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엄마의 생일상 앞에서 나는 울었다

딸 같은 며느리 여기 있다

by 유유


내 자랑 좀 해야겠다. 나는 시엄마가 너무나도 좋다.

엄마가 우리로 인해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는 게

정말 좋다. 이 무슨 전국의 며느리들한테

욕 한 바가지 먹을 망언이냐고? 욕먹어도 어쩔 수 없다.

사실인걸. 그야말로 딸 같은 며느리가 바로 나니까.


엄마 집에 가면 소파에 앉아 계신 아빠 옆에

벌러덩 누워 TV를 본다거나,

밥 먹고 설거지를 하지 않는다거나,

여느 엄마와 딸 사이처럼 싸우기도 한다.

나를 내 새끼, 막내딸이라 부르는 엄마의 사랑이

마음으로 느껴지기에

나도 진짜 딸처럼 행동할 수 있는 것 아닐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이들이 내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을 것을 안다.

며느리가 어떻게 딸이 될 수가 있냐며,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핏대를 세우는 이도 있을 것이다.

그것도 어쩔 수 없다. 일일이 증명할 수도 없는 일.



엄마를 처음 만났던 날을 떠올려 본다.

남편과 3년째 연애를 하던 2011년 겨울,

얼굴 한번 보고 싶다는 엄마의 말씀에

긴장되는 마음으로 한껏 차려입고 인사를 드리러 갔다.


동네의 작은 횟집. 나를 보자마자 그 큰 눈에서

눈물이 뚝뚝 흘러내렸다.

(나중에 들어보니 엄마도 너무 긴장을 하셔서

소주 몇 잔을 먼저 드셨다고 했다.)

너무 반갑다고, 너무 기분이 좋다고,

이렇게 이쁜 아가씨가 와서 정말 기쁘다고

끊임없이 말씀하시던 엄마.


사실 그날 나는 기분이 좋은 것보다

얼떨떨한 감정이 더 컸다.

표현이 많지 않고 늘 잔잔하던 분위기 속에서

27년을 자라온 나로서는 쉬지 않고 감정 표현을 하시는

남자친구의 엄마가 적응되지 않았다.

지내고 보니 집안 분위기 자체가 표현이 크고

감정 표현을 적극적으로 하는 집안이었던 것.

거기에 적응하는 데에 몇 년은 걸린 것 같다.

지금은 뭐, 친정을 가면 친정집 분위기에

적응이 안 되는 정도로 내가 변해버렸다.




엄마를 ‘우리 엄마’라고 생각하게 된 두 가지 일이 있다.

2015년 결혼한 그해 8월,

나는 작은 수술을 하게 되었고,

남편 외에는 아무도 다녀가지 않았던 일주일 동안

엄마는 (땀도 많고, 다리도 아프신 양반이) 매일 아침,

먹을거리를 해다 바치셨다. 바나나, 단호박찜,

요구르트, 고구마, 멸치볶음, 그중에서도 소기름이

하얗게 굳은 소고기 장조림이 유독 기억에 남는다.

땀도 많은 양반이 더운 날 불 앞에 서서 그걸

졸였을거란 생각에 장조림을 쥐어주고 돌아서는

엄마의 모습에 괜시리 눈시울이 붉어졌다.


결혼 후 맞이한 내 첫 번째 생일.

시누이까지 합세해 진수성찬이 차려졌고,

20년 만에 처음 받아보는 귀한 생일상 앞에서

나는 아이처럼 엉엉 울었다.

원래 누군가의 생일에는 온 가족이 모여

진수성찬 차려놓고 축하하던 시댁 식구들은

내 울음에 어리둥절했다.

친엄마의 존재가 사라진 뒤 생일을

제대로 챙겨본 적 없다는 말에 엄마와 시누이는

가슴이 아렸고, 그 뒤로 1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식구들은 내 생일을 매년 챙겨주신다.

조카들까지 온 가족이 모여서.

TMI지만 나보다 열한 살 많은 시누이는

매년 우리 부부의 결혼기념일까지 챙긴다!

(정작 당사자들은 잊고 지나가는데!)



결혼식을 하고 며칠 뒤, 아들이 보고 싶다며

전화 너머로 우는 엄마에게 놀란 적이 있었다.

