야지.

울지 않으리라 마음을 다잡고 또 다잡았음에도 눈물이 났다.


이 친구와 더 가까웠던 부산 친구는 오열을 해서 절도 할 수 없을 지경이었고

부천친구와 나만 겨우 절을 했다.


친구가 우리를 먹이는 마지막 식사라 생각하고

장례식장에 준비된 음식을 한 상 푸지게 맛나게 먹었다.


장례 첫날, 밤이라서 더욱 손님이 없을 법하지만.

유독 쓸쓸한 친구의 장례식장에 더욱 마음이 좋지 않았다.

친구와 닮은 아직 어린 딸이 너무나도 걱정스러웠다.

앞으로 엄마 손이 얼마나 많이 필요할 건데.

뭐가 그리 급해서 이렇게 일찍 갔을까.

마흔 셋이 머리 터져 죽을 나이는 아니잖아요.

하는 내 말에 친구의 엄마가 눈물을 보이셨다.


"나쁜 지지배. 학교 다닐 때도 그리 엄마 속을 썩이더니. 결국 마지막까지 이러고 엄마 눈에 눈물 빼네."


"그르게!" 하시며 엄마가 우셨다.


나도 울고 너도 울고 우리 다 울고.

훌쩍 쿨쩍.

울면서 밥을 야무지게 먹고 국물도 먹었다.


그리고 곧 친구 엄마 대신 친구 남편이 앉았다.


"젊은 사람이 혼자 평생을 어찌 살겠어요. 그래도 너무 빨리 딴 여자 만나진 마요. 그럼 내 친구 너무 불쌍하잖아요."


주책맞은 말을 하는 나를 친구들이 만류했지만, 진심이었다.

마지막까지 기억해줘야할 가장 가까웠던 그가 조금은 더디게 다른 사람을 만나길.


그냥 저냥 살아온 이야기를 몇 마디 주고 받는 동안 시간이 흘렀다.

아쉽지만 돌아가야했다.


"그래도 우리 애가 복이 많아가지고. 이렇게 멀리 사는 친구도 다 와주네. 고맙다."

우리를 배웅하며 친구 오빠가 말했다.


"당연히 와야죠." 하고 대답을 하니 아이들이 눈에 걸렸다.


유난히 아빠를 닮은 친구 아들에게 말했다.

"이모가 멀어서 자주 못와도 너 결혼식 땐 꼭 올거야. 그러니까 반듯하게 잘 커라! 응?"


남의 아들에게 으름장 같은 당부를 하고 친구의 딸을 안아주었다.

"난 네가 제일 걱정이다. 잘 커줘야 해! 진짜 너 잘 커야 된다이!"


이렇게 이쁜 아들 딸을 두고 허무하도록 먼저 떠난 친구가 원망스러웠다.

가고 싶어 간 것도 아닐 테지만, 왜 이렇게 빨리 갔냐고.

어쩌다 우리가 장례식장에서 마주하게 된 걸까.

증명사진으로 걸린 친구의 영정 사진에 대고 큰 소리로 내가 외쳤다.


"우리 간다, 가시나야! 니도 잘 가라!"


영화 써니에서처럼 춤까진 못 춰도 웃으며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남은 친구 셋은 친구 남편의 배웅을 받으며 장례식장을 나섰다.




새벽에 부산 친정집에 도착했다.

도둑 들면 어쩌려고, 겁도 없이 대문까지 활짝 다 열어두고 엄마가 기다리고 계셨다.

아침에 출근하는 냥반이 아직 안자면 어떻게 해! 하는 내 말에 엄마는 말없이 내 몸을 쓰다듬었다.

엄마 친구도 아니고 내 친구가 죽었다니 모두가 충격일만했다.

엄마도 알고 남편도 알고 모두가 보고 아는 내 친구였다.


"살 좀 빼라. 와 이리 뚱순이가 됐노." 하며 엄마는 살아있는 내 걱정을 했다.

집안 내력이 있는지라 당연한 걱정이었다.

내 친구가 죽었다니 새삼 더 염려될 만도 했다.


"엄마 자자. 내 내일 아침에 일찍 기차 타러 가야한다."

