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뜨자 마자 바쁘게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고 어린이집에 보냈다. 남편의 건강검진 후 발견된 문제로 상급 병원에 진료 의뢰를 한 터라 생일이고 뭣이고 서울에 있는 병원에 다니러 갈 준비로 바빴다.
이동을 위해 차에 탐으로써 부산했던 아침이 막을 내리고, 그제야 나는 여유있게 휴대 전화를 손에 쥘 수 있었다. 생일 축하 메세지와 선물 그리고 송금까지 나도 깜빡한 생일을 확인시켜주는 연락들을 보며 인생 헛산건 아니다 싶어 내심 흐뭇했다. 멀리 사는 나를 잊지 않고 기억해준 사람들이 참으로 고마웠다.
그 중에서도 카카오톡으로 생일 축하해 한 마디와 함께 대학 선배로부터 선물이 와있었다.
해마다 서로의 생일을 챙겨온 탓에 카카오톡 생일 알람도 꺼두었음에도 선배는 이번에도 잊지않고 잘 기억해주었다.
작년에는 바디미스트더니 올해는 헤어미스트를 사주심
작년에는 샤넬 바디미스트를 선물로 보내주시더니 올해는 샤넬 헤어미스트를 보내주셨다. 선배 덕에 나는 그야말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샤넬을 두르게 생겼다.
괜히 선배에겐 뭐 이리 비싼 걸 보냈냐고 너스레를 떨긴했지만, 비싼 샤넬을 생일 선물로 받은 내 입꼬리는 한 없이 올라가고 있었다.
남편도 안사주는 샤넬을 사주는 이가 바로 나의 선배다! 하며 옆에서 운전 중인 남편에게 으스댔다. 비싼 선물보다 더 자랑스럽고 든든한 것은 나를 챙겨주는 선배의 존재이다.
이제는 나만큼 선배와 친해진 남편이 선배의 생일도 잊지 말고 잘 챙기라며 응원해준다. 우리는 배우자도 응원해주는 사이좋은 관계이다.
그러고보니 벌써 선배를 안지도 20년이 지났다.
대학에 입학하고 신입생 환영회를 통해 존재를 알게된 후 내 인생의 절반을 알고지낸 선배이지만, 사실 처음부터 우리가 친했던 것은 아니다.
내가 대학 1학년일 때 선배는 군대에 다녀와 복학을 하며 반장 같은 '총대' 일을 했다. 학생회다 MT다 OT다 하며 전달자로서 나와 겨우 몇 마디만 섞었을 뿐 우리가 친숙해질 일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복학을 한 선배들조차 존대를 할 정도로 싸가지 밥 말아 먹은 미친 개같은 애였다. 건들면 무는, 미친 개.
시험 기간에 컨닝을 한다고 책상에다 잔뜩 써두면 교수님께 말씀드려 자리를 바꿔버리기도 했고, 반말로 말을 걸명 쌩~하고 못들은 척 하거나 시비조로 되받아 치곤 했다. "언제 봤다고 반말이래? 나도 같이 깔까?" 하면서.
그리고 나는 사회체육학과도 아니면서 험멜이나 훼르자 카파 같은 트레이닝 복을 교복처럼 입고 다니던 반항아이기도 했다. 남자들만 드글 드글한 흡연실에 당당히 들어가 긴 머리를 휘날리며 담배 연기를 휘날리기도 한 팜므파탈의 결정체였다.
늘 시선에 날이 서있다보니 말 한마디 잘못 걸었다가는 오만상을 다 쓰고 불결한 듯 보는 내 시선을 받아내야하니 자연스레 학번이 빠른 선배들은 나와 마주 대하길 꺼려했다.
게다가 학과에서 손가락 안에 꼽히도록 성적이 좋다보니 싸가지 없는 나를 보며 뒤에서는 재수없는 년이라고는 할지언정, 감히 그 누구도 내게 함부로 말하거나 행동하는 이는 없었다. 나는 그 조차도 멋으로 알고 살았다. 단, 친한 친구들과는 매우 잘 지냈다.
그런 내게 선배는 늘 웃으면서 "이번에도 안갈 거냐?" "이번엔 한 번 가주라." "이번엔 한번 가 보자."하며 끊임없이 학과 행사에 참여하라며 구애 했다. (나와 함께 몰려다니는 아이들 중에 이쁜 애, 착한 애, 술 잘먹는 애가 있었기에 그런 것이지 나 때문은 아니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나는 신입생 환영회 때 술을 먹고 개가 되는 몇몇의 인간들을 본 후 학과의 술자리에는 절대 가지 않았다.
