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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딱좋은나 Jul 22. 2023

가족의 캘리그래피

낳은 김에 키웁니다 14

오랜만에 우리 가족이 모두 함께 외출을 했다.


아동기의 아이가 셋이나 있는 5인 가족의 외출은  부산하고 소란스럽다.

외출을 하기 위해 집을 나서기까지만 해도 엄마인 나는 이미 진이 절반은 빠져 버린다.

씻고 닦고 옷 입고 하면 되는 외출준비 과정에서도 우리 집 별난 아이들은  단 하나의 스텝도 그냥 넘어가지 않는다.


이 옷이 네 옷이냐 내 옷이냐를 따지고, 누가 먼저 씻느냐로 싸우고, 내가 먼저 빗을 쓰고 있었다, 내 화장품 쓰지 말아라.

막내는 네가 챙겨라, 막내는 지가 알아서 이미 하고 있다며 언성을 높인다.


아니나 다를까.

오늘도 몇 번이나 요란한 전쟁을 치르고 나서야 차가 출발할 수 있었다.(그래서 솔직히 나는 아이들과 함께 집을 나서는 것이 그다지 유쾌하지만은 않다. 돈 쓰고 시간 쓰는데 마음이 상하는 경우가 매 번 있기 때문이다.)





오늘의 목적지는 일산에 있는 현대모터스튜디오이다.

집 밖을 나가자 아이들의 개성 넘치는 아이들의 본모습이 속속들이 드러난다.

역시나 큰딸의 이기심과 둘째의 짜증은 나를 수십 번도 더 화나게 했다. 미운 네 살, 미친 일곱 살이라더니 그 중간에 낀 막내 녀석도 오늘은 제대로 한몫을 했다.


집이었다면 몇 번이나 매를 들고 때리고 싶었지만 매가 없는 밖이라 참을 수밖에 없었다.

자리를 피하는 식으로 속을 삭히길 반복했더니,

어느 순간부터 아이들은 내가 없어져도 더 이상 찾지 않았다.

때가 되면 어련히 알아서 돌아오겠냐는 식이었다.

그게 또 편하면서도 조금 약이 올랐다.


"너네는 집에 가서 한번 보자!!!!"

하는 내 엄한 목소리에 아이들이 대번에 내 앞에 쪼르르 모여 두 손을 모았다.


"엄마, 잘못했어요. 안 맞을 거야. 때리지 마세요. 이제부터 안 그럴게요."


맞지 않겠다는 일념 하에 진심과 반성은 1도 섞이지 않은 영혼 없는 사과부터 하고 본다. 누굴 닮았나 싶을 정도로 약삭빠른 내 아들딸들!




아이들에게 체벌이라는 이름 하에 폭력을 행사해 온 나다.

말로 해서 안 듣고, 벌을 세워도 안 들으니 때리는 수밖에 없다고 아이를 때리는 스스로를 위안했다.

폭력도 답습인 건지 나를 때리던 엄마 아빠의 무서운 얼굴을 내가 아이들에게 보였다. 그러다 어느 순간, 아이의 잘못이 아닌 나의 감정에 따라 휘둘러지는 매가 보였다.


그걸 깨달은 때마침 딸들도 초등 고학년이 됐겠다,

나는 아이들을 때리는 것을 최대한 자제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무엇보다 나의 감정이 실린 체벌이 아이 몸에 남겼던 멍이 충격이었고 며칠간 그걸 보며 마음이 아팠다. 나도 맞아봐서 아는 아픔이고 수치이다.

일단 어떤 이유로든 내 아이가 아픈 것이  싫다. 매를 든 나는 나조차 제어하지 못하니 매를 들지 않는 수밖에 없다.


하지만 오늘은 정말 인내심의 한계를 여러 번 느꼈다.

가뜩이나 성질이 더러운 나 스스로를 다독이며 참는 것이 참 어려웠다.


두고 가버리면 엄마를 찾느라 우는 꼬마 시절도 훌쩍 지난 딸들이다. 울며 엄마를 찾으면 짠해서라도 마음이 좀 풀리는데 이제는 저절로 마음 풀어질 일이 없다.

머리가 큰 만큼 딸들의 이유 있는 반항과 무례의 세기도 더해졌다. 그와 비례하여 내가 느끼는 노여움도 배가 된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도저히 이 기분으로 저녁밥을 할 수가 없었다. 남편에게 말을 해 내가 먹고 싶은 메뉴로 저녁 식사까지 해결하고 들어왔다. 내가 먹고 싶다 하는 건 다 사주는 남편이 있어 성난 기분이 많이 누그러졌다.


남편과 식탁에 앉아 오늘 아이들이 얼마나 나를 화나게 했는지 이야기했다. 쭉 지켜봐 온 남편도 나에게 동조하며 힘을 실어주었다. 정말 열두 번도 더 때리고 싶은 걸 참느라 애쓴 나를 기특하다며 셀프 칭찬을 하니 "그래, 저 녀석들 하는 행동 보며 조마조마했다, 잘 참았다."라고 남편도 나를 응원해 줬다.


칭찬을 듣고 나니 좀 더 좋은 엄마 코스프레가 하고 싶어졌다. 칭찬의 힘을 몸소 느끼며 보물 찾기를 시작해야겠다 생각했다.