나는 처음으로 엄마의 팔을 끌어안고 잤다.


목아래에서 울컥하며 끓어대는 슬픔은 이제 털어야 한다.

일을 해야 하니 쉬어갈 수도 없었다.

몇 시간 눈을 붙이고 또 일상으로 돌아가야 한다.

떠난 자에겐 어제만 있을 뿐 내일이 없어도, 남은 자는 어떻게든 오늘을 살아야하니까.


오래되어 바래고 낡아빠져 어지간하면 생각도 안나던 친구가 그 밤 그렇게나 잠못들고 그리웠다.

이럴 줄 알았으면 억지로라도 한 번 봤을걸.

맨날 본다본다 소리만 하지 말고 보자 보자 했을걸.

먹고 살기 바쁘다는 핑계로 어찌 이러고 안보고 살았을까.

연락이라도 자주 하고. 목소리라도 한 번 더 들었을걸.


떠난 사람은 몰라도 남은 사람에겐 미련과 후회만이었다.

남은 친구들 모두 같은 생각을 했다.


"우리 주말에 날 잡아서 다 같이 서울 구경 함 하자."


남은 친구 셋이 떠난 친구 몫까지 더 길게 살면서 즐겨보자고.

언젠가 우리가 다시 만난다면, 제발 그 건 장례식이 아니면 좋겠다고.

여자 셋이 서울에 호텔 잡아놓고 신나게 먹고 구경하며

우리가 처음 만난 14살처럼, 우리가 반짝이던 20대처럼, 우리가 모르던 서로의 30대의 공백마저 채울만큼.

그렇게 신나게 놀아보자고.


약속하고 다짐했다.





죽은 친구의 휴대전화로 발인 잘 해달라는 당부와 함께 딸의 연락처를 물었다.

남편이 전달해준 덕분인지 친구의 딸이 연락을 해왔다.

쉽지 않았을텐데. 참 고마웠다.


어렵고 힘든 일 있으면 이모한테 말하라고.

멀어서 당장 도움은 안되도 내가 너 한 번은 돕는다고.

아빠 욕을 하고 싶으면 이모한테 전화하고 엄마가 보고싶어도 이모한테 전화하라고.


숫기 없는 친구 딸이 그러지 않을 걸 알지만.

어떻게든 아이가 느낄 엄마의 빈자리를 조금이나마 채워주고 싶었다.


친구가 죽었다.

떠난 친구의 빈자리에서 남은 사람들을 마주하며 친구의 삶을 읽었다.

일상에서 상실을 느낄 정도로 친구와 가깝진 않았어도

함께 자란 기억과 같이 했던 추억에 나는 제법 오래 슬픔에 앓았다.

슬픔을 털고 아쉬움과 미련을 후련하게 보내고 친구의 여행을 인정하는데만 며칠이 걸렸다.


어지간하면 바꾸지 않는 카톡 프로필을 바꿨다.

Goodbye my friend.


"내 75살까지만 살랬는데, 가시나 니 몫까지 10년은 더 살아야겠다. 셋이서 엔빵하면 10년씩이다이가!"

하늘에서 들을지 안들을지 모르는 친구를 향해 말했다.

나는 친구 몫까지 좀 더 열심히 살아보아야겠다.


친구와 이별을 완전히 하고 나자, 더욱 소중해진 나 자신을 깨달았다.

다시 카톡 프로필을 바꾸었다.

My everything keep going alright, Do not worry about me


상실을 인식하고 떠난 친구를 완전히 보내는데 보름 정도 걸렸다.

불현듯 찾아와 한참을 짓누르던 묵직함을 겨우 털어냈다.

내 감정은 이렇게 잘 추스렸는데 이제 마음에 걸리는 건 딱 하나 남았다.

모든게 엄마의 부재로 인식될 아이들이 그저 걱정이다.

애 셋 키우는 내 여력이 얼마나 될지 몰라도, 떠난 친구가 남긴 아이들이 자라는 것을 잘 지켜 보고 싶다.


오늘, 생각난 김에 친구의 딸에게 안부라도 전해야겠다.

그리고 남은 친구들과 서울에서 만날 약속을 어서 잡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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