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노트] 대온실 수리 보고서
수리가 그 수리가 아니었다.
달마다 참여하는 독서회에서 <대온실 수리 보고서>가
선정되었고, 사실 소설인지도, 유명한 책인지도
모른 채 책을 구매했다.
대온실에 사는 ‘대형 맹금류(eagle)’에 대한 보고서라
여기고 재미없겠다고 생각하며 책을 펼쳤는데,
‘고장 나거나 허름한 데를 손보아 고침(repair)’을
뜻하는 수리였던 것.
책의 저자는 김금희 작가.
작가가 20대 중반 출판사 편집자로 일하던 시절,
책 작업을 위해 동궐에 갔다가 소나기가 내렸다 그치는
과정을 봤는데 각각의 전각, 기와들이 씻겨 내리는
장면이 눈에 들어왔다고 한다. 작가의 인터뷰에 의하면
당시 아버지가 사업에 실패하면서 힘든 시절을 보내고
있었는데, ‘어쩌면 불행이라는 에너지도 이 장면처럼
바뀔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게 되었다고 한다.
동궐 안에 일제가 세운 대온실 역시 허물어 버릴 수
있는 상황에서 살아남은 일종의 “생존자”라는 생각이
들었고, 궁궐 또한 누군가의 집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소설을 쓰게 되었다고..
줄거리는 이러하다. 주인공 영두는 사고로 어머니를
여의고 아버지와 둘이 석모도에서 넉넉하지 못한
살림을 이어가고 있었다. 고등학교 진학을 위해 섬을
떠나야 했던 석모도 아이들처럼 영두 또한 섬을 떠나
서울에 있는 문자 할머니의 낙원 하숙에서 살게 되었다.
문자 할머니의 손녀인 리사와 같이 서울 강남에 있는
중학교에 다니게 된 영두는 첫사랑 순신과도 좋은
관계를 이어가며 무난한 서울 생활을 한다.
그러다 어떤 불미스러운 사건으로 인해 깊은 상처를
얻게 되고, 서울 생활 1년 만에 다시 석모도로 돌아와
서울에서의 모든 일들을 잊고 살게 된다.
삼십 대가 된 영두는 친구 은혜의 소개로 맡게 된
창경궁의 대온실 수리 보고서를 작성하는 일로 과거에
떠나왔던, 애써 지워왔던 낙원 하숙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게 된다.
하숙집 주인 문자 할머니, 할머니의 손녀 리사,
그리고 원서동에서 만난 첫사랑 순신과의 기억까지..
그런데 보수공사 중 땅 밑에서 사람인지 동물인지
알 수 없는 뼈가 발견된다. 영두는 그것이 문자
할머니와 연관이 있음을 예감하고 파고들다가
마리코로 불렸던 문자 할머니의 어린 시절 사건을 알게
되고, 마침내 자신의 오래된 상처와도 대면하게 된다.
사실 처음에는 현재와 과거의 전환이 자주 일어나고,
여러 이야기가 교차되며 전개되어 헷갈리고 읽기가
어려웠다. 절반까지도 왜 인기가 있는지 모르며 읽다가
후반부로 가면서 물음표들이 하나씩 해소되었고
이야기가 빠르게 진행되는 느낌을 받기도 했다.
그리고 1독을 하고 나서 이 소설이 완전한 허구라는
점에 놀랐고, 무려 8쪽에 달하는 참고 자료 분량에
할 말을 잃었다. 역사적인 내용들을 하나하나 메모하며
나중에 찾아보겠노라 기대하고 있었는데, 허구라니!
작가의 상상력과 방대한 자료조사 능력에 감탄했다.
작가의 인터뷰들을 찾아보니 그 시절의 달걀
가격까지도 찾아볼 정도로 자료조사를 했다고 한다.
나는 부끄럽지만 창경궁에 대온실이 있다는 것도,
역사적 의미가 있다는 것도, 전쟁 이후의 잔존
일본인들에 대해서도 이 책을 통해 처음 알게 되었다.
그리고 책에 대한 기본 정보도 없이, 그러면서 책이
재미가 있네 없네 평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조금 더 꾹꾹 눌러가며 다시, 또다시
읽어보았다.
“상처와 치유”라는 관점으로 인상 깊었던 내용을
소개해 본다.
