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노트] 세탁비는 이야기로 받습니다, 산복빨래방
이 글은 2024년, 제가 가장 뜨거웠던 여름에 썼던 기록입니다.
"너희들 기레기 맞잖아!"
책을 덮으며 육성으로 터져 나온 한 마디.
첫 장을 넘기며 했던 기대가 무색했다.
부산일보 디지털미디어 부서의 기자 두 명,
피디 두 명, 이 네 사람이 모여 빨래방 프로젝트를
준비하기까지 얼마나 신박한 아이디어를 냈고,
얼마나 노력했는지 자랑. 부산에서 그동안 시행된
여러 도시재생사업들과 우리들은 다르다!
우리 프로젝트에는 주민이 있다! 하고 자랑.
체감상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칭찬을 갈구하는
듯한 글이 절반 이상을 차지했고,
정작 내가 기대하고 원했던 산복도로 주민들의
진솔하고 감동적인 이야기는 듣지 못한 느낌이었다.
'좋은 사람들인 척 빨래방 고작 6개월 운영하고
지역에 떠넘기고 튀네?'
'부산일보 디지털미디어부? 지역신문 기자인 걸
자랑스러운 척하네? 가식적이야.'
한 번 꼬아 보기 시작하니 별 게 다
비뚤게 보였던 걸까? 획기적인 기사를 쓰고 책을 팔기
위해 호천마을 주민들을,
그분들의 이야기를 이용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고, '역시 기레기는 어쩔 수가 없다'라고
마음대로 단정 지어 버렸다.
올해 2월, <산복빨래방>과의 첫 만남은 그랬다.
그리고 약 5개월이 지난 지금 7월.
내가 다니는 밤골 작은 도서관 독서회의
7월 도서로 이 책이 선정되었고,
나는 억지로 다시 한번 기레기들의 글을
읽어보았다. 이전과 달라진 점이 있다면 이번에는
유튜브 채널을 함께 시청하며 책을 읽었다는 것.
영상으로도 충족할 수 없는 아쉬움이 남아있지만,
빨래방 직원이 된 네 사람이 호천마을 주민들을 대했던
마음만큼은 진심이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한 가지 기억에 남는 장면이 있다.
바로 먹어도 먹어도 줄지 않는 부침개.
너무나 맛있게 먹기 시작하지만 계속 추가되는
부침개에 어쩔 줄 몰라하는 4인방의 모습이다.
빨랫감이 없어도 빨래방에 들러서 먹을 것과
이야기를 나누어 주시는 어르신들이다.
감자, 고구마, 두유, 라면 등,
그냥 다 예쁜 젊은이들에게 정말 뭐 하나라도
더 챙겨주고 싶은 마음이 느껴져 저절로 웃음이 났다.
아무리 정 많은 어르신들이라 해도 신문기자라고 하는
젊은이들이 기사거리만 노리고 진심이 없는데
그들에게 먹을 것을 나누어 줄까?
한 자리에 마주 보며 앉아 살아온
지난 이야기들을 펼쳐놓을까?
빨래는 마을과 우리를 이어 주는 가장 중요한
매개지만, 그것만이 우리를 연결하는 건 아니었다.
우리는 따뜻한 냄새가 나는 사람과 사람이었다.
산복도로를 취재하려고 간 것이 아니라,
일단 함께 살아 보자고 생각했던 우리의 진심은
다행히 정답이었다.
기사를 쓰기 위한 시작이었지만,
호천마을 주민들을 대할 때 빨래방 직원들의 마음은
그저 진심이었던 것이다. 그 진심이 통한 것.
실제로 유튜브 영상을 보면 두 명의 기자들은 손자 또는
아들처럼 어르신들을 대한다.
편안한 자세와 편안한 말투로 일상의 대화를 나눈다.
어르신들 또한 그들을 그저 예뻐하며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내신다.
"보고 싶어서 우짜지."
"끝나간다니 눈물겨워. 못 잊겠어요. 감사합니다."
"정이 너무 많이 들었어. 손자 같고, 아들 같고..
그동안 고마웠어요. 잊지 않을게요."
유튜브 채널에 나오는 내용이다.
빨래방 영업 종료를 주민들에게 알리고 그 소식을 접한
주민들이 하나같이 달려와하는 말들.
그리고 어머님들의 아쉬운 눈물과 표정들을 보고
알 수 있었다. 취재를 떠나 일단 함께 살아보자고 했던
그들의 진심이 정말로 통했다는 것을.
내 안에 가졌던 작은 오해를 풀고
책을 다시금 되짚었다. 고단한 여공의 삶을 살았던
어머님들의 이야기를 들여다보니 자연스레 나의
어린 시절, 그리고 그 시절의 엄마가 떠올랐다.
내가 살았던 곳. 금정구 서1동 오차로 꼭대기 동네.
부산을 대표하는 산복도로는 아니지만
산복도로 못지않게 고바위에 많은 계단을 올라야 했다.
복도식 아파트도 아닌데 골목은 어찌나 여러 갈래인지.
당연히 집들도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나는 꼭대기 중에 가장 꼭대기 골목에서 유아기부터
10여 년을 살았다. 내 엄마는 벌이가 시원치 않은
남편을 둔 탓에 쉬지 않고 부업을 했다. 미싱부터
이름을 알 수 없는 부품작업, 도라지 까기 등등.
