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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딱좋은나 Jul 23. 2023

주택청약 다자녀특공당첨 1

낳은 김에 키웁니다 15

그동안 내가 애 셋을 낳고 다둥이를 키워서 좋은 점은

어린이집을 대기 없이 들어가는 것과 공영주차장 주차비 50프로 감면뿐이었다.


그런데 엄청 큰 선물을 국가로부터 받게 되며

우주가 돕던 나는 대한민국을 이바지하는 주역이었음을

비로소 실감할 수 있었다.


내가 받은 그 선물은 다자녀 특공으로 주택청약을 통한 내 집 마련을 하게 된 것이다.

입주를 코 앞에 둔 시점에서 내 집 마련의 이야기를 써볼까 한다.

처음은 예당 두번째는 당첨 ; 다자녀의 힘!




실거주를 목적으로 했던 서울 목3동 빌라와

우연한 기회에 남동생의 결혼자금을 끌어다가 매입한 경기도 동쪽 끝 미분양 아파트에 더해

남동생과 공동명의로 아버지께 증여받은 시골집까지

한 때는 일시적 3 주택자인 나였다.


쥐고 있는 문서만 여러 개다 뿐이지

다 팔아봐야 은행 돈 갚고 나면

고작 몇 천만 원 남짓한 내 자산.


그 마저도 남편의 사업이 쫄딱 망하며 수입원이 끊겨

겨우 대출 연체를 막고 있는 것도 모자라

온 집안에 빨간딱지가 붙었었다.


사업하다 받지 못해 주지 못한 돈은 어쩔 수 없지만

갚아야 할 개인의 부채도 적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나는 시골집의 공동명의 지분 50퍼센트는 남동생에게 재증여했다.

그리고 급하게 빌라와 아파트를 처분하여 빚잔치를 했다.


어차피 종갓집 장남인 동생이 결혼 5년 만에 아들을 낳았기에

우리 집안을 대를 이어 건사할 종손이 생겨 딸인 나는 필요가 없어졌다.

시골집과도 400킬로미터 이상 멀리 떨어져 살고 있기에

10년 동안 한  밖에 못 간 그저 허울뿐인 맏딸이 지분을 가지고 있는 것도 우스운 이야기였다.

시골집에게 나는 하등 쓸모없는 존재기에 욕심을 부릴 이유가 없어 재증여를 하면서도 세금까지 모두 내가 내었다.


서울이라도 엘리베이터도 없는 작은 빌라였고,

아파트는 서울에서 가장 먼 경기도인 데다

둘 모두 시간이 촉박한 급매이기도 했다.


안타깝게도 내가 집을 팔 당시 부동산은 급등기가 시작되기 전이었다.

그래서 나는 몇 년간 목숨처럼 여긴 집 두 채를 팔았음에도 그저 집값 상승의 대단함과 달콤함을 소박하게 겨우 맛만 볼 수 있었다.


쉽게 번 돈은 쉽게 나간다고 했던가.

수입 없이 일 대신 재판에 매달리던 1년 동안 쌓인 나와 남편의 카드론, 그리고 국세와 생활비로 사용한 카드 빚을 모두 해결하고 나니 내게 남은 돈은 다섯 손가락 중 하나 둘은 접어야 하는 수천만 원뿐이었다.


경기권에서 그 돈으로는 아이 셋을 데리고 살 집을 월세로 밖에 얻을 수 없었다.

문제는 그 당시 교습소를 갓 시작했던 나의 경제적 능력으로는 상가와 집 월세와 가계에 소요되는 생활비를 도저히 혼자서 충당할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겨우 초등학교에 입학한 딸들 또한 내가 일하는 동안 찬물에 라면을 불려 먹거나

하루종일 티브이를 보며 온 집안을 난장판으로 만든 채 바닥에서 잠이 들어있 했다.

더운 여름에도 에어컨을 조절할 줄 몰라 껐다 켜길 반복해 여름 감기에 걸려 크게 고생도 했다.

그러고 나니 아예 에어컨은 켜지도 않고 그냥 땀을 뻘뻘 흘리며 붉은 얼굴로 쓰러지듯 잠이 들어있곤 했다.


위험하다는 이유로 가스레인지 사용을 못하게 막았고,

다칠 수 있다는 이유로 정수기의 온수를 꺼놓았고,

위급 상황이 발생할까 봐 선풍기도 내어놓지 못했었기에 벌어진 모습이었다.

 

남의 자식을 가르치느라 내 자식들을 전혀 관리하지 못했다.

