멋지게 나이듦에 대하여

[사랑인 줄 알았는데 부정맥] | 포레스트북스

by 와사비찡
p.97
사랑인 줄/알았는데/부정맥
다카키 마슈. 남성. 후쿠오카현. 일흔다섯 살. 회사원


"주말엔 쉬어도 쉰 것 같지가 않아. 월요일은 왜 이렇게 금방 오는 거야? 피곤해죽겠네."

"내가 운동을 하는 건 몸매가 좋아지려고 하는 게 아니야. 살려고 하는 거지."

한탄하는 나에게 친구가 보낸 카톡메시지.


"우리도 나이 먹었나 봐."


어느덧 내 나이 앞자리 숫자가 또 한 번 바뀔 날이 두려워지는 요즘이다.


이승철.jpg


[이승철과 NCT의 그 어디쯤]

출퇴근길 버스정류장에서 지나다니는 20대들의 패션을 구경하고 있노라면 예쁘다는 생각보다는 걱정이 먼저 앞서는 나를 발견한다.

'저 바지를 하루 종일 저렇게 끌고 다니면 집에 도착할 때쯤엔 밑단이 새카매질 것 같은데... 세탁은 어떻게 하지?'


그런 걸 보면 난 확실히 패션에 있어서는 MZ 취향은 아닌듯하다. 더군다나 요즘 많이들 입고 다니는 통이 넓은 바지는 내 체형과 도무지 어울리지 않아서 그동안 입어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런데 쇼핑몰에 갔다가 우연히 한 번 입어보고는 그 편안함에 이끌려 나도 모르게 지갑을 열게 된 것이 아닌가. 그 옷을 입고 출근한 첫날 회사에서 "오 약간 요즘 애들 같은데?"라는 말을 듣고 나니 그 바지를 입을 때면 어딘가 모르게 트렌디 해진듯한 기분이 들곤 했다.


지금 돌이켜보면 흑역사라고 비웃겠지만 남녀 불문하고 샤기컷, 울프컷이 유행하던 시절 나도 그 머리를 하고서 친구들과 찍은 사진을 아직 간직하고 있다. 그 사진 속에는 모두가 그 머리를 하고 있다. 피가 통하지 않을 것 같던 스키니진이 유행하던 시기에는 어디 앉기조차 힘든 그 옷이 예쁘다며 좁은 바지통에 두 다리를 열심히 구겨 넣던 때가 있었다. 그 시절에 누군가가 보기엔 나도 요즘 애들 중 하나였을 것이다.





MZ 맛집, MZ 스타일, MZ 신조어... 한동안 그야말로 MZ 바람이 불던 때가 있었다.

MZ세대는 밀레니얼 세대와 Z세대를 통칭하는 말로 1980년대 초부터 2000년대 초에 출생한 밀레니얼 세대와 1990년대 중반부터 2000년대 초반에 출생한 Z세대를 포함한다.


생물학적으로는 저 귀퉁이 어딘가에 자리 잡고 있긴 하지만, 유행에 아주 둔감한 나에게 MZ 스타일을 권장하는 미디어의 외침은 여간 성가신 것이 아니었다. 그깟 유행 좀 쫓아가지 않는 게 무슨 대수란 말인가. 유행을 따라가지 못하면 '힙'하지 않은 사람으로 취급되는 세상에서 나이 듦을 쌍수 들고 환영하는 사람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는듯하다.


'소녀시대'라는 곡은 나에게는 가수 '소녀시대'의 노래지만 누군가에게는 가수 '이승철'의 노래이고, '캔디'라는 곡이 나에게는 HOT의 노래이지만 누군가에게는 NCT의 노래이기도 하다.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이승철과 NCT 그 어디쯤에 살고 있는 세대가 되어버렸다. 백발머리 어르신이 보시기엔 지금이 한창 좋을 때라고 하시겠지만 생각해 본 적 없는 인생의 후반전이 점차 다가오는 것은 두려운 일이다.




사랑1.JPG 오랜만에 방문한 서점에서 만난 나를 울고 웃긴 책


마침 시간적 여유가 생긴 덕분에 오랜만에 가벼운 마음으로 동네 서점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동네 토박이로서 20년 넘게 변해가는 모습을 지켜본 우리 동네의 한 작은 서점은 내 마음속 한켠 애정 어린 장소였는데, 바쁘다는 핑계로 너무 오랜만에 방문한 탓이었을까. 그간 언제 리모델링을 진행했는지 분위기는 좀 더 세련되어졌지만 카페와 강연장에 자리를 내어주면서 그 규모는 반쪽이 되어있었다.


