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한 외향형의 나는 아는 사람도 많고 친하게 지내는 사람도 많지만 늘 외로움을 달고 사는 성격이다.
그리 많은 이들을 곁에 두고도 타고난 탓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유난히 외로워하는데 그런 외로움의 깊이에 비하면 나는 그래도 참 인복이 많은 사람이다.
내 곁에 가까이 있으면서 행복을 주는 이도 있고, 적당한 거리에서 적당한 접점만을 유지하는데도 든든한 인연이 있다.
전자는 아니지만 후자의 관계를 유지하는 어떤 이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아직은 새댁 소리가 익숙하던, 행복이 꽃 피던 목3동 집에 살던 때의 인연이다.
나는 4층집에 살았는데, 둘째가 임신 6개월쯤 일 때 목3동집으로 이사를 했다.
시집을 온 후 내 주위엔 아무도 없어 늘 외롭긴 마찬가지이지만, 그 시간을 잘 버텨내고 있었다. 그리고 해가 바뀐 지 얼마 안 된 겨울 어느 날, 나는 둘째를 출산했다.
뱃속에서나 배 밖에서나 무던한 첫째와는 달리, 입덧부터 정도를 지나치더니 성질마저 예민하게 태어난 둘째 때문에 다시 시작된 신생아 육아에 반쯤 정신줄을 놓고 살았다.
건물 관리를 맡아해주시던 아랫집 아주머니께서 종종 반찬도 가져다주시고, 아이가 그렇게 울어서 엄마가 힘들어 어쩌냐며 걱정도 해주셨다. 시끄러우시죠 하며 죄송한 마음을 전하면 애들 클 땐 다 그렇다며 되려 나를 위로해 주셨다. 친정 엄마도 곁에 없었던 내겐 한 줄기 따뜻한 빛처럼 느껴진 고마운 분이셨다. 나는 아랫집 아주머니를 이모님 이모님 하며 따랐다.
어느 날 이모님은 건물 관리 문제로 입주민들과 소통할 일이 있다며 내게 도움을 요청하셨다.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보니 내가 이 건물에 몇 개월 째 살아도 집 밖을 잘 나가지 않아 몰랐던 사실, 우리 건물에 고만 고만한 아이들이 세 집에나 있음을 알려주셨다.
나이도 비슷비슷해 보이던데 아기엄마들끼리 잘 지내 보라셨는데 그때 나의 눈은 아마도 반짝였을 것 같다. 산후 조리기간까지 겹쳐 집에만 있다보니 사람에 더 굶주린 상태였기 때문에.
말이 나온 김에 건물 관리 문제로 알게 된 연락처를 통해 아기 엄마들과 인연을 맺게 되었다.
5층에 사는 언니는 우리 첫째보다 한 살 더 많은 딸을 키우고 있었고, 나보다 조금 늦게 이사를 왔다.
둘째 불임이라 나의 둘째를 부러워하더니, 일타 일피의 명중률을 자랑하는 내가 손을 잡아주어서인지 언니는 둘째 임신을 이유로 그 건물을 떠나 더 나은 곳으로 제일 먼저 이사를 갔다.
이 집의 첫 분양자이 터줏대감인 신혼부부는 3층에 살고 있었는데, 그 집에도 우리 둘째와 같은 해의 봄날에 첫 딸이 태어났다. 그리고 아이 엄마는 나와 동향이고 나이도 1살만 어렸다. 이 3층 아기엄마가 오늘 이야기의 주인공이다.
솔직히 3층에 사는 그녀의 첫인상은 정말 별로였다.
남편과 함께 이사 올 집을 보러 잠시 왔는데 집 안에 들어서자마자 휴대전화 벨이 울렸다.수화기 저 편에서 그녀는 아주 아주 낮고 불쾌하다는 목소리로 차 번호를 통해 우리가 차주임을 확인하더니 대뜸 몇 호에 오셨냐 물었다.
우리는 이 건물 402호에 이사 올 사람이고 잠시 집을 보러 왔다 했다.그제야 목소리가 조금 누그러진 그녀는 우리가 주차한 곳은 자신들의 주차자리라며, 앞으로 다른 곳에 주차를 해주면 좋겠다고 했다.
필로티 구조의 건물 주차장이 지정주차구역으로 운영되는 것도 아니고 빈자리도 여럿 있었는데, 니자리 내자리를 따지는게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녀는 이상하다 싶을 정도로 처음 본 차에 대한 경계심이 강했고 주차를 논하는 그녀의 말에는 날이 잔뜩 서있었다.
그때부터 3층엔 주차에 예민한 그냥 좀 이상한 사람이 산다라 생각하고 어지간하면 그녀가 말한 주차자리로는 근처도 가지 않았다. 복도에서 마주치고보면 멀쩡한 사람들인데 한동안은 기피대상 1호였을만큼 첫인상은 별로였다.
