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만 기다려 봐!
이혼과 재혼 사이의 우리 14
이혼 전에는 그가 "조금만 기다려 봐." 하는 소리 앞에는 항상 "오빠가 돈 많이 벌어서 호강시켜 줄게"가 붙었었다.
"우리 여보 고생하는 거 내가 다 알지. 조금만 기다려 봐. 지금 기초공사 튼튼히 하고 있는 거니까 올리면 또 금방 올라간다." 하고 허풍에 뻥과 희망사항을 담아 생활고에 지쳐가는 나를 달래고 위로하였다.
이렇게 우리 사이에서 "조금만 기다려 봐"는 더 나은 앞날에 대한 희망이자 염원의 메시지였다. 백 번 천 번도 더 속으면서 믿고 기대게 되는.
또 로또만 당첨되면 넷째를 낳겠다고 하던 전남편. 그러던 그가 변했다.
이혼 후부턴 로또에 당첨되면 내게 돈을 다 줄 테니 자신을 찾지 말라 한다. 제 몫의 돈은 없어도 되니, 제 새끼들만 잘 키워달라고 한다.
"그래! 지금 내 빚 다 끄고 애들 대학 공부까진 시켜야 하니 15억만 떼 줘."
상상만 해도 즐거운 로또당첨이다 보니, 흔쾌히 나도 내 요구사항을 말한다.
"조금만 기다려 봐! 로또 되면 진짜 돈은 다 줄 테니까 이제 나 찾지 마라. 야호, 난 자유다!"
상상만으로도 즐거운지 전남편의 얼굴에 웃음꽃이 핀다.
상상에서의 로또당첨은 너만 즐겁겠냐 나는 더 즐겁다. 지금의 내 상황은 돈이면 다 해결될 수 있으니까.
지금 당장은 절대 없으면 안 될 것 같아도 막상 닥치면 여자인 나는 전남편의 부재가 반가울 것이다.
반면 남자인 전남편은 밥통 식기세척기 세탁기 건조기 청소기 역할에 화장실 청소까지 하는 나의 존재가 없는 심각한 불편함에 직면할 것이다.
또 혼자 있고 혼자 무언갈 하기 싫어하는 전남편이 나홀로 자유를 찾아간다는 건 불가능일 것이다. 단 며칠간 고향집에 처박아두면 나의 그늘로 회귀하게 될 그를 잘 알고 있다.
그놈의 돈이 뭐라고! 간다 가라 하고 노냐....으이구!
"자꾸 그럴 거면 내려. 내 인생에서 꺼져."
저녁 식사로 맛있는 돼지갈비를 먹으며 소주를 마신 탓에 나에게 차키를 맡긴 것도 밉건만 아이들과 함께 뒷자리로 가 앉았다.
가뜩이나 맘에 안 드는데 이번에는 차의 에어컨 켜고 끄는 문제로 급발진을 하며 목소리를 높인다. 술이 올라 정신못차리는 것 같은 전남편에게 이번엔 차에서 내리란 소리가 내 입에서 나왔다. 차를 멈추지 않고 계속 달리고 있으면서.
"조금만 기다려 봐. 꺼지지 말라해도 꺼져줄 거니까."
술김에 화난 마음을 고대로 드러내는 전남편.
"그게 언젠데? 로또 되고 나서?"
여느 때처럼 비웃으며 식상한 되받아치기를 했는데!
"로또 안되도 젊고 돈 많고 이쁜 언니 만나서 가면 되지."
"젊고 돈 많고 이쁘기까지 한데 널 왜 만나. 총 맞았어?"
이번에 돌아온 그의 반응이 다르다.
이건 보기나 예시에 없던 답인 데다 술을 먹고 꺼내보인 진심인가 싶어 순간 내 가슴이 철렁했다.
아무렇지 않은 척 대답은 꿈 깨란 식으로 했지만 핸들을 쥔 손엔 땀이 나고 속은 영 불편하다.
아쭈, 이제 나가라 나가라 하니 진짜 나간다 하네? 싶다.
나가라 할 땐 언제고 나간다는 놈이 왜 이리 괘씸한지 내 마음을 나도 모를 일이다.
"아빠 정신 차려. 엄마도 아빠보다 6살 어려. 더 어린 여자를 어떻게 만나."
"그래 딸도 둘이나 키우는 사람이 너무 어린 여자 좋아하지 마라. 벌 받는다!"
"아빠, 그리고 우리 엄마가 빚이 많아 그렇지 집도 차도 사무실도 다 엄마 거잖아. 엄마보다 돈 많은 사람을 아빠가 어떻게 만나."
"그래 빚도 자산이라 그랬다. 잘 생각해라. 어디 가서 네가 이만큼 누리고 살래."
"아빠 엄마도 애 낳기 전에 이..... 쁘진 않았네. 그래 이건 인정. 아빠가 엄마보다 인물은 좋으니까."
우리 집 아이들은 가끔 불필요하게 솔직하다.
"아니 왜 우리 둘이 얼굴을 비교하는데! 이쁜 언니가 아빠 안 만나준다 해야지!"
"그래 아빠! 이제 이쁜 언니가 보면 아빠는 배도 나오고 머리도 벗어지고 피부도 더럽고. 아무튼 안 받아줄 거 같은데."
아이들과 나의 티키타카에 전남편은 눈을 꼭 감고 자는 척이다. 저 속을 알 수 없으니 내 속도 편치 않다.
우리가 함께 쌓아온 시간만큼 우리에게 의미가 생긴 물건이나 말들이 있다. 사랑했었던 시간만큼 그 작은 하나 또는 한마디에 너무 많은 의미를 두고 살았다.
그래서 이렇게 달라진 그의 반응 하나, 그의 말 한마디에 실망도 서운함도 크게 느낀다.
왜,
우리는 이혼과 재혼 사이에 있는 전남편 전부인 관계이니까.
앞으로 우리가 함께 할 시간동안 어떤 말과 행동 물건들이 의미가 있어질까. 기대도 되지만 불완전한 관계이기에 두렵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