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만 고만한 아이 둘과 함께 타자 뒷문 가까이 자리에 앉은 어르신 한 분이 얼른 일어나셨다. 자신이 앉았던 자리에 아이들을 앉히라고 "애기 엄마, 이리 와요" 하고 콕 집어 부르시며 자리를 양보해 주셨다.
연세가 지긋해 보이셔서 아무리 아이들을 위해서라지만 그 양보가 썩 편치 않았다.
"아휴 괜찮아요. 그냥 계셔요."
"나 금방 내려"
나의 거절을 사뿐히 거절하시더니 나대신 작은아이를 가뿐히 들어다 앉히셨다.그리곤 큰 아이를 바깥쪽에 앉히며 동생이 떨어지지 않도록 잘 살피라 당부도 해주셨다.
"감사합니다!"
딸 둘과 내가 한 목소리로 감사의 인사를 했다.
"아이고 이뻐라. 딸이 최고야! 애기 엄마는 딸이 둘이라 200점이네! 키울 때 힘들어도 엄마 마음 알아주는 건 딸 뿐이야."
어르신의 딸이 다심한 것인지, 어르신은 딸이 없으신 건지 모르겠지만 딸 예찬을 하셨다.
남편도 같이 있을 땐 안 그런 것 같은데 나 혼자 딸 둘을 데리고 나가면 꼭 이렇게 딸이 최고라는 칭찬 아니면 아들 하나 낳아야지? 하는 당부를 꼭 한 번은 듣는다.
익숙한 어르신의 말씀에 나는 고개만 끄덕이고 가만히 있었건만, 할머니의말씀이 끝나길 기다렸다는 듯 큰아이가 입을 열었다.
"아니에요. 저희 엄마는 아들 좋아해요. 저희가 아들이 아니라서 슬프대요. 엄마는 아들만 낳고싶었대요. 원래 제 태명도 원래는 장군이었는데 딸이라서 아빠가 공주로 바꿨대요. 우리 엄마는 제가 딸인거 알고 두시간 넘게 울었대요. 얘가 딸인 거 알고는 한시간 울었고요."
미운 네살도 아니고 미친 일곱살도 아니건만 대놓고 시키지도 않은 얘기를 하는 큰 아이. Too Much Talker는 마치방언이 터진 것처럼 할머니에게 묻지도 않은 이야길 쏟아냈다.
"아이고, 엄마가 뭘 모르네. 딸이 최고야. 진짜야. 나중에 봐봐. 내말이 맞아. 그렇지?"
할머니께서는 다정한 목소리로 위로하듯 큰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셨고, 말씀처럼 정말 다음 정류소에서 내리셨다.
할머니뿐만 아니라 문 주위에 있던 모두가 큰 아이의 말을 다 들은 참이라, 내 얼굴에 도장을 찍듯 쳐다보고 내리거나 서 계신 분이 많았다.
아들을 좋아하고 아들이 없어 아쉬운 건 진실이었지만 나는 그저 고개를 숙이고 아이들을 보는 척 챙기는 척하였다.
큰 아이를 낳고 6년이 더 지나서야 막내가 태어났다.
임신과 출산 계획이 없었기에 터울이 좀 졌다.
딸 둘에 나이 차 나는 아들을 낳으니 이젠 아들 낳을 때까지 낳은 거냐고 묻는 사람이 많았다. 참 대한민국 사람들은 남의 자식 구성에 까지도 관심이 많다.
남들이 뭐라 그러든 일단 나는 아들이 태어나고 정말 세상 모든 걸 다 가졌다. 내게 결핍이라곤 돈과 아들 딱 두 가지였는데 돈 빼고 다 가진 사람이 되었다.
딸만 키우다가 아들을 키우게 되니 정말 세상 전부를 가진 듯 행복했다. 기저귀 벗기면 자동반사적으로 빔을 쏘듯 오줌을 싸대도 그저 좋았다.
온 우주가 나의 아들 잉태를 바랐다 할 정도로 내 주위의 모두가 바란 아들이었다.대가 끊긴 집안에 아들이 태어났으니 얼마나 귀하고 소중할까! 그 집안에 대를 이었으니 나는 또 얼마나 기가 살고 의기양양할까!