(이후에 이사를 하고 살아보니 시장과 가까운 우리 건물 주차장을 너도 나도 무료 공영주차장처럼 사용하는 탓에 집주인인 내가 주차 할 수 없는 일이 빈번히 발생했다. 그 집에 사는 내내 나도 그녀처럼 모든 차에 날을 세워 감시했고 해결사 마냥 나섰다. 누구라도 내 주차 구역에 주차하면 그 날은 너 죽고 나 죽자며 입에 개거품을 물었다.)
드디어 우리 집에서 3,4,5층 아기엄마들이 커피 한 잔을 앞에 두고 첫 만남을 가졌다. 3층 그녀는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아이를 팔에서 내려놓지도 못하였지만, 나의 부름 그리고 우리 셋의 만남을 반가워해주었다. 셋 모두 고향떠나 살긴 마찬가지고 경상도 출신인 공통점이 있어 이야기가 더 잘 통했다.
짧지만 그 만남으로 그녀에게 가졌던 모든 오해가 풀렸다.
살아보니 이해가 되는 주차문제는 서로를 공감하게 했고, 나이와 성별이 같은 아이는 육아동지애를 불러일으키기 충분했다.
집으로 그녀가 돌아가고 서로의 전화번호를 알고 있으면서도 SNS는 팔로우를 하지 않는 그녀가 조금 의아했다. 2010년대 중반이었던 그때의 아이 엄마들은 카카오 스토리에 아이 사진과 육아 이야기를 많이들 올리고 서로서로 댓글 품앗이를 하며 끈끈한 육아 전우애를 다졌었다.
물어보면 빙긋 웃고 어찌어찌 말을 조금 돌리는 듯, 자신에 대해선 그다지 오픈하길 꺼려하는 것 같았다.5층 언니랑은 SNS로 소통까진 하지 않더라도 팔로우는 되어있는데 이 3층 여자는 그럴 마음이 1도 없어보였다.
아래위로 살아 생활이 가까우니 맛있는 음식을 하면 같이 나눠먹고, 커피라도 서로 들고 다니며 친하게 지내고 집 앞 시장에 떡볶이라도 같이 먹으러 나가고 싶은데. 어쩐지 이 여자는 아닌 듯하면서도 확실히 거리를 두는 게 느껴졌다.
보자고 하면 그러자 하는데 내가 보자 하기 전에는 먼저 보자 소리는 절대 안 했다.
하루에 수십 수백 개의 카톡을 주고받으며 만날 날만 손꼽아 기다리던 조리원 동기들과는 전혀 달랐기에, 내 기준에서는 살다살다 처음보는 정말 희한한 캐릭터였다.
그러던 어느 날 3층 그녀의 집으로 초대를 받아 가게 되었다.
우리 집보다 너르고 방도 많고 해도 잘 드는 그 집은 신혼부부의 보금자리답게 정말 이쁜 소품들이 가득했다. 돈 주고 시간 주고 해라 해도 나는 못해낼 그런 예쁜 집이었다. 그 집 바닥에 떨어진 몇 가닥의 머리카락만이 그녀도 요정 아니고 우리와 똑같은 사람임을 알리는 작은 빈틈이었다.
그날 그녀가 차린 밥상에 양배추오이크래미샐러드가 있었다. 케첩과 마요네즈를 뿌려 비벼 먹는 옛날식 양배추 샐러드에 더해진 크래미와 오이. 신박한 조합에 입이 딱 벌어졌다.
그녀는 이 샐러드를 내어주며 빠르고 쉽고 간편해서 손님용으로도, 술안주로도 좋다 했다. 알고 있는 맛에 아는 맛이 더해진 것 뿐인데맛도 정말 좋아서 우리는 그릇을 삭삭 비웠다.
난 이렇게 투박하게 만들어도 그녀의 손끝에선 샐러드마저 어여뻤다.
그곳에 몇 년을 더 사는 동안 우리는 여러 번 서로의 집을 드나들기도 했고, 함께 외식을 하기도 했으며 술자리도 가져보았다. 하지만 겉도는 개인적인 이야기와 서로 사느라 애쓰는 것에 대한 위로 정도만 주거니 받거니 했다.
아이에게 맞춰진 우리 집과는 달리 부부에게 맞춰진 그 집처럼 약간 애엄마가 아니고 그냥 여자의 느낌이랄까.
그녀는 나와 확실히 대비되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녀의 개인적인 성향이 자칫 이기적인 성향으로 오해하며 보게 될까 나는 매번 마음을 다잡고 "볼래요? 볼까요?" 하고 물어야 했다.
그녀가 좋아요 하며 흔쾌히 보자고 할 땐 괜찮은데 못 본다 안된다 하면 나는 또 이상하게 마음이 두 배로 상했다. 만남의 거절이 나를 거부하는 것처럼 느껴졌다.-물론 나의 과대망상인걸 그때의 나도 알았다.
