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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lena Apr 30. 2021

자존감 수업을 시작하다!

엄마의 마감 연습과 함께

세상에는 수많은 죽음이 있다. 출생이 그랬듯이 죽음에 이르는 과정 역시 모두 다르다. 공통점이라면 육체로서 다시 만날 수 없고, 누군가는 상실을 경험한다. 물론 상실에 대한 반응, 애도의 모습은 제각각이다. 특히 미해결 감정 상태에서 떠나는 경우 죄의식 또는 회한을 남긴다. 나에게 엄마의 마감 연습이 필요한 이유이다. 엄마가 지금 내 곁을 떠난다면 영정 앞에서 목 놓아 울고 있을 내가 보인다. 적어도 그렇게 엄마와 작별하고 싶지 않다. 노환의 고통으로부터 해방되어, 이생의 걱정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엄마를 기쁘게 보내드리고 싶다.


나의 출생은 그다지 환영받지 못했다. 서른여섯 살의 뒤늦은 임신. 7월 감자 수확을 앞두고 만삭이 되어야 하는 엄마, 이미 3남 1녀를 양육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던 엄마는 고민이 많으셨다. 결국 산부인과를 선택하셨다. 당시만 해도 산아제한을 장려하던 터라 낙태가 다반사였던 시절이었다. 수술대에 올라가서도 엄마는 마음이 편치 않으셨다. 간밤에 꿈자리가 심상치 않다며 할머니(엄마에게는 시어머니)께 전화를 받은 것도 마음이 쓰였고, 한겨울 차가운 수술대도 섬뜩섬뜩하게 느껴지셨다. 결정적인 의사선생의 말 한마디, 


"아이가 너무 컸네요. 산모가 위험해요.” 


그렇게 태어났다. 나는. 나의 안위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존엄하지 않았다.  

엄마의 마감 연습이 나의 자존감 수업 졸업으로 연결되어야 하는 이유는 이것 말고도 여럿 있다. 엄마는 조용한 분이시다. 90년 넘게 사는 동안 누구에게 부탁하는 법이 없으셨다. 누구에게 싫은 소리도 안 하셨다. 그렇다고 칭찬을 하시는 분도 아니셨다. 긍정이 없으셨다되는 쪽보다는 안 되는 쪽을 먼저 염두에 두셨다좋은 것보다는 흠을 먼저 보셨다극단의 상황을 시나리오로 만들기도 하셨다물론 말로는 하지 않으셨다마음으로만 담아두셨다. 하지만 그 부정의 기운은 옆사람에게 전해져 숨 막히게 하는 순간이 있었다그런데 정작 당신은 모르셨다. 오로지 자신의 역할에 충실하실 뿐이셨다. 주어진 과업을 가장 중시하시는 분이셨다. 


유감스럽게도 그 과업에서 ‘엄마’의 역할은 언제나 뒷전이었다.  40대 후반이 되기까지 나는 엄마 품에 안긴 기억이 없었다. 그러니 살갗에 대한 그리움도 없었다. 나에게 엄마는 어려운 존재였다. 때로는 무섭기도 했었다. 크게 야단맞은 기억도 없는데 엄마의 무표정이 무서웠다. 상담심리 공부를 할 때 유난히 낮은 나의 자존감이 성장과정에서 엄마와 애착형성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분석을 받았다. 깊이 수긍했다. 그 후 엄마를 만날 때마다 '조금만 더 사랑해 주시지!' 마음속으로 수십 번도 더 소리쳤다. 입 밖으로는 나오지 않는 회한과 원망.      


15년 전쯤이었을까? 어느 날 용기를 냈다. 어린 시절의 여러 가지 기억들을 들추어내며 나의 결핍을 말씀드렸다. 눈물까지 흘려가며, 상처로 남아 있는 아픈 이야기를 했다. 엄마는 조용히 한참을 듣기만 하셨다. 표정의 변화도 없으셨다. 살짝 두려워졌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아차릴 수 없는 그 무표정. 나의 목소리는 점점 작아지고, 기운을 잃어갔다. 다시 용기를 냈다. 그리고 엄마에게 부탁을 했다.     


"그래도 '나는 너를 아끼고 사랑한다'라고 말씀해주세요."

엄마는 뭔가 말씀을 하시려고 입을 뗐다. 숨을 죽이며 기대에 차 있는데, 한 마디로 일축했다.     


"시끄럽다."     


적어도 수긍은 해주실 줄 알았다. 엄마의 거절에 익숙해져 있었지만 그날만큼은 바로 무너졌다.     


 "그때는 죽기 살기로 살았는데 너거가 눈에도 안 들어왔다. 공부시켜놓았더니 별소리를 다 듣는다."      