학과의 술자리의 불참과는 별개로 그래도 나는 선배는 나름 좋게 생각하고 있었다.
책상 위에 컨닝을 해둔 선배놈들 중에 힐난하는 나의 말을 듣고 책상을 지운 유일한 사람이 선배였기 때문에 나는 그래도 선배를 '그래도 양심은 있는 놈' 쯤으로 여겼다. - 나중에 들어보니 이미 준비된 다른 컨닝 페이퍼가 있었기에 책상을 지울 수 있었던 거라고 했다. 순진하게도 나는 선배에게 속은 것이다.
대학교 4학년때, 교수님을 모시고 했던 논문조 뒷풀이를 어쩔 수 없이 가야만 했다. 몇 년 만에 학과 생활에 참여했으면서 나는 또 시한 폭탄이 되어버렸다. 다른 동기에게 외모비하 발언을 하는 선배놈을 정색하고 말로 들이받았다. 술이 거나하게 오른 선배놈은 나를 죽일년 살릴년 하며 삿대질을 했었는데, 나는 친하지도 않은 동기의 편을 들어주느라 목에 핏대를 높여 그 놈과 대차게 싸웠다. 좋은 뜻으로 가진 술자리에서 싸움이 일어나자 이번에도 논문조 조장이었던 선배가 나서서 중재를 했다.
"저런 새끼도 선배라고 저렇게 지랄하는 거 그냥 보고 둘거면 선배도 똑같은 사람이니까 앞으로 나 아는 척 하지 마요."
욕을 더 퍼부어주지 못한 게 분해서 씩씩대는 내게 선배는 소주 잔을 쥐어주었다.
"에이... 행님이 여자를 몰라가지고 친해지고 싶은 마음에 아무말이나 던진 건데. 절대 나쁜 듯으로 한 게 아니고 진짜 술 먹고 실수한 거라니까. 뭘 또 닌 말을 그렇게 하냐. 저 행님도 나쁜 사람은 아니다."
"저쪽 가서는 또 나보고 그리 나쁜 년는 아니라고 두둔 할 거에요? 그러지 마요. 저 개 같은 새끼들한테 좋게 보이고 싶은 마음 하나도 없으니까!"
"아라쓰 아라쓰. 이 술 먹고 기분 풀어라. 내가 행님들한테도 가서 달래고 해야하니까 괜히 더 섭섭해 하지 말고."
"아 가요 가요. 필요 없으니까. 그러니까 안온다니까."
"그래 니는 임마, 올 때 마다 이리 한 건씩 사고를 치노."
맞부딪힌 술잔에 담긴 투명한 액체를 단 번에 삼키고 선배는 돌아갔다. 몇 년 동안 동기들이나 선배들 사이에서 회자된 이 일만 생각하면 용감했던 나도 부끄럽고 기꺼이 폭탄 처리반이 되어준 선배에게도 늘 미안하다.
그런 선배와 내가 친하게 된 계기가 무엇인지 우리 둘 모두 기억하지 못한다.
기억하기론 대학을 졸업한 이후부터 선배와 더 자주 보고 밥도 먹고 술도 마시면서 잘 지냈던 것 같다.
그렇게 20여년을 지내는 동안 선배는 몇 번이나 내가 부족하거나 모자란 모습을 보여도 나를 비난하지 않고 충고해주고 격려해주었다. 심지어 결혼을 한다는 내게 선배는 나의 사랑을 인정은 하면서도 다시 잘 생각해보라는 조언은 잊지 않았다. 끝내는 결혼을 한다하니 밥은 굶지말고 살라며 결혼 선물로 가스렌지를 사주셨다.
지난 명절에 시댁에 가지 않고 친정에 온 김에 선배를 만나 술잔을 기울였다.
매번 남편과 같이 만나다가 둘이 만나니 옛 생각도 나고 좋았다.
대꾸는 없지만 잘 들어주는 사람이 있으니 남편 욕도 실컷 했다. 또 아내로 엄마로 사는 게 힘들어서 하소연과 한탄도 줄줄줄 늘어놓았다. 선배 역시 생각같지 않은 결혼 생활에 대한 고민을 이야기 했다.