종이책을 읽지 않는 시대. 사라지는 서점들.


나만의 힐링 장소가 없어지고 있다는 사실에 서글퍼하며 발걸음을 옮기던 도중 눈에 들어와 피식하게 만든 제목. <사랑인 줄 알았는데 부정맥>


이런 기발한 제목은 대체 어떤 사람이 짓는 걸까 하고 소개글을 보니 일본 사단법인 <전국유료 실버타운협회>에서 주최한 <실버 센류>의 응모작 중 걸작선으로 뽑힌 시라고 한다.

정식 작가가 아닌 일본의 머리 희끗한 평범한 시니어들이 적어낸 글이라니.

정제되지 않은 참신한 작품들이 가득할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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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류 : 일본의 정형시 중 하나

5-7-5의 총 17개 음으로 된 짧은 시 (풍자나 익살이 특색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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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자도 되지 않는 글자로 시를 짓다니? 그게 가능한가?'

궁금증에 펼쳐본 책 속에는 한 문장으로 응축된 시니어들의 웃픈 애환이 담겨있었다. 그야말로 평범한 할아버지 할머니들의 비범한 재치에 감탄하며 한 문장 한 문장 재미있게 감상했다. 그 짧은 글 안에 우리 부모님이 아른거려서 읽는 내내 공감하고 웃으면서 책장을 넘겼지만, 그렇다고 마냥 웃을 수만은 없는 한편으로는 짠하기도 한 복합적인 감정이 마음속에 일렁거렸다.


p.50
"연세가 많으셔서요"/그게 병명이냐/시골 의사여
마쓰우라 히로시. 남성. 지바현. 여든세 살. 무직


P.88
심각한 건/정보 유출보다/오줌유출
야나기다 고. 남성. 도쿄도. 마흔아홉 살. 물리치료사


p.72
손주 목소리/부부 둘이서/수화기에 뺨을 맞댄다
나카쿠보 시로. 남성. 히로시마현. 일흔여섯 살. 농업


p.116
석 달 전/가르쳐준 장기로/손주에게 졌다
니시모리 시게오. 남성. 이시카와현. 여든여섯 살. 무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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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가 든다는 건 여유와 연륜을 쌓아가는 과정]

사회 초년생 시절에는 내가 몇 번을 검토해도 발견하지 못했던 부분을 한눈에 체크해서 지적하는 선배들의 그 노련함이 멋있었다. 조용한 사무실에서 나를 찾는 직통 전화벨이라도 울릴라치면 모두 내 통화에 귀를 기울이고 있을 것만 같은 기분에 전화 포비아에 걸려버릴 지경이었던 신입시절의 나에게, 거래처 직원들과 스스럼없는 농담까지 주고받는 선배들의 그 여유는 존경스럽기까지 했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언제쯤 저렇게 될 수 있을까?' 넋 놓고 생각하던 때가 있었다.


그렇게 혼나고, 남몰래 울기도 하고, 자책도 하고, 작은 칭찬에 뿌듯해하기도 하면서 나도 모르는 사이 시간이 훌쩍 흘러버렸다. 그 시간 동안 나도 조금은 성장하지 않았는가 싶다. 이제는 내가 후배의 작업을 검토하며 수정해야 할 곳을 알려주고, 거래처 직원들과도 융통성 있게 협의할 수 있는 나름의 경지에 올랐다. 이제는 업무가 어려워서 끙끙대던 시간은 과거가 되었다. 신입시절 적어두었던 업무노트를 펼쳐보면 지금에야 피식 웃음이 나오지만 한편으로는 과거의 애쓰던 내가 떠올라 마음 한구석이 애잔하기도 하다.


누구에게나 시간은 공평하게 흐르고 누구나 나이를 먹는다. 인간의 삶이 어찌 행복한 일들만 있겠냐마는 그 과정에서 원치 않는 폭풍우를 만나 성장하고 단단해지는 건 간과하는 듯하다. 나이가 든다는 건 더 많은 일에 공감할 수 있는 여유와 연륜을 쌓을 기회가 있다는 것이니 나이 듦을 쌍수 들고 환영하지 않을 이유는 없다. 모진 비바람을 만나더라도 '이런 것쯤이야 아무것도 아니지' 하며 허허 웃어넘길 수 있는 굳은살이 내 안에 자리 잡고 있을 테니까 말이다.


P.118
"요전에 말이야"/이렇게 운을 뗀/오십 년 전 이야기
오모리 지호. 여성. 오사카부. 마흔세 살. 주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