나중에 들은 이야기로는 하루라도 빨리 큰 길가에
내 집 마련을 하고자 목표했었다고 한다.
깔끔한 성격 탓에 그렇게 부업을 하는데도
우리 집은 먼지 한 톨 없었다.
딸내미가 학교에서 우수학생이 될 수 있게 정성으로
뒷바라지도 했다. 없는 살림이었지만 부족함 없이 나와
내 여동생을 키웠다.
초등학교 1학년이었나?
쥬쥬아파트라고 하는 인형의 집이 너무 갖고 싶었던
나는 부모님을 졸랐고, 그걸 사서 집으로 가는 골목을
걸을 때 동네 여자 아이들의 부러운 눈빛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그 우쭐한 기분! 어떤 언니는
얼른 손가락으로 만져보기까지 했으니 말이다.
책 속의 장순엽 어머님이 월급의 4배나 하는 컴퓨터를
아들에게 떡하니 사주셨고, 그로 인해 동네에서
유일하게 컴퓨터가 있는 집이 되었을 때,
그 아들도 나와 비슷한 기분이었을까?
아들의 기분은 잘 모르겠지만,
내 엄마와 장순엽 어머님의 마음은 같지 않았을까?
내 몸이 고단하고 힘들어도 내 자식에게는 아낌없이
주고 싶은 마음. 내 입에 들어가는 건 아까워도 내 새끼
입에 들어가는 건 하나도 아깝지 않은 엄마의 마음.
실제로 엄마는 우리 집을 월세에서 전세로, 전세에서
자가로 업그레이드를 시키며 목표를 이루었다.
그때의 엄마 나이 30대 후반, 마흔 살인 나보다 어렸던
엄마가 새삼 참 존경스럽다.
책 속의 호천마을 어머님들은 말할 것도 없다.
나의 어린 시절보다 더 어려웠던 때,
생계 전선에 뛰어들어 대가족을 먹여 살리고,
조금이라도 돈을 더 벌기 위해 악착같이 노력하셨던
분들. 가족을 위해 무릎이 닳는 줄도 모르고 그 많은
계단들을 얼마나 많이 오르내렸을지.
그때를 생각하면 원망스러운 마음이 들지는 않을까?
아프고 약해진 몸을 마주할 때면 서러운 생각이
들지는 않을까?
어머님들은 말씀하신다. 그 시절 그만큼 고생했기에
지금 이만큼 산다고. 때로는 그때가 그립기도 하다고.
고단했던 지난날을 탓하지 않고 긍정적으로 살아가시는
어머님들. 지난 일에 얽매여 자책하고
원망하며 현재의 많은 것들을 놓쳐버리는 나로서는
참 생각이 많아지면서도 배우고 싶은 부분이다.
책 속에 담기지 않은 어머님들의 못다 한 옛이야기가
유튜브 영상에서 더 깊이 있게 나오지는 않는다.
다만, 같은 내용일지라도 글자로 읽는 이야기의 감동과
영상으로 보고 듣는 이야기의 감동에는 차이가 있어
흥미로웠다. 에피소드와 관련된 영상의 QR코드를
책 속에 넣어둔 것도 좋은 아이디어인 것 같다.
<산복빨래방>이라는 책을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유튜브를 통해 책을 소개하고, 책을 읽는 이들에게는
유튜브를 소개하며 구독자를 늘리는 것.
또 유튜브를 시청한 마을 주민들의 가족들,
지인들의 연락을 받는 것.
일석삼조의 효과라고나 할까?
기자들의 말처럼 유튜브의 흥행에는 실패했지만,
책과 유튜브의 연결고리가 주민들과 여러 독자들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준 것은 확실한 것 같다.
개인적으로 조금은 아쉬운 부분이 있는 책이고,
많은 독자들 사이에서도 호불호가 분명히 갈릴 테다.
하지만 이렇게 부산의 원북원 도서로 선정되었으니,
적어도 이 책을 읽은 사람들에게는
부산의 알려지지 않은 동네들에 관심을 가지고
알아가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낙후된 지역을 살리되, 주민들의 생활권을 침해하지
않고 진정 주민들을 위한 계획들이 많이 만들어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리고, 부산에서 나고 자라 지금까지 살아왔지만
부산에 대해서 너무나도 몰랐다는 것이 새삼 놀랍고
부끄럽기도 하다. 호천마을, 흰여울문화마을은
생전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었고, 산복도로의 개념도
이제야 알게 되었을 정도로 무지했다.
<산복빨래방>을 시작으로 부산의 지리와 역사에 대해
조금은 깊이 있게 공부하고 알아보고자 하는 마음이
생겼다. 부산 시민으로서.
김준용 기자님, 이상배 기자님.
이 두 사람을 기레기인 줄로만 알고 이 책을 다시
열어볼 기회가 없었다면 정말 억울할 뻔했다.
두 번째로 만난 <산복빨래방>은 내 어린 시절에 대한
기억들을 아주 깊은 곳에서 꺼내주었고, 생각과
궁금증을 확장해 나갈 수 있게 했다.
어쩌면 이전에는 편견에 갇혀
기자들과 이 책이 가진 힘을 느끼지 못했던 걸지도.
혹시 책을 읽었는데 처음의 나와 비슷한 생각과 감정을
가진 독자가 있다면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다시 단디 보세요, 기레기들이 반전이 있다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