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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택청약 다자녀특공당첨 2

낳은 김에 키웁니다 16

by 딱좋은나





실감이 나지 않았던 나는 청약 통장으로 돈을 송금해봤다.

입금이 되지 않았다.

청약 통장이 막힌 것을 보고 육성으로 소리를 질렀다.


"꺄오!"

남편에게는 "너랑 헤어지고 나니까 내 운이 이제야 트이네!" 하는 소리도 해봤지만 진심을 아니었다.

왜냐하면 사실 이 아파트에 지원해보라고 한 것은 다름 아닌 남편이었다.

한번 예당됐다가 떨어지니 희망 고문 당한 것 같아서 더 기분 나쁘다며

이번엔 어차피 안될 거 그냥 안하겠다는 나를 재촉해 넣어보라고 몇 번이고 다그쳤다.

마감 직전 나는 청약홈 앱을 실행시켰다.

그리고 그 결과는 주택청약 다자녀특별공급 당첨 이라는 결과로 내게 돌아왔다.

중요한 순간마다 내 한 끝을 잡아주는 능력이 있는 남편이 또 한 건을 해냈다!

나에게 빼꼼히 내밀어진 내 집 마련이라는 희망의 한 끝을 잡게 한 것이다!


그렇게 3기 신도시 40평 1층 아파트의 분양권은

내가 애 셋을 낳고 받은 가장 큰 선물이 되었다.


그리고 그 선물은 내게 초긍정 마인드라는 날개가 되어주었다.

일을 해도 즐겁고 애를 봐도 즐겁고 그저 행복했다.

청약 당첨까지 된 나는 무엇이든 할 수 있는 능력자가 된 것 같았다.


돈이 없어 매달 동동 거려도 곧 이사 갈 내 집, 새 집이 있다는 사실이

모든 것을 다 덮을 수 있는 위로가 되었다.

아무리 돈 때문에 서글프고 힘들고 어려워도

나를 넘어지지 않고 여지껏 버티도록 지켜주는 희망이 되었다.


청약 당첨이 되자마자 온 집안에 이 일을 알렸다.

물론 전남편의 공치사도 잊지 않았다.

나보다 내 당첨을 더 기뻐해주신 엄마께 딱 3년간만 엄마의 집에 신세를 지기로 약속했다.


그리고 이제 그 약속의 기간이 다 되어 간다.

이 말은 곧 내 집인 새 아파트 입주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이다.


지난 3년을 뒤돌아 보니 새삼 기뻐서 눈물이 난다.

청약에 생각없이 지원하고 당첨됐다는 문자를 받은 순간부터

계약금을 마련할 때까지 기쁨 뒤에 마음 고생은 얼마나 했던지!

청약은 당첨되어도 내게 계약금을 낼 돈이 있을 리 만무했다.

형편이 그나마 괜찮은 시누이에게 어렵게 남편이 이야기를 꺼냈다.

딱 한 번 처음으로 계약금을 빌려주십사 도움을 요청했지만 일언지하에 거절 당했다.

돈을 돌려 받지 못할까봐 걱정이라면 우리 엄마의 집에 근저당을 설정해주겠다까지 했지만

아이들의 고모는 두 번 생각지도 않으시고 안된다 하셨다.


이혼까지 한 마당에 자신과 전혀 상관이 없는 전 올케의 명의로 된 집을 위해 돈을 빌려주기 싫었을 전 시누이의 마음도 이해는 갔다. 전 시누이의 그 당시 사정이 정말로 말처럼 어려웠을지도 모를 일이고.

하지만 그때는 책임감 하나로 어떻게 해서든 살아보려는 나의 의지를 꺾어버리는 것 같아 원망도 잠시 들었었다. 누구라도 원망을 해야만 혹시라도 청약 당첨을 날려버려도 내가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전남편은 집안을 말아먹은 죄인이었기에 더더욱 처자식이 겨우 얻은 기회를 놓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애써주고싶어했다.

비록 그의 마음만큼 이루어진 것은 없었다 할지라도 마음만은 차고 넘치게 써주었다.


역시나 결혼을 준비 할 때 처럼 그의 부모님도 그의 형제들도 아무도 우리를 도와주지 않았다.

나 역시 남동생 네에 돈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청약을 날리는 한이 있더라도 이번에는 내 힘으로 해결하고 싶었다.

은행을 제외한 그 누구의 도움도 없이 완전한 내 집을 갖기 위해서!


내가 가진 것이라곤 돈이 아닌 900점이 넘는 신용뿐이니

나는 카드론을 받고 사업자 대출을 받고 신용대출을 받아 계약금을 냈다.

그리고 그 빚을 갚기 위해 빚을 내고 또 내고 내고 갚고 내고 내고 갚고 내고를 여전히 반복하고 있다.

이자율이 적은 것은 2%부터 많은 것은 12%까지 다양하게 써봤다.


그렇게 비싼 이자를 감당하며 계약금을 낸 돈을 갚고 또 빌리고 하는 동안

나는 모델하우스를 보고 계약서를 쓰러 갔다.