심호흡을 한 번 하고 후다닥 마카펜과 작은 스케치북을 준비한 후, 귀가 후 티브이 앞에 몰려있는 아이들을 불렀다.


"너네 다 이리 와 봐."


아까의 협박이 생각났는지 티브이를 끄고 세 명이 조르르 키 순서대로 후다닥 섰다. 아이가 둘 일 때는 몰랐는데, 셋이 되고부터는 나란히 선 모습만 봐도 참 흐뭇하다. 아들이 청소년기를 지나고 나면 누나들보다 더 크게 될 터이니

이런 게 나이 순서와 키 순서가 맞는 것을 보는 것도 한정적이다. 뭐든 한정판은 먹히기 마련이다, 근엄했던 나의 목소리가 더 많이 풀렸다.


"막내는 글자를 모르니까 제외, 넌 혼자 가서 티브이 봐. 딸들은 앉아."

하자 막내는 누나가 내려놓았던 리모컨을 쥐고 신이 나서 소파로 갔다.


그 후론 말없이 종이 한 장을 네 조각내었다. 예삐는 이게 뭐 하는 거냐며 구시렁거렸지만 호기심은 놓지 못했다.


하나씩 돌리고 자신의 오른편에 있는 사람에게 해주고 싶은 말을 한마디씩 써주고, 자신이 받은 한 마디의 의미를 헤아리며 캘리그래피로 꾸미는 활동을 하자고 제안했다.


미술놀이를 좋아하기도 하지만, 엄마랑 무언가를 같이 하는 걸 좋아하는 딸들은 당장에 자리를 고쳐 앉고 진지한 얼굴이 되었다. 평소 칭찬은 해도 함께 하는 것엔 시큰둥하던 남편도 오늘은 어쩐 일인지 함께 참여해 주었다.



예삐 -> 아빠 : 아빠 건강해

얼마 전 건강검진결과가 좋지 않아 정밀검사까지 받고 결과를 기다리는 터라 아빠 걱정을 하는 예삐의 마음이  잘 와닿았다.

남편도 조금 울컥하였다고 했다.

그리고 앞으로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더 건강하게 살아야겠다는 다짐을 했단다.


아빠 -> 큰딸 : 동생들을 손님처럼 대해주겠니

맏이라고 하기엔 너무 이기적인 큰 딸에게 아빠가 부탁을 한 것이다.

큰딸도 노력하겠다며 대답은 했지만, 동생들이란 지옥으로 가는 문을 그렸다.


엄마 -> 예삐 : 낮은 목소리로 깊은 울림이 있는 말을

언제나 소리부터 지르고 보는 예삐의 언어가 더는 소음이 아니길 바라며 적었다.

다행히 예삐도 좋은 말이라며 기뻐해주었다. 하지만 딱히 나아지는 건 없는 것 같다.


큰딸 -> 엄마 : 열심히 살아와줘서 고마워

몸과 마음이 지쳐 너무너무 힘들었던 이틀을 보낸 후에 받은 큰딸의 한마디였다.

이 한마디로 나는 모든 것을 인정받고 보상받은 사람이 되었다.

나의 열심과 나의 최선을 알아준 큰 딸에게 정말 고마웠고 더없이 행복했다.


서로에게 바라는 한 마디




화분 가꾸기를 열심히 하고 있지만 식물 똥손인 나는 열심히 화분 그림을 그리고 꾸몄다. 사실 멋을 내어 글자를 쓴다는 것뿐이지 캘리그래피가 무언지도 정확히 모르는 우리 가족이다. 하지만 10분 남짓한 그 시간 동안 글자를 쓰고 꾸미며 정말 많은 생각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결국엔 나를 울려버린 큰 딸의 한 마디.



활동이 끝나고 4장의 캘리그래피를 한데 모아 사진을 찍었다. 각자의 개성이 드러나는 꾸미기에 다들 서로에게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예삐는 아끼는 마스킹 테이프로 4개의 종이를 잇고 냉장고 한쪽에 붙여두었다. 단 일주일만이라도 우리가 서로로부터 받은 이 글귀들을 마음에 새기며 마음가짐을 달리 해보자 했다.

우리 가족이 서로에게 바라는 말을 자신의 스타일로 꾸몄다.



그래, 이런 게 가족이고 행복이지.


우리 가족이 한 마음 한 뜻으로 함께한 이 짧은 순간!

비록 우리가 가족으로서 영원히 살아가는데에 비하면 찰라일 뿐이지만, 이 찰라가 영원을 살아가게 하는 힘이 되어준다. 또 가족 구성원 각자가 더 나은 사람이 되도록 변할 수 있는 기회와 용기가 되어준다.


하루종일 몇 번이고 화가 났던 마음을 잘 넘기고 맞이하는 평화의 시간이었기에 그 의미와 가치가 더 크게 다가왔다.


얼마나 좋았는지 예삐는 또 하자며 며칠 동안 밤마다 나를 조른다. 냉장고에 붙여두기로 한 일주일 후에 또 하자고 일단 미뤄두었다. 다음 메시지는 또 어떤 게 나올지 궁금하다.


서로에게 바라는 말들로 꾸며질 우리 가족의 내일이

오늘보다 조금 더 성장하고 향기롭고 아름다웠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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