아!!!!!!!
아랫집 여자가 무슨 생각인지 나는 너무 궁금한데. 그녀는 내게 자신을 오픈할 생각이 전혀 없는 것 같다.
우와. 정말 궁금하지 않은걸 궁금하게 만드는 캐릭터다.
혹시 내가 빅마우스처럼 보이나? 내가 좀 오지랖이 넓으니 나란 캐릭터가 그녀에겐 좀 부담스러운 건가?
오만가지 생각을 다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인연도 노력해서 잇고 만들어 가야 한다고 생각한, 대책 없이 사람에 굶주린 상태였다.
서로 알게된지 이 정도 시간이 지났고 이쯤 되면 SNS 정도는 오픈할 만도 한데 여전히 그녀가 내게 거리를 두는 것 같다.안달이 난 나는 그녀를 당기든 내가 당겨가든 그녀와 가까워지고 싶어 미칠 지경이다. 이유는 딱히 없었다. 이제껏 겪어보지 못한 캐릭터에 대한 호기심이었다. 이 인연 반드시 쟁취하고자 말겠다는 굳은 의지까지 더해진.
끝내 그녀와 SNS 친구까지는 되지 못하고 5년 만에 내가 그 건물에서 먼저 이사를 했다. 그 후로도 3년쯤 다른 지역에서 지내는 동안 카톡으로 몇 달에 한 번쯤 서로의 안부인사를 물곤 했다. 그러다 한 번, 이제는 뿔뿔이 흩어져사는 세 가족이 함께 모여 1박 2일 여행을 가기도 했다.
남편들도 서로가 꼭맞지는않지만 이인삼각을 하듯 서로에게 맞춰주며 잘 지냈고, 훌쩍 자란 아이들도 나름 트러블 없이 잘 지냈다.
여행의 끝에서 우리 집 둘째의 패악 때문에 마지막 식사까지는 함께 못하고 우리만 먼저 집으로 돌아왔다. 그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흔쾌히 사정을 이해하고 받아주는 고마운 그들이나와 적당한 거리이기 때문에 괜찮았다는.
만약 우리 사이가 내가 기대하고 바랐던 것만큼 가까웠다면, 나는 애를 울리고 두들겨 패서라도 그 식사 자리에 참석을 했을테다. 불편한 식사를 하지 않아도 되게끔 불참을 알릴 수 있었던 것도 우리가 적당한 거리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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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당한 거리를 지키며 유지해 온 인연인 탓에 시시콜콜 속에 얘기를 다 하지 않아 서로에 대해 다 알지 못한다. 하지만 적당히 서로에 대해 알기 때문에 접점이 붙었다 떨어졌다 하며 우리는 적당한 관계를 유지하며 여지껏 언니 동생하며 잘 지내고 있다. 그저 만나면 좋기만 하지서운한 것도 섭섭한 것도 없이 말이다.
그리고 그동안 나는 손님상이나 술안주로 제법 많은 횟수만큼 그녀로부터 전수받은 샐러드를 만들었다.
샐러드를 만들 때면 나는 5층 언니와 3층 동생 생각을 하게 된다.
항상 너른 마음으로 우릴 품어주는 5층 언니는 양도 제일 많은 베이스 양배추이고, 그들과 가까워지고 싶어 안달이 난 오이는 나다. 가시를 세우고 있지만 벗겨놓으면 여리고 부드러운 오이. 그리고 야채인 우리랑은 뭔가 다른, 애 엄마 아니고 여자 같은 크래미 3층 그녀.
여자로서 엄마로서 주어진 삶은 똑같이 우리에게 버무려진 사우전드아일랜드드레싱이다. 물론 삶의 방향도 이정표도 다른만큼 드레싱이 묻은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말이다.
그들도 무언갈 보면 내 생각을 하겠지?
아마도 내가 즐겨 사두던 호두파이를 떠올리지 않을까 싶다.
이렇게 서로에게 유의미한 사람이지만 적당한 거리에서 서로를 응원하고 있다.
여전히 그들을 알아가는 중인 시간이 솔직히 내겐 아직 익숙지 않은 방법이긴 하지만, 충분한 가치를 느낀다.
물론 아직도 그녀의 SNS 친구는 아니지만 예전처럼 궁금해 죽을 지경은 아니다.생각해 보니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여태껏 그녀에게 어떤 SNS를 이용 하냐, 우리 서로 팔로우하지 않을래 하고 물은 적이 없다.
그녀가 내게 먼저 물어봐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꼰대인 것도 아닌데. 어라?!그녀에게 혹시 나는 꼰대였을까? 하고 염려 섞인 반성을 해본다.
기회가 된다면 5층언니와 둘이서 3층 그녀를 만나러 가고싶다.요즘 아리수 대신 삼다수를 먹고 있는 그녀가 다시 돌아오기 전에, 꼭 한 번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