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정쓰 Sep 30. 2016

그리고 걷는다는 것

멸망의 세계를 걸어가는 법, <더 로드>

걸어도 걸어도  

우리는 모두 걷는다. 어떤 이는 사비를 탈탈 털어 저 먼 곳으로 순례길을 떠나기도 하고, 하염없이 집 앞을 걷기도 한다. 누구는 새내기 엠티를 가서 걷고, 누구는 집을 나가기 위해 그리고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걷는다. 여기 <로드>의 세상 가장 불행해 보이는 두 남자는, 지독하게 외롭고 슬프고 황폐한 지구를 걷는다. 시작부터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만 같은 곳. 보이는 것이라고는 검게 타버린 나무와 재, 그리고 지독한 추위. 수많은 사람이 무언가를 포기해버린 그 곳에서 부자는 황폐한 세계에 맞서 걷고 또 걷는다. 용감히 맞서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는 정말이지 맞서본 사람만이 안다. 맞서지 않는 것이 가장 쉽기 때문이다. 대부분 우리는 피한다는 행위를 자각조차 하지 못한다. 그러니까 쉬운 것이다. 좋은 게 좋은 거고. 하지만 그 모든 것에 불구하고 맞서기 시작할 때, 우리는 무기력하게 침잠된 어떤 뿌리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 과연 그런가. 그렇게 확신해도 되는 것일까.


맞선다는 게 힘든 이유는 거기에 있다. 모든 것에 불구하고 맞선다는 것에도 불구하고, 아무 것도 아니게 될 수도 있다는 것. 그렇게 스스로를 의심하게 된다. 날 구성하는 요소들에 '굳이 맞설' 만한 것들이 뭐가 있더라, '굳이' 내가 이 행동을 해야 할 이유는 뭐지, 히어로물을 좋아하긴 했어도 나에게 그런 애절한 영웅주의 따위는 한 번도 있었던 적이 없는데. 비겁이 판치는 세상에 머물다 보면 의심은 끝내 그 곳까지 다다르고 만다. 나라고 뭐 다르겠어? 믿고 싶은 걸 믿는 것이 인간이다. 그렇게 비겁의 편에 서기 위해 도피에 합리적인 이유를 실을 때면 여지없이, 어디로든 나아가던 삶이 표류하기 시작했다. 대체로 어두웠던 시절은 그랬다.



그리고 아무 것도 바뀌지 않았다

대체로 어두웠던 시절이 아니라 그 세계는 그야말로 황폐하다. 이미 멸망한 세상이다. 인류는 더 이상 지구의 지배자가 아니다. 살아남기 위해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 세상을 과연 세상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렇게 아버지는 삶의 나아감이 곧 상처의 증식은 아닐까, 이 지옥에서의 삶을 아들에게 이어가게 해야 할 지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하고 의심한다. 우리는 불을 옮기는 사람들이라며 세상이라는 것에 살아갈 의미를 설파해보지만 쉽지 않다. 불이 없는 세상에서 불을 외쳐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다. 이 책은 바로 그 아버지의 끝없는 의심의 회고록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어떤 고난에 맞서 걸어가는 것, 그러니까 너는 진짜라고, 너를 의심하지 좋다고 말하기는 쉽다. 진리적인 것에 마음은 가지만 행동이 함께 하진 않는 이유다. 비록 너의 처절한 사투를 기억하는 사람이 어디에도 남아있지 않게 되더라고 그렇게 용감했던 진짜가 너에게도 있단다, 우리는 불을 옮기는 사람들이니까. 쉽지 않을 테다.





확신이라고 말하기에 의심의 지분이 많아보이는 흔들리는 신념은 걷는 행위와 함께 짙어진다. 결국 불은 아들에게 옮겨 붙는다. 그 불이란 것은 아마도, 타인의 부정적인 일에 적극적이고 오지랖적인 위안을 주는 류의 사람만이 가지는 불꽃으로 보인다. 별 것 아닌 일에도 진심으로 남을 위하거나 안타까워 하고, 별 것 아닌 일에도 진심이 담긴 미소를 보여줄 수 있는 공감류 인간. 인간이 인간을 잡아먹는 세상에서 그는 허례허식을 주입한다. 형식적인 구성이라 생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피 엔딩을 위한 권선징악적 클리셰는 아닌가. 그런 게 아니었다. 그러한 유순함이 의심의 회고록이 되는 순간 우리 모두의 이야기가 된다. 멸망의 세상이나 지금 이 곳이나 같은 세상이다. 우리가 사는 세계는 우리가 정의할 수 밖에 없고, 결국 어느 곳을 걸어가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걸어가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이 세상을 밝히는 불꽃인 것이다.



그리고 걸어간다는 것

돌이켜보면, 최악의 순간은 언제나 최선의 기억으로 보존된다. 걷는 것은 보존을 위한 쿨타임, 같은 거라는 생각이 든다. 실제로 삶은, 그리고 삶을 반추하는 방식은 그렇게 체계적이지 않고,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성글게 엮여 있는 경우가 잦으니까. 무언가를 끝내기 위해 시작한 걷기가 끝내지도, 그렇다고 깨닫지도 못한 채 끝나기도 하지만 무언가 끝난 것처럼 행동했던 당시에도 내 기억은 최선의 방법으로 가공되고 있었던 것이다.


나를 가로막던 나의 과거들이 회상의 반복으로 인해 앞으로 나아갈 하나의 동기로 집약되며 치환되는 과정은 이렇게나 기승전결이 분명하지 않다. 새삼 위안이 된다. 이래서 인생이 재미있고, 역시나 어떻게가 문제다. 우리는 모두 걷는다. 그렇게 끝내 걷게 된다.

.

.

.

.

.

p.s. 이번 글은 뒤죽박죽이다. 그래도 이 글은 고쳐지지 않을 것이다. 인생은 그런 거라니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