아파도 간호해 줄 수 없었고, 아이들끼리만 두어야만 했다.

둘 모두 초등 저학년인데도 하교 길에 데리러 가지도 못했다.

엄마로서 그 시간은 너무나도 견디기 가슴이 아팠고 나의 무능함에 이가 갈렸다.


그때만 해도 남편과 이혼을 하고 따로 떨어져

아이들과 우리들만의 홀로서기를 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엄마 아빠는 같이 키워주겠으니 부산으로 오라 하셨지만,

내 알량한 자존심에 망해서 고향인 부산으로 가는 것도 싫었다.

우리 아빠는 사람은 서울로 보내고 말은 제주로 보내라는 말을 하시며

멀리 시집간 딸이 잘 살지는 못해도 서울땅에서 사는 걸 애써 위로로 삼으셨다.

그런 내가 금의환향을 해도 모자랄 판국에

애셋을 줄줄이 데리고 친정집 근처로 돌아오는 건 안될 말이었다.

정말 혀를 깨물고 죽는 한이 있더라도 내 자존심 상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당시 부산의 집 값 또한 그리 싸지 않았다.)


하아................................

아무리 이리저리 각을 재 봐도 답이 안 나오는 상황이다.


고민 끝에 나는 어쩔 수 없이 엄마에게 SOS를 요청했다.

엄마는 평생을 무주택자로 살아오시다가 오로지 나를 위해

영혼을 끌어모으고 낼 수 있는 빚이란 빚은 모두 끌어들여

입주를 6개월 남겨둔 경기도 서쪽 끝에 위치한 아파트 분양권을 매입하셨다.

-급하면 엄마가 부산에서 오셔야 하니 공항과 가까운 곳으로 이사를 결심했다.


잔금을 치르는 날 내가 가진 얼마 안 되는 돈은

엄마 집으로 보증금이 나는 명목으로 모두 들어갔다.

그리고 나는 월세를 대신해 엄마의 집 대출이자와 세금을 부담하기로 했다.


엄마의 집은 나의 매도가 끝난 후에야 입주가 가능해야 해서

프리미엄까지 얹어 매입한 아파트 분양권이었다.

이 집의 빚을 평생 내가 갚으며 아이 셋과 살아야지! 했는데

나는 처음의 계획과는 달리 서류상 이미 전남편이 된 남편과 동거를 계속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남편은 허울이라도 그대로 있지만 문서뿐이었던 내 집이 있다가 없으니 참 불안했다.

마음이 뭔가 허전하고, 기댈 곳 없는 서운함이 자꾸만 생겼다.

남들은 나이 마흔에 성공의 초석을 잘만 다져놓는 것 같은데

나는 어찌 된 일인지 있던 재산도 다 팔아 없애고,

남편마저 전남편으로 보직을 변경해 버린 건지

나 자신이 실패자, 패배자가 된 것 같고 한없이 초라하게 느껴졌다.

자괴감이 들고 우울하고 의기소침해져 그 어떤 일에도 의욕이 생기지 않았다.


그렇다고 청약을 넣고 당첨이 되기엔 부족한 점이 너무나도 많았다.

무주택 기간은 채 반년도 되지 않았고,

주택 청약을 넣은 지 겨우 1년을 넘겼을 뿐이었다.


그런데 열심히 사는 내게 희망이라는 선물을 하늘이 보내주신 것인지

생각 없이 지원 연습이나 해보자며 청약홈을 이용했던 내가

예비당첨 후 두 번째 만에 다자녀 특공으로 덜컥 청약에 당첨되었다.


정말 안될 거라고 생각하며 지원했었던 곳이었다.

안될 거라 생각과 혹시 하는 생각을 더해서 1층 우선 배정까지 신청했었다.

그런데 발표날인지도 모르고 있던 날 아침,

청약에 당첨되었다는 문자가 날아오자 어안이 벙벙해졌다.


급히 청약홈에 들어가 보니 내가 지원한 아파트의 다자녀 특공 부문 지원자가 미달이었다.

내가 당첨된 동호수의 평형대가 예상보다 조금 더 크게 나와

당해 지역민들이 청약통장에 예치해야 되는 돈도 많아졌기에

다자녀라 하더라도 당해에서는 지원조차 할 수 없었던 경우가 많았다 했다.


나는 지역이 다른 경기도민이라 상대적으로 적은 돈의 예치만으로도 가능했다.

온 우주가 돕고 하늘이 도왔다고 밖에 말할 수 없는, 정말 넝쿨째 굴러들어 온 복이었다.


주택청약 예치금


2편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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