나는 좋은 부분을 오려내 남기지 못하고
어떤 시절을 통째로 버리고 싶어 하는 마음들을
이해한다. 소중한 시절을 불행에게 다 내주고
그 시절을 연상시키는 그리움과 죽도록 싸워야 하는
사람들을. 매일 아침 눈을 뜨자마자 그 무거운
무력감과 섀도복싱해야 하는 이들을.
장 과장 말처럼 그냥 지나가도 좋을 것이다.
어차피 사람들이 원하는 건 사면이 유리로 된
온실의 아름다움이지 그 아래 무엇이 있었는가가
아닐 테니까. 땅 밑은 수리와 복원의 대상도
아니니까. 하지만 질서에는 어긋날 것이다.
그렇게 묻은 상태로는 전체를 알기란 어려울 것이다.
공동과 침하가 계속되겠지. 개인적 상처들이
그렇듯이. 그렇게 한쪽을 묻어버린다면
허술한 수리를 한 것이 아닐까.
아무리 괴로운 시절이었다 하더라도 좋았던 시간이
분명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좋은 기억과 관련된 아픈
기억들이 있기에 통째로 잊어버리는 것.
내게도 기억하기 힘든 아픈 시절이 있다.
피하고 외면했던 시간들이 길었지만, 지금은 독서와
글쓰기라는 도구를 통해 아픈 상처를 끌어내 대면하고,
좋았던 기억들을 끄집어내 치유하는 과정을 거치고
있다. 앞으로도 꾸준히 고치고 또 고치는 과정을 반복할
것이다.
대온실도 마찬가지로 우리 민족의 아픈 역사라고 해서
없애버리는 것이 아니라 “수리”를 하면서 또 다른
비밀과 사실들을 직면하게 되고 그걸 해결하면서
역사적 상처를 치유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주인공
영두 또한 수리 보고서를 통해 결국엔 과거의 상처와
대면하게 되고 그 과정을 통해 상처를 치유할 수
있었다.
서울 한강 냄새조차 견디기 힘들고, 같은 방을 쓰는
리사와의 관계도 원만하지 않아 힘들었던
서울 낙원 하숙에서의 생활을 순신이라는 인물과의
관계를 통해 해소할 수 있었다고 본다.
또, 대온실 수리 보고서를 쓰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아픈
과거가 있는 낙원 하숙으로 돌아왔지만 결국에는
삼십대가 된 영두와 순신이 아무렇지 않게 재회하는
장면은 과거의 상처가 아무렇지 않은 것이 되어가는
과정을 그린 것이라고도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의미에서 과거 순신과 연애하던 때의 영두와
현재 순신과 재회한 영두에게 낙원 하숙의 의미는
‘낙원’의 사전적 정의처럼 ‘아무런 괴로움이나 고통
없이 안락하게 살 수 있는 즐거운 곳’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분명 아름답고 뛰어난 문장들을 썼지만, 그 뛰어남을
애써 자랑하지 않는 듯한 김금희 작가의 잔잔한 문체가
인상 깊었고, 창경궁을 둘러싼 자연에 대한 묘사나
원서동의 정취에 대한 묘사가 특히 돋보였다.
머릿속으로 바람 소리, 꽃잎 하나까지도 떠올릴 수 있는
섬세한 문장들이 나를 그 장면 속으로 끌어들이는 것만
같았다. 사람들을 새에 비유해 표현하는 대목이나,
제갈도희, 산아와의 대화 장면에서
잠시 환기를 할 수 있는 재미는 덤.
<대온실 수리 보고서>는 복잡하게 뒤섞인 등장인물들,
잦은 시점 변화 등으로 책을 읽기가 어렵게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 또한 이 책을 읽어내는 재미 중
하나라 생각한다. 후반부로 갈수록 전반부에
얽히고설켰던 퍼즐 조각이 하나씩 맞춰지면서 그
퍼즐이 마침내 완성되는 것을 보는 것 또한 쾌감 있다.
또한 이 책은 애써 외면하고 숨겨두었던 사실과
마주하는 것이 용기가 필요하지만 그것이 또 우리를
앞으로 나아가게 해주는 힘이라는 것, 폐기하고
삭제하기보다 수리했을 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을 일깨워 주는 책이다. 많은 독자들이 이 책을
읽음으로써 위로를 받고 한 걸음 더 앞으로 나아갈 힘을
얻기를 바란다.
무언가를 수리한다는 것은 힘든 일이겠지만,
수리, 즉 치유의 과정을 거치고 나면 그 자리는 분명
이전보다 더 견고하고 단단해지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