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딱좋은나 Jul 18. 2023

고무장갑이 없어서 울었다

시간에 글자 더하기 9

식기 세척기를 사용하면 손 설거지는 안해도 될 줄 알았다.

역시 무식하면 별의 별 착각을 다 한다.


5인 가족이 매일 2~3끼를 먹는 집에서

식기 세척기는 주부인 나에게 시간적 자유와 노동으로부터의 해방을 준 것은 맞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큰 냄비, 깨지기 쉬운 유리잔, 벗겨질 수 있는 식기류와 조리도구, 날이 마모될 가위나 칼.

식기세척기와는 별개로 손 설거지가 반드시 수반되었다.




남편이 라벨기가 필요하다고 했다.

두 번 묻지도 않고 예쁜 기계에 비싼 내지까지 넉넉하게 주문하여 주었다.


딸들이 체리가 먹고싶다고 했다.

두 번 생각하지도 않고 농수산물 시장의 청과가게로 가서 한 박스를 사왔다.


딸의 친구가 키즈풀에서 생일파티를 한단다.

작은 딸은 초대를 받아 갔지만, 큰딸은 가지 못해 하루 종일 우울해 했다.

여름 휴가도 내 일 때문에 가지 못하니, 거금을 들여 한 타임 예약을 했다.


돈을 버는 이유는 필요한 곳에 쓰고, 하고 싶은 것을 하고, 먹고 싶은 것을 먹기 위해서이다.

그래서  내 가족이 원하는 건 최대한 해주려 노력한다.

나는 엄마이니까. 나는 우리집의 가장이니까.




엄마인 나도 사람인지라 얼마전부터 시작한 공부까지 더해

몇 주간 정말 열심히 살았더니 체력이 딸리기 시작했다.

주말이 시작되는 금요일 저녁부터 이틀 동안 아무것도 안했다.

아니 정확히는 내 몸이 그로기 상태가 되어 그 무엇도 할 수가 없었다.

머리로는 일어나서 해야할 일들이 주르륵 펼쳐지는데 몸이 따라주지 않았다.

그냥 마음의 소리를 무시하고 나몰라라 버텨봤다.


역시나

아무도 나를 도와주지 않는다.

누구도 나를 대신해주지 않았다.


빨래는 산처럼 쌓여서 이틀을 쉰 세탁기는 이틀을 꼬박 예닐곱번이나 돌아갔다.

건조기가 있는 앞 베란다는 유리창이 하루종일 뿌앴다.

가사 노동은 쉬어도 먹는 건 쉴 수가 없다.

매 끼 다섯 식구가 사용하는 그릇들이 한 두개가 아니다보니

어디에 있었는지도 모를 그릇들이 다 나왔다.

산처럼 쌓이다못해 넘쳐나고 있는 더렵혀진 그릇들은

싱크에는 더이상 들어갈 자리가 없어 결국 개수대 위까지 점령 해버렸다.

바닥은 오만가지 부스러기와 가루들이 장마철의 끈적함과 엉켜 눌러붙었다.

실내화가 아니라면 맨발로 다니기도 불쾌할 지경이다.



남편에게 청소를 부탁했다.

마침 고장난 무선 청소기를 대신해 유선 청소기를 이리 저리 옮겨다니며 청소를 해주는 남편이 고마웠다.

딱 1평이 모자란 40평의 집을 정말 깨끗이도 청소해주었다.

땀까지 뻘뻘 흘리며 걸레질을 하며 아무곳에서 간식을 먹고 치우지 않는 아이들에게 잔소리를 했다.

아이들은 걸레를 든 아빠를 피해 웃으며 도망다녔다.

몸은 힘든데 청소하는 아빠와 아이들의 웃음소리에 행복했다.


힘을 내서 나도 자리에서 일어나 집안 일을 시작했다.

제일 문제인 주방으로 갔다.

남편은 다른 건 다 도와줘도 설거지는 절대 해주지 않는다.

입덧을 할 때에도 안해주던 설거지를 부탁한다고 들어줄리 만무하다.

청소라도 하는게 어디냐며 마음을 다잡았다.


가볍게 헹군 그릇들을 식기세척기에 넣고 작동 시켰다.

사이즈가 큰 것들 위주로 먼저 손설거지를 했다.

다음은 유리잔이다.

유리잔들은 깰까봐 불안 불안하다.

내 손목은 어릴 때부터 고질병이 있어 순간 순간 힘이 빠져버린다. 아무런 전조 증상도 없이...

그래서 유리컵을 쥐는 내 손에 힘이 더 잔뜩 들어간다.


고무장갑을 끼면 덜 미끄러울텐데 고무장갑이 없다.

고무장갑이 없다..


갑자기 눈물이 났다.


고작 고무장갑 그거 하나가 뭐라고,

그 걸 여지껏 못사고 있나.


내 남편 내 자식들이 필요하다 먹고싶다 하고 싶다 하는 건 다 챙겼으면서, 나 밖에 안쓰는 고무장갑 구입은 오늘도 미루고 어제도 미루었다.


나만 쓰니까, 하루종일 계속 쓰는 건 아니니까, 여름이라 갑갑하니까.

하는 말 같지도 않은 변명을 늘어놓으며 엊그제 다이소에 갔으면서도 부러 사지 않았다.




나를 위해서 꼭 살지 않아도 된다.

그렇게 생각해왔다.


그런데 고무장갑이 없어서 울었다.

나도 몰래 울컥해 눈물이 났다.


내가 나 스스로에 대한 욕심을 다 버리지 못한 것일까?

끊임없이 자아와 충돌하는 현실이 당연하면서도

아주 가끔은 버겁다. 서글프다....




그 날 밤 큰딸이 내게 쪽지를 주었다.

 




나는 인정받고 있다.

고무장갑이 없어서 흘렸던 눈물보다

 배는 더 값지고 소중한 눈물이 흘렀다.


 딸이 알아 주었다.

나의 열심과 나의 최선을.

그래 그거면 된 거다!

진짜로 나는 행복에 겨운 사람이다.

내일도 더 열심히 살아갈 이유와 힘이 생긴다.




딱좋은나의 브런치북도 만나보세요



1. 용 쓰는 결혼 생활




2. 이혼과 재혼 사이의 우리




매거진의 이전글 재산세가 내려서 좋은데 슬프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