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돌아갑니다, 풍진동 LP 가게] 임진평, 고희은 | 다산책방
분명 스토리는 어디선가 본 듯한 이야기이다. 솔직히 어느 드라마나 소설에서 한 번쯤 본듯한 서사가 믹스된 느낌이 살짝 들긴 하지만, 그럼에도 책을 덮어버리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는다. 음악에 조예가 깊은 영화감독인 두 작가가 소개해주는 노래는 어떤 노래들일까 혼자 상상하게 되고, 내가 진짜 풍진동 LP 가게에 들어가서 사장님이 앨범별로 포스트잇에 정성껏 써 내려간 감상평을 읽는 듯한 기분이다.
정원은 어릴 적 세상을 등진 부모로 인해 동생을 홀로 뒷바라지하며 힘들게 살아왔다. 보상이라도 하듯 동생은 번듯한 대기업에 취직했지만 얼마 되지 않아 뺑소니 사고로 목숨을 잃는다. 홀로 남은 정원은 더 이상 살아갈 이유를 찾지 못해 생을 스스로 마감하려 한다. 하지만 그전에 아버지가 물려주신 6천 장이 넘는 LP를 버릴 수 없어 새 주인에게 찾아주고자 서울 변두리 풍진동에 간판 없는 LP가게를 오픈한다. 돈을 버는 것이 목적이 아니기에 가격표도 없고 SNS 홍보도 전무한 창고 같은 가게이지만 그곳을 중심으로 우연한 만남들이 계속된다.
등장인물들은 살면서 한 번쯤 상실을 경험한 평범한 사람들이다. LP가게의 단골손님인 전직 경찰은 과거에 범죄자의 뒤를 봐주고 뒷돈을 받던 부패경찰이었다. 이 경찰은 지난날을 후회하며 시한부 삶을 살고 있다. 가게의 아르바이트생은 20대 취업준비생이다. 몇 백통의 이력서를 냈지만 열심히 일할 준비가 되었음에도 불러주는 곳이 없는 이 시대 아픈 청춘 중 한 명이다. LP 가게 위층에서 근무하는 변호사는 싱글맘이다. 소위 금수저 집안의 외동딸로 남부러울 것 없는 삶을 살았지만, 의도치 않게 어린 나이에 아이를 갖게 되면서 많은 것을 포기했고 현재는 똑 부러지는 싱글맘으로 살고 있다.
LP 가게 사장 정원의 선한 마음씨로 인해 어떤 해프닝들이 순차적으로 벌어진다. 나비효과처럼 서로 우연히 알게 된 경찰, 변호사, 아르바이트생 등 주변인물들이 정원의 남동생 뺑소니 사고의 전말을 파해치며 젊은 청년의 억울한 죽음을 다시 수사할 수 있도록 이야기가 전개된다. '이래서 그 캐릭터의 설정이 그런 거였구나' 싶을 정도로 앞뒤가 딱딱 맞는 전개라 이야기의 후반부에 다다르면 웃음이 난다. 그 웃음 속에는 안도감의 웃음도, 씁쓸한 웃음도 있다.
각자의 사유로 상실을 경험한 등장인물들은 나이도, 직업도 제각기 다르지만 사건을 해결하며 그 누구보다 애틋한 친구가 된다. 그리고 한 걸음 성장하며 다시금 일어설 힘을 갖는다. 지나고 보면 시련은 사람을 단단하게 만들지만 내가 그것을 멀리서 주관적으로 바라보지 못할 때 이런 비극은 왜 나에게만 일어나나 싶다. 그러나 시련은 오히려 기회가 되기도 한다. 생을 마감하기 위해 오픈한 LP 가게이지만, 결국 그 덕분에 다시 한번 살아보자는 계기가 되었으니 말이다.
인간의 감정이란 애초에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친구에게 좋은 일이 생겼을 때 함께 기뻐할 때보다 슬픈 일을 겪는 친구를 위로해 줄 때 좀 더 진심이 담기기 마련이다. 그러니까 인간은 애초에 시기하고 질투하고 경쟁을 통해 상대를 짓밟고 위에 올라서야 직성이 풀리는 존재인 것이다. 진화생물학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그런 이기적인 마음이 인간을 지구상에서 모든 걸 파괴하는 최상위 포식자로 만들었을 게 분명하다.
나만 힘든 줄 알았는데 내 친구도, 내 친구의 친구도 자신만의 고단함을 안고 살아간다. 단지 말을 하지 않을 뿐. 우리는 SNS에서 남들이 업로드하는 화려한 결과만 보는 것이기에 그 열매를 시기하며 초라한 나 자신과 비교하곤 한다. 나비가 되어 날아가기 전까지 그 지난한 과정들은 보지 못한 채로.
그래서일까. 누구나 잃어버린 것이 있다는 걸 알게 된 순간, 그것이 위로가 될 수 있다는 게 아이러니하다.
그때 미래는 문득 우리가 진정 위로받는 순간은 타인의 불행을 확인할 때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이 세상에서 나만 불행한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모두가 다 불행하다는 사실. 난 100번 떨어졌는데 200번 떨어진 사람도 멀쩡하게(아마 멀쩡하진 않을 수도 있지만) 300번째가 되기 전에는 반드시 좋은 날이 올 거라 믿으며 스스로를 채찍질하고 있다는 걸 확인했을 때 잔잔하게 밀려오는 안도감.
음악에는 힘이 있다. 첫사랑과 이어폰을 나눠 끼고 들었던 설렘의 노래, 비가 오면 날 차버리고 떠나간 그 사람이 생각나는 가슴 아픈 노래, 타지에서 외로운 시간 버틸 수 있게 해 준 노래, 마음이 고단할 때마다 들으면 힘이 나는 노래. 음악에는 사연이 있고 추억이 있다. 그래서 몇 년이 지나 오랜만에 듣는 멜로디에도 그 노래를 듣곤 했던 당시의 계절과 상황들이 떠오르며 잠시나마 그때로 다시 돌아가게 된다.
나는 LP 세대는 아니기에 그 시절 그 아련한 느낌에 대한 로망이 있다. 선명한 고음질 디지털 음원이 넘쳐나는 시대이지만, 가끔은 LP에 손자국을 묻히지 않으려 조심스럽게 꺼내서는 턴테이블 바늘의 미세한 진동이 지지직 소리를 내며 음악이 시작될 때 느껴지는 그 설렘과 전율을 느껴보고 싶은 날이 있다.
이제 제법 코 끝에 닿는 바람이 차갑다. 이번 주말에는 책 속에서 제일 궁금 노래 하나를 골라서 그동안 지나치기만 하고 들어가 보지 않았던 자그마한 동네 LP 샵에 들러봐야겠다.
추억은 어떤 이들에게는 힘이 되지만, 원석은 추억조차 어깨에 짊어진 짐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아니었다. LP판에 새겨진 추억들은 원석이 남은 생을 버텨내는 데 힘이 되어주었다. 비록 남겨진 시간이 너무도 짧았지만, 그조차도 원석은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원래 소중하고 반짝이는 것들은 스쳐 가는 법이니까.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그게 자신 곁에 왔다 갔는지조차 알지 못한다. 바로 원석이 그랬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다소 늦은 감이 있지만, 원석은 자신의 삶에도 소중함과 반짝임이 있었다는 걸 알게 됐다. 그리고 그걸 알고 떠날 수 있게 해준 인연들에 감사했다. 원석이 펜더 기타를 품에 안은 채 마지막 숨을 들이켜면서 웃을 수 있었던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