수십 장이 되는 서류에 자서를 하고 6회차까지 중도금 실행을 시킬 수 있단 은행의 말에 얼마나 기뻐했는지 모른다.

그렇게 둘이서 또 때로는 나 혼자서 감당해온 모든 단계들이 파노라마처럼 눈 앞을 스쳐 지나간다.


옵션을 선택하러 다시 찾은 모델하우스에는 전남편도 동행해 다시금 우리가 될 새 보금자리를 꿈꾸었다.

이사를 할 쯤이면 우리는 재혼을 이미 하지 않을까 하는 착각을 좀 했었다.

(곧 입주이지만 우리는 아직 재혼 계획이 없다.)


주택청약 당첨 이후 집 값이 오르니 분양권의 가격도 덩달아 올랐다.

의기 양양을 넘어 거만해진 나는 제대로 지름신이 왔다.

남편과 일 핑계를 대어서긴 했지만 상가를 매입하고 차도 바꾸었다.

빚은 빚을 낳고 빚을 빚으로 끄고 돌려막기가 시작되었는데

정권 교체 이후 부동산 정체기 혿은 후퇴기가 되면서 나는

비소로 겸손을 배우게 되었다.


황새 흉내를 내던 뱁새가 되어 가랑이가 찢어지기 직전으로 달리고 있다.

잔뜩 올라버린 이자를 내느라 늘 모자란 돈 때문에

내 아이들에게 먹고싶단거 하고 싶단거 갖고 싶단거

다 해주지 못하고 안된다는 소리를 유행가처럼 자주 읊어야했다.

앞으로 입주 후에는 내 앞으로 된 주택담보대출을 갚느라

계속해서 그렇게 살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제법 머리가 자란 아이들도 알고 있다.

자신들이 사는 집이 더이상 친구네와 비교하여 제일 작은 집이 아니라는 것을.

놀이터도 몇 개나 있고 유치초중고 학령기 동안

도보로 통학이 가능한 훌륭한 주거 환경에서 살 수 있다는 것을.


무엇보다 엄마가 일을 해서 돈을 벌지 않으면, 엄마가 돈돈돈 거리며 아끼지 않으면

우리가 이렇게나 좋은 집에 살수 없게 된다는 걸 이제는 안다.

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도 잃는 법,

엄마와의 시간과 엄마의 손은 덜 받지만

엄마보다 더 편안한 집이 생기게 된다.

엄마의 손이 예전보다는 덜 가도 괜찮은 나이가 되니 엄마더러 열심히 일해달라고 한다.


청약에 당첨된 집이 지어지는 동안 몇 번이고 아이들과 보러 갔다.

"여기 우리 집이야?" "우와 우리집이 제일 좋아!" "우리 집이 최고야!"

하고 갈 때마다 막내가 소리쳐 외쳤다.


어느날은 "여기 우리 집인데!" 하고 먼저 아는 체도 했다.

신도시에 처음 살게되니 온갖 가게가 다 있었다.

호기심 많고 소비요정들인 딸들도 그저 바라만 봐도 신기하고 좋은 듯

어서 이사오고 싶다는 말을 자주 한다.


"고맙다! 너희들 덕에 엄마가 이렇게 내 집 마련을 다시 할 수 있었네!

애가 셋이라 이렇게 새 아파트에 갈 수 있게 됏어.

엄마 진짜 셋 낳길 잘했다!"


진심이 담긴 내 감사 인사에 아이들이 저들도 고맙다며 나를 꼬옥 안아준다.


아이들의 말 한마디 작은 몸짓 하나가 나의 인내와 양보를 충만히 채워준다.

집으로 욜로 하느라 평소엔 절대로 욜로가 될 수 없는 나의 초라함도 견디게 한다.


내 아이 셋 덕에 생긴 내 집.

내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나는 계속해서 열심히 살아야 한다.

내 아이들이 지치고 힘들 때 돌아올 곳이 내가 될지 집이 될지 모르겠다.

무엇이 되었든 언제든 아이들이 기분좋게 돌아올 수 있는 집을 만들어 주고 싶다.

그러기 위한 첫째 조건이 주거 안정이 아닐까 싶다.

나는 다시 한번 최선 만큼 최고의 사력을 다해 살아가야 한다고 내 스스로를 격려해본다.



이제는 두 자녀부터 다자녀라고 하는데도 자리 잡히면 아이 낳겠다는 분들이 많으시죠.

내 집 마련 후에 아이를 낳는 것은 금전적으로 여유가 있는 분들이 할 수 있습니다.

서울 12평 40년 다가구 전셋집, 서울 11평 자가 빌라,

경기도 동쪽 끝 미분양 26평 아파트,

경기도 서쪽 끝 39평 엄마집에서의 월세살이,

신도시 40평 청약 당첨 과정으로 13년 넘게 살아가고 있는 저처럼,

차근 차근 넓혀가시는 재미를 느끼시는 것도 어떨까 싶습니다.

아이들을 낳고 키우시면 반드시 한 번은 잘 살 수 있는 기회는 온다 생각합니다.

온 우주가 돕는 제가 응원해드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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