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안, 엄마 사실 빠순이야

덕질과 행복의 상관관계에 대하여

by 해사

내가 아르바이트하는 곳에 식물 키우는 걸 정말 좋아하는 분이 있다.

평소엔 말수가 거의 없는데, 신기하게도 식물 얘기만 나오면 눈이 반짝반짝해지신다.

식물 박사님처럼 지식 대방출.


어느 날은 유독 기분이 좋아 보이시길래 여쭈었다.

“무슨 좋은 일 있으세요?”

꽃처럼 활짝 핀 얼굴로 기쁨에 찬 표정으로 말씀하셨다.

“우리 집 화분에 글쎄, 꽃이 피었어요! 이게 진짜 잘 안 피는 꽃인데…

얼마나 예쁜지 알아요? 나 하루 종일 그거만 보고 있었잖아요.”


“와, 좋으시겠다. 왜 저는 선인장을 키워도 다 죽을까요. 도대체 비결이 뭐예요?”

“비결이 어딨 어요~ 그냥 계속 쳐다보고 좋아하는 거죠. 좋아하면 더 알고 싶어지고, 더 잘 키우게 돼요.”


부럽다. 무언가를 저렇게 좋아하는 모습.

나를 저렇게 반짝이게 한 게 뭐가 있지?


아! 나 좋아하는 거 있다. 이적!

IMG_4393.HEIC

어릴 땐 친구랑 콘서트도 같이 다녔는데, 이제는 뭐 다들 바쁘고, 같이 갈 사람이 없어서 그냥 혼자 간다.

뭐 어떤가. 이적인데. 혼자라도 괜찮고 말고.

남편은 이제 자동이다.

이적이 콘서트 한다는 소식을 들으면, 그 치열한 콘서트 티켓팅도 전담하고, 아이들을 돌보기 위해 휴가까지 신청한다.

“애들은 내가 볼 테니. 마음껏 즐기셔!”

이럴 땐 아주 든든한 팀워크.

아이들이 엄마 어디 가냐고 같이 가자고 쫑알쫑알 대는 걸 뒤로하고 집을 나선다.

미안. 엄마 사실 빠순이야.

오늘은 엄마 광란의 시간 좀 보내고 올게.

콘서트가 몇 시간 거리여도 전혀 힘들지 않다.

오는 길에 이적 노래를 들으며 여운을 느끼면 어느새 도착이니 말이다.


주변을 보면 사람들이 하나같이 말한다.

요즘 진짜 삶의 낙이 없다니까.
일도, 육아도, 사람 만나는 것도 다 비슷비슷해.


나도 예전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매일 똑같은 하루, 끝도 없이 내가 해야만 하는 일들만 산더미.

'재미있는 일 좀 생겼으면 좋겠다.' 속으로 외치던 날들.


그동안 왜 가만히 있었을까.

매일매일 재미있는 일이 어디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줄 알았나?

그런 일은 있을 리 없다.


사실 우리 삶에는 대단한 행복은 좀처럼 오지 않는다.

그저 뻔한 일상에 작은 행복만이 슬쩍슬쩍 찾아와 준다.

하루 종일 쪼그리고 화분 들여다보는 사람에게 슬쩍,

이적 콘서트에서 목쉬도록 소리칠 때 슬쩍.


그러니 조금 더 자주 올 수 있게 일상에서 작은 재미를 많이 찾아야겠다.

파워 집순이지만, 날 좋으면 밖에 나가 하늘 보고 바람도 느껴보고

맛있는 커피 한 잔을 위해 가끔은 버스 타고 원정도 가고.

그리고, 이렇게 글로도 남기고.


인생의 낙, 행복. 뭐 별거 있나.
그저 찾는 사람이 임자다.

나와 같은 사람이 있다면 우리 이제는 같이,

눈 크게 뜨고 또 다른 삶의 낙이 될 새로운 덕질 거리를 찾아보자.

이전 09화꾸밈의 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