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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딱좋은나 Jun 28. 2023

비도 오고 그래서 부침개(부추전)

외로움을 채워 봄

비가 오는 날 다둥이 맘의 아침은 더욱 바쁘다. 우산도 챙겨야 하고 얇은 겉옷도 챙겨야 하고 신발은 무얼 신었는지 한 번씩 더 확인해야 한다.



날씨 탓에 가뜩이나 천근만근 무거워진 몸이라 기상도 늦었다. 부랴부랴 아이들 입 속에 대충 먹을 것을 집어넣고 학교를 보내고 어린이집에 데려다주었다.

장화를 신고 쫄래쫄래 가는 꼬마가 귀여웠지만 돌아온 집은 난장판이 따로 없었다.


청소하고 설거지를 하고 빨래도 돌린 그 바쁜 아침부터 무슨 정신이었는지 모르겠다.


냉장고 속에  있던 때 마침 내 눈에 띈 부추.

사다 두었던 부추가 상했나 싶어 확인만 한다는 게, 주부의 손이 멋대로 또 움직였다.


종갓집 맏며느리 엄마를 보고 자란 나는 손이 큰 편이었데, 한 가지 음식을 두 끼 이상 먹지 않는 남편을 만난 이후부터 손이 많이 쪼그라들었다.


부추와 오이를 함께 무쳐먹길 몇 차례. 아무리 둘째와 셋째가 좋아한다지만 만드는 내가 지겹다.

비도 오고 기름진 게 당겼다. 요 정도 부추 양이라면 부침개가 몇 장은 구워질 것 같다. 노선이 정해지자 손이 절로 빨라진다.

다만 지금 상황에선 얼마 남지 않은 부침가루가 복병이다. 일단은 어떻게든 되겠지 하며 반죽 만들기를 시작했다.ㅡ 주부 13년 차, 어지간한 음식은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가 가능하다.


부추를 한 줌 쥐고 뿌리 쪽부터 흐르는 물에 가져다 대고 슥슥 살살 문질러가며 내려오게 씻었다. 눈에 보이는 물러진 부분도 떼어냈다.


흐르는 물에 이렇게 씻으라고 친정엄마께서 가르쳐주셨는데, 역시 엄마 말은 다 맞다. 일단 개기고 봤던 과거의 나야 반성해!


대야에 넣고 가려가며 씻을 때 보다 훨씬 빠르고 쉽게 끝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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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취향은 부추전도 파전처럼 기다란 걸 찢어먹는 것이지만 남편은 무조건 짧게 또 잘게 이다. 지금은 없지만 저녁에 먹일 생각으로 부추를 비교적 짧은 길이로 쫑쫑 썰었다.


그리고 예쁘게 색을 내어줄 당근도 채를 썰고, 양파도 얇게 저미듯 썰었다. 청양고추는 어른들의 몫에만 들어가도록 다져놓고 빼두었다.

칼질을 잘하진 못해도 손은 참 빠르다. 썰어진 야채를 보며 씩 셀프칭찬을 했다. 뭐라도 한 가지 장점은 있다는 건 좋은 거다. 기분이 좋았다.


냉동 칵테일 새우도 다져 넣고, 부산에서 엄마가 보내주셨을 땐 투덜거렸으나 요즘 매우 잘 먹고 있는 오징어도 넣었다.  손질 다 한 오징어를 먹기 좋은 크기로 잘라서 얼려두니 한번 더 칼을 들지 않아도 된다. 그냥 찬물에서 해동만 시킨 후 넣으니 조리 시간이 얼마 걸리지 않았다.


모자란 부침가루를 대신해 수제비를 해 먹고 남은 밀가루를 넣었다. 소금도 살짝 반꼬집 정도 넣었다. 일단 덩어리 진 부분 없이 반죽을 충분히 주르륵 상태로 갠 후 부추와 나머지 것들을 넣었다.



보기에 그럴싸한 부추전반죽이 금세 완성되었다.


분히 기름을 두르고 프라이팬을 조금 달군 후 그 위에 반죽을 올렸다. 올린 반죽 위에 청양고추를 조금 뿌렸다.

기름이 끓으면서 바삭하게 잘 익었다.


부침개는 익어가는 걸 보며 하늘만큼 높이 오르던 그 좋던 기분은 어디 갔을까.  내 마음이 급격히 외로워졌다. 부엌에서 뒤돌아보니 아무도 없었다.


아이들은 모두 학교나 어린이집에 갔고 남편도 출근을 했다

알고 있던 사실인데 잘 정돈된 깔끔한 집이 텅 빈 것처럼 낯설고 시렸다.


이사 온 지 3년이 다 되어가지만 직전의 이웃들로 인한 안 좋았던 기억 때문에, 나는 이사 후 자발적 아웃사이더가 되어 더 이상 사람들과의 관계를 맺지 않고 있다.


가족을 제외하고는 나와 부침개 한 장은커녕 밥 한 끼, 커피 한 잔 같이 먹어줄 이가 이곳엔 단 한 명도 없다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다가왔다.


고독하고 외롭다. 사람이 그립다.

모닝 부침개 한 장이 뭐라고 나를 이렇게 슬프게 만드나.

환기하느라 열어둔 창문에서 들려온 처량한 빗소리마저 제대로 된 배경음악 역할을 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여기서 슬퍼만 하고 있을 내가 아니다.

카톡 창을 열어 이곳저곳 부지런히 찍은 사진을 돌렸다.


부산에 있는 친구들은 한 장 던져 보라며 부산은 아직 비가 오지 않는다했다.

이제는 제주로 서울로 흩어진, 좋았던 기억의 예전 이웃사촌들은 언젠가 만나 같이 먹자며 아쉬운 다음을 기약했다.

나와 사는 지역은 다르지만 비교적 가까운 곳에 있는 상그니 언니는 출근했는지 답도 없었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언니가 퇴근 후 우리 집으로 올 것이란 걸.(실제로도 와서 먹고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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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도 오고 그래서. 부침개나 구운 나는야 감성 터지는 K아줌마.



카카오톡 수다타임이 끝나고 그 여운을 잡은 채, 결국 나는 혼자서 맥주를 깠다.


오전 열시도 되기 전이었다.

굿모닝 맥주 그리고 부침개 한 장.


외로워도 고독해도 나는 안 울어.

눈물 흘리며 우는 건 그저 내 앞에 놓인 맥주 캔과 하늘 일 뿐.


나 대신 울어주는 하늘을 이유 삼아, 맥주캔을 위로 삼아, 실수로 맛있게 된 부침개를 안주 삼아.


비 오는 나의 아침이 든든히 채워진다.

뱃속도 덩달아 부침개로 채워진다.


사소한 부침개 한 장으로 채워진, 비가 오는 아침이었다.

비도 오고 그래서. 부침개.




PS.

부침개라  몇 번을 쓰고 있으면서도 내겐 "정구지 찌짐"이 더 익숙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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