앞으로 시집살이 오지게 하겠다 싶었고,

아들을 너무나 사랑하는 엄마의 마음이

조금 두렵기도 했다.

왜 <올가미>라는 영화도 있지 않나?

나를 질투하며 적으로 두고 교묘하게 괴롭히고

숨통을 조여올까 무서웠다. 그러나 웬걸?

엄마는 아들을 사랑하는 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나를 사랑하셨다.

아들의 아내인 나를 적으로 두지 않으셨고,

아들과 함께하는 며느리 또한

엄마의 새로운 자식이라 여기셨다.



물론 모든 부분에 있어서 잘 맞고 좋은 것만은 아니다.

부부 사이에도, 부모와 자식 관계에서도

안 맞는 것 투성이인데, 피 한 방울 안 섞인 고부 사이가

어떻게 100퍼센트 잘 맞을 수 있을까?

툭툭 던지는 말에 상처받고 짜증 날 때도 있고, 가끔씩

보이는 아들만 위하는 모습에 질투 날 때도 있고,

냉장고 꽉꽉 채워 정리 안 하고 사시는 모습을 보면

답답할 때도 있다.

하지만 그런 사소한 문제들을 상쇄할 만큼 엄마에 대한

애정이 크기 때문에 개의치 않고 넘어갈 수 있다.

누군가가 던지는 시댁에 대한 험담에도

그저 웃으며 지나칠 수 있는 것.


설거지도 안 하고 소파에 널브러져 있는 나를 보며

누군가는 빵점 며느리라 욕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엄마의 사랑 앞에서 나는

버릇없지만 솔직한 막내딸이 되기로 한다.



여름이면 남편이 하는 말이 있다.


"여보, 엄마 나박김치 비법 좀 배워봐."


그러면 나는 말은 알겠다고 하고서는 배우지 않는다.

오래오래 엄마가 해주셨으면 하는 마음에.

김치, 고추장, 나박김치, 감자탕, 콩비지찌개,

엄마의 맛을 더 오래 느끼고 싶어서.

엄마의 손맛을 따라갈 자신도 없고.

10년이고, 20년이고 지금처럼 일주일에 한 번씩

엄마 집에 들러 저녁을 같이 먹고

“엄마, 김치 없어!”, “엄마, 쌀 떨어졌어!” 하며

엄마의 존재를 매번 확인하고 싶다.



"엄마, 우리 여행 가자!

거기 준영이 물놀이도 할 수 있고,

엄마랑 아빠 온천도 하고 찜질도 하실 수 있어!
저녁엔 바비큐도 해 먹자!"


"아이고~ 좋아라~ 옆에서 아버지 너무 좋아하신다~"


시부모님을 모시고 경남 고성으로 여행을 가기로 했다.

아이를 위한 물놀이 장소를 찾아보던 중에 물놀이와

바비큐, 온천까지 즐길 수 있는 장소를 찾았고,

야외 바비큐를 너무 원하는 엄마 생각이 났다.


나는 늘 이런 식이다.

내 입에 너무 맛있는 음식을 먹어도 엄마 생각이 나고,

좋은 곳을 가도 엄마 생각이 난다.

‘우리 민여사 좋아하겠네.’라고.

그런데 또 생각해 보니 말만 엄마 좋아한다,

사랑한다였지, 그동안 제대로 된 여행 한 번 모시고

가지 못했다. 캠핑이며 여행이며 많이도 다녔으면서

부모님 모시고 간 적이 없다니, 참 못됐다 싶다.


엄마는 얼마나 신이 나셨는지 벌써부터 짐을

싸놓으셨다. 나는 생고기 바비큐를 먹고 싶은데

냉동고기를 이미 2KG이나 사놓으셨다는 소식에

실망을 하기도 했다. 못 말리는 추진력이다.


여행에서 많은 추억을 쌓고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와야겠다.

이번 여행이 우리의 마지막 여행이 되지 않기를.

나박김치 비법을 끝내 배우지 않아도 될 만큼,

엄마가 아주 오랫동안 우리 집의 든든한

'주방장'이자 내 마음의 '안식처'로 머물러 주기를.

염치없지만 오늘도 기도를 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