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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딱좋은나 Jul 01. 2023

꿈을 찾아서

작가가 꿈이라고 왜 말을 못해!

국민학교 때부터 내 꿈은 글을 쓰는 작가였다.


내가 읽고 있는 수많은 책을 지어낸 사람들과 그들의 손에서 탄생해 내 손에 쥐어진 책이 나에겐 워너비이자 로망이었다.


말과 생각을 글로 풀어내고, 다른 사람들과 다른 생각을 하는 그들의 글이 책으로 나오기까지 일련의 과정은 마치 나와는 다른 세상, 딴 세계에서 벌어지는 일 같았다. 책 자체가 내겐 동경의 대상이었다.



"나도 이렇게 내 이름이 적힌 책을 내 보고 싶어."



어떠한 글을 쓰겠다, 누군가가 내 글을 읽고 어떤 생각을 해주면 좋겠다 하는 식의 직업적 소명의식은 없었다. 그저 내 꿈에 대한 각오부터 오로지 자기만족을 위한 자기애 표출의 일부였다.


하지만 나의 넘치는 자기애는 그다지 인정받지는 못했다. 소소하게 글짓기로 상을 타 오고 학교대표로 대회에 나가더라도 결과는 그리 대단하지 않았다. 


잔재주 정도일 뿐 남들보다 특출 나지도 않았기에 나는 내가 글쓰기를 생업으로 할 만큼 그다지 재능과 재주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저 자기만족을 위한 글 쓰는 재미만 느낄 뿐이었다. 그래서 오랫동안 일기정도만 썼다.





작가가 되고 싶다는 내 말에 부모님들은 '취미로만 해라, 직업은 다른 걸 찾아봐'라 하셨다.


그때 만해도 나는 뭐든 적당히 남들 하는 것만큼은 또 적당히 잘하는 딸이었다 보니, 못 배우고 3D 직업군의 당신들보다는 나은, 적어도 남들이 알아주는 직업을 갖길 바라셨다.


여러 번 그 소리가 반복되자, 어느 순간부터 나는 "작가가 되고 싶어"라는 말을 하지 않게 되었다. 작가라는 꿈은 부끄러운 게 돼버렸다. 그래서 나는 내가 바라고 원하는 꿈을 더는 밖으로 드러내지 않게 되었다. 그 누구에게도.


그렇게 청소년기가 시작되었고 나의 꿈은 나조차도 깜빡 잊어버려 잃어버린 바람 정도가 되었다.


어차피 가져도 되는 게 꿈이라 생각했다.



남들은 그때가 제일 좋을 때라는 학생이건만, 꿈이 없으니 공부를 해야 할 이유도 명분도 없었다. 내 세상에서 존재하던 유일한 꿈을 접으니 학업에 대한 의지도 학업에서 느끼는 재미까지도 함께 접혔다.


공부를 하지 않으니 당연히 놀게 되었다. 아무리 신나게 놀아도 한동안은 그동안의 기본기 탓에 괜찮았다. 적당히 적당히 남들에게 쪽팔리지 않을 정도의 성적을 유지했다. 하지만 학년이 높아질수록 기본기만으로는 택도 없었다.


운이 좋아 부산에서도 전통 있는 인문계 공립학교로 배정을 받았거기에서도 적당히 잘하는 성적을 유지했다. 문예부 동아리는 들어가지 않았다. 고작 동아리 활동 하나일 뿐인데, 문예부조차도 나와 다른 아이들이 가는 곳이라 생각했다. 내가 갖지 못한 필력을 가진 그들만의 리그. 그때의 나는 그렇게 생각한 못난이였다.


취미가 붙지 않는 공부를 더 하기 싫었기에 절대 재수는 없어야 했다. 적당히 성적에 맞춰 집에서 가장 가까운 학교에 무조건 붙는 수준의 학과를 선택하여 사립 대학에 진학했다.


대학3학년 때쯤 다섯 손가락 안을 유지하던 내 성적이 딱 한번 휘청한 적이 있었다. 그 시기를 놓치지 않고 평소 친하게 지내던 교수님 한 분께서 나를 부르셨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으시고 일방적인 미션을 던져주셨다. 협박을 한 것도 아니건만 구구절절 맞는 말씀으로 성적이 떨어진 나의 자존심을 살살 건드리셨다. 찍소리 한 번 못해보고 나는  교수님의 언변도발에 굴복하고 복종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퇴직을 앞둔 다른 교수님을 대신해, 교수님의 퇴직기념 자서전을 교정 보는 작업에 참여했다. 빼곡한 글자를 읽고 잘못 입력된 글자를 찾고 채우지 못한 이야기도 글자로 박아 넣었다. 그땐 돈도 안 받는데 막일도 이런 막일이 없다며 구시렁거렸지만, 교수님께서 한 권의 책으로 탈바꿈한 내 노력을 건네주셨을 때 정말 그게 마치 내 자서전인 양 묘한 기분을 느꼈다. 하얀 바탕에 까만 글자가 책이 된 걸 눈으로 처음 본 경험이었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심해로 가라앉은 글쓰기에 대한 욕망과 열정은 여전히 떠오를 생각이 없었다. 여전히 나는 내가 나아가야 할 길의 방향조차 잡지 못하고 깊고 어두운 곳에서 표류 중이었다.


얼떨결에 학교에 남아 대학원에 진학하게 되었다. 학과조교자리를 내주며 생색내던 그 교수님에겐 다 생각이 있으셨다.

학문분야평가.

그 보고서라는 이름의 두꺼운 책 한 권을 만들어냈다. 교수님들을 도와서이긴 했으나 내 공이 교수님 분의 공을 합한 것 정도는 되었다고 생각한다. 각기 다른 교수님 네 분의 자료조사부터 보고서 취합 및 정리는 내가 다 했으니.


아침 7시 반에 출근하여 저녁 10,11시까지 학과일과 보고서 작업을 하느라, 나는 신우신염에 걸려 난생처음 119도 타 봤다. 그 정도로 열심히 했으니 나의 공은 교수님들과 견주어도 절대 뒤지지 않았을 테다.


  눈물의 결정체, 책의 모양으로 변신한 보고서가 나왔고  실사 평가까지 무사히 마쳤다. 오줌까지 참아가며 보고서를 쓴 보람이 있게 다행히 매우 우수 등급을 받았다.


이제 내 역할은 다했다며 조교자리를 내던졌다. 자유의 몸이 되어 이제 한숨 돌리나 했는데, 이제는 졸업을 위해 논문이란 걸 써내야 했다. 베껴 쓰든 각색을 하여 쓰든 온전한 내 의지로 하얀 창을 까만 글자로 채워 넣어야 했다.


지금 보면 별 것 없는데 그땐 내가 마치 학자가 아닌 작가가 된냥 꽤나 멋을 부리며 논문을 썼다. 그리고 그 노력은 하드케이스로 인쇄하는 것으로 마무리해 주었다. 그렇게 석사 학위 논문은 내 첫 작품이 되었다.



찢어지고 바래진 내 꿈들을 마흔이 될 때까지 가슴속 어딘가에 생매장을 시켜두었다.



아이들이 자랄수록 커서 뭐가 되고 싶냐고 묻기만 하지, 꿈이 있긴 했었나 싶었다.


꿈이라는 이정표가 있었다면 나의 삶도 달라지지 않았을까?

나는 왜 나의 꿈을 부끄럽게 여겼을까?

꿈꾸는 자유조차도 스스로에게 주지 못했다는 게 참 아쉽다.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마음껏 꿈꾸고 싶다.

내 꿈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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