둘이서 세 시간만에 소주 여덟 병을 비웠다.
둘이서 마셨어도 훨씬 더 많이 마신 건 선배일텐데 내가 먼저 취했다.
"아 임마, 많이 약해졌네. 옛날만 몬하네."
1년 366일 술을 마시던 내가 결혼을 하고 임신 출산 수유를 하는 동안 알콜에 많이도 약해졌다.
"집에 가라 임마. 몸 좀 더 만들어서 덤비라."
술에 취한 나를 택시에 태워 보내주며 선배가 말했다.
술 값도 선배가 다 내주고 결제 내역이 없는 걸 보니 아마 택시비도 선배가 내준 것 같다.
주식만 말아먹지 않았어도 우리 선배 참 큰 돈 만지며 살았을, 배포 큰 사람인데!
잃은 돈 생각에 내가 괜히 아쉽다. 비싼 술 얻어먹어 놓고 말이다.
술에 잔뜩 취해 걸음도 지그재그인 나를 보며 큰 딸과 친정 엄마는 난리가 났다.
"아이고. 애 엄마가 왜 이리 술을 많이 먹고 다니노. 애 보기 안부끄럽나?"
"할머니, 엄마가 사는 게 힘들어서 가끔 이렇게 술 많이 먹는 거 나는 이해해. 엄마도 풀 데가 있어야지. 나는 괜찮아."
"애 앞에서 얼마나 술을 먹고 했으면 애가 이런 소리를 하노!"
"자주는 안그래. 일년에 몇 번 그래. 오늘은 부산이니까 할머니가 좀 봐줘."
"아이고... 무셔라. 그러게 선배한테 시집 갔으면 엄마 가까이에서 살고, 하나 걱정할 거 없이 얼마나 좋노."
"할머니! 그럼 나랑 예삐랑 막내가 없는데? 그건 안되지!"
멀어져가는 정신에도 엄마와 딸의 대화가 귀에 쏙쏙 박힌다.
대학원을 다니는 나완 달리 취업을 한 선배는 회사에서 나오는 판촉물을 가끔 가져다 주었다.
제약회사를 다녔기에 연봉도 꽤 받아서 밥도 잘 사주었고, 비싼 안주에 술도 잘 사주었다.
대학원 졸업식날, 전 졸업생 중에서 나보다 더 큰 꽃다발을 받은 사람은 없었던 것 같다.
늦게 와서 큰 거만 남았다면서 어울리지 않는 어여쁜 꽃다발을 던져주고 선배는 바쁘다며 가버렸다.
몇 년 동안 그런 선배를 지켜본 우리 엄마가 점 찍어 둔 1등 사윗감이 바로 선배였다.
"엄마, 나한테 선배는 남자가 아니었다니까!
그리고 나 같은 애는 선배 스타일이 절대 아니라고!
아! 맞다! 내가 이번에 술 먹으면서 선배한테 다시 태어나면 우리 둘이 살아보자 했거든.
우리는 시집 장가를 잘못가서 배우자 때문에 이리 고생을 하잖아.
근데 엄마!!!! 선배가 다시 태어나도 나는 아닌지 대답을 안하더라!"
"내가 봐도 니랑은 안 할만 하긴 하지."
"아... 이 엄마가! 내가 어디가 어때서!"
단 한번도 나는 선배를 남자로 대한 적 없고 남자로 본 적 없고 남자로 생각한 적 없다.
선배 역시 마찬가지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단 한번도 내게 남자로서 다가온 적 없었다.
(무엇보다 선배가 만난 여자친구나 지금의 아내는 겉도 속도 나와는 전혀 다른 스타일이다. 선배가 눈이 좀 높다는 건 인정을 한다.)
싸가지는 없지만 개념은 있던 나라서 여느 학우들과는 달리 이렇게 오래 만날 수 있는 거라고 선배가 그랬다.
20년의 세월동안 우리는 많은 술을 마셨고 그만큼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결혼을 하기 전에는 서로의 연인에 대한 고민을 들어주고 함께 고민해주었다.
결혼을 한 이후에는 서로의 치부나 과거도 털어놓으며 조언을 해주곤 했다.
선배가 있어서 나는 진짜 든든하다.
돈 빌려 달라할 용기는 없어도, 힘들 때 술 한잔 사달라고 기꺼이 부탁할 수 있는 사람이 선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