아들은 그저 존재만으로도 내게 행복이자 기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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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 살, 네 살 나이 차가 있다 보니 딸들이 정말 많이 도와주고 예뻐해 줬다.
세 아이 모두 모유수유를 했기에, 막내가 젖을 먹고 나면 나머지는 누나 둘이서 알아서 척척척하였다. 기저귀나 물티슈도 잘 가져다주고 안아주거나 지켜보는 심부름도 잘해줬다.
서로는 견원지간이 따로 없는 딸들 이건만 막내 동생만은 이유 없이 조건 없이 귀여워해 줬다. 늙기도 전에 몸조리하는 기간 동안엄마를 곁에서 잘 도와준 고마운 두 딸덕을 많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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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한하게 딸들을 부를 땐 이름을 부르는데, 막내는 부러 의도하지 않아도 이름 대신 "아들~" 하는 소리가 먼저 나온다.
그리고 나는 "아들!" 하는 소리가 참 좋다. 아들이 태어나기 전에는 꿈에서도 한 번 시도하지 못한 부름이었다.
그렇게 온 집안 여자 셋이 업고 안아 키운 막내가 어느덧 여섯 살이 되었다.
이만큼 자라는 동안 드센 누나들로부터 보고 배운 게 많은 탓인지, 이 녀석이 덩치는 작아도 세상에서 으뜸가고 버금가라면 서러운 장난꾸러기에 악바리로 자랐다.
이제는 누나들에게 겁 없이 덤비기도 하고, 힘으로 덩치로 안되면 누나들의 머리카락까지 쥐어뜯어버릴 정도로 영악해졌다.
가만히 당하고만 있지 않으니 누나들도 아쭈! 하며 덩달아 과격해진다.
이렇게 몸으로 장난치고 싸우긴 둘이서 셋이서 같이 했는데, 늘 혼이 나는 건 딸들이다.
어느 날, 티브이를 보느라 막내에게 물을 챙겨주란 사소한 심부름을 듣지 않았다. 그러니 막내가 왜 안 해주냐며 머리로 누나를 냅다 들이받아버렸다. 아픈 것도 아픈 건데 예고 없이 당한 탓에 놀라기도 많이 놀라 큰딸이 엉엉 울며 난리가 났다. 언니가 우는 걸 보자 둘째가 막내의 머리채를 또 잡고 흔들었다. 잠시 당하던 막내는 얼른 내 뒤로 숨는다.
"이리 와! 이리 오라고! 너 죽었어!"
분노에 찬 딸들이 내 뒤에 선 아들을 끌어내려해 내가 저지를 했다.
"엄마는 맨날 막내만 이뻐하고! 우리는 안 이뻐하고. 맨날 우리한테 화만 내고! 쟤가 잘못했는데. 난 아무것도 안 했는데!"
"동생이잖아. 천지 분간도 못하는 애한테 뭘 바라니. 그리고 너네 지금 이대 일이야. 공평하지가 않아!"
내 말에 더 서러워진 첫째가 소리를 높여 울자 분이 안 풀린 둘째도 덩달아 악을 쓰고 운다.
그동안 얼마나 서운했던지 쉬이 그치지도 않고 꺼이꺼이 소리까지 났다.
(첫째로 누릴 것도 많았고 언제나 모든 것이 내 위주로 돌아갔던 맏딸인 나는 절대 이해 못 할 서운함과 상실감이다. 게다가 난 운다고 달래주는 성격이 못된다.)
딸 둘은 아들과 차별대우를 견디고 사는 자신들의 처지가 서러웠는지 코와 눈이 벌게진 채 한참을 울었다.
눈물을 흘릴 때만큼은 원수 같던 서로가 공공의 적을 가진 동지가 되었다.
나와 함께 딸들을 지켜보더니 눈치 백 단인 아들이 살포시 다가가 누나들을 안아준다.
"저리가! 저리가 다 너 때문이야."
"네가 우리 엄마 다 뺏어갔잖아. 맨날 같이 싸워도 우리만 혼나니까 이제 저리 가! 오지 마! 너랑 안 놀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