사실 엄마 말도 맞았다. 고단한 엄마의 일상을 모르는 바 아니었다. 엄마에게는 자식을 돌볼 여력이 없었다. 집안에서 당신의 역할이 너무나 컸다. 사랑한다는 말 대신 공부하는 것과 책을 사야 하는 것에는 아낌없이 지원하셨다. 또래들에게 뒤지지 않을 만큼 힘닿는 한 자립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셨다. 그것만이 부모의 역할이며 최고 가치라고 여기셨던지 결혼을 할 때도 남들에게 흠 잡히지 않게 부족함 없이 해주셨다.     


하지만 내가 원하는 것은 그것이 아니었다. '사랑한다'는 따뜻한 말 한마디였다. 포기하지 않았다. 자존을 회복하고 싶었다. 나의 자존감 수업이 시작되었다. 생명을 허락하고 이 세상에 살게 한 엄마가 '있는 그대로의 나'를 인정해주지 않는다면 깊은 우울을 결코 치유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좋지 않은 상황이 되면 스스로 자신을 깎아내리며 나를 부정하는 생각들을 없애고 싶었다. 착한 딸, 공부를 잘하는 학생, 능력이 있는 사회인이어야만 엄마의 인정을 받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나'로 살아도 된다고, 기를 쓰고 살지 않아도 충분히 사랑받을 가치가 있다고 엄마에게 확인받고 싶었다.     

 

예상보다 더 긴 시간이 흘러갔다. 가랑비에 옷 젖듯 틈만 나면 슬그머니 끄집어냈다가 다시 일보 후퇴하는 척하면서 몇 년이 지났다. 살짝살짝 변화가 나타났다. 생전 전화 한 번 먼저 하시지 않던 분이 어느 날 전화를 하셨다.     


"니, 요새 무슨 일 있나? 와 전화가 없노?"     


마치 시위를 벗어난 화살처럼 엄마의 태도는 변해갔다. 좋았다. 다시 용기를 냈다. 부산을 가면 억지로 엄마를 안았다. 비록 늦었지만 스킨십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소위 '자랄 총량의 법칙'으로 모정에 호소했다. 어느 순간 자연스럽게 허그가 이루어지고,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엄마는 말씀을 잘하시는 분이셨다. 곧잘 웃기도 하셨다. 잠든 나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기도 하셨다. 내가 몰랐다. 엄마의 삶을 내 입장에서만 바라보았지 엄마의 관점에서 바라보지 못했을 뿐이었다. 자존감 수업의 성과는 아주 좋았다. 삶의 만족도도 높아졌다. 중년에 접어든 내 삶 속에 힘겨운 고비들이 여러 차례 찾아왔지만 높아진 자존감은 시련들을 이겨내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반면 엄마는 그 후 많은 시련을 겪으셨다. 삶이 뒤흔들렸다. 배우자를 잃으셨고, 큰 수술을 두 번이나 받으셨다. 그래도 엄마는 건재하신 것처럼 보였다. 아버지 유품을 바로 정리하실 만큼 강건하셨다.       


그런데 1년 뒤, 다시 엄마의 건강이 나빠지면서 죽음 불안이 시작되었다. 두려움은 공황장애로 이어져 정신병동에 입원하시게 되고, 엄마는 완전히 달라지셨다. 65kg이던 체중이 55g으로 줄었다. 나날이 어두워지는 엄마의 표정. 막내딸인 나는 당시 엄마를 떠나보낼 준비가 안 되어 있었다. 조금 단단해진 것일 뿐. 여전히 한 번씩 깊은 우울의 심연으로 빠져들곤 했다. 엄마가 떠나고 나면 미해결 감정으로 남고 말 텐데...


자존감 수업을 제대로 해야 했다. 엄마의 마감 연습과 함께! 출생이 나의 선택과 무관했다면 존엄한 삶은 선택이 가능하니까. 나의 안위와 품위를 만들기 위해 가장 먼저 자기 연민으로부터 빠져나오기로 했다.  스스로 만들어 놓은 희생양 각본을 수정했다. 그리고 오랜 세월 가슴에 묻어두었던 엄마에 대한 원망, 그에 대해 용서를 구하는 일을 준비했다. 그렇게 8년이 흘렀다.


이제 내가 할 일은 엄마의 마지막이 존엄하게 마감되도록 돕는 일이다. 나를 세상에 나게 하신 분, 마음 깊이 나를 자랑으로 삼으셨던 분, 엄마의 삶을 찬란하게 빛냈던 무용담과 인고의 긴 세월을 충분히 공감하는 것, 그리고 감사하는 것, 무엇보다 진심으로 사랑해야 한다. 그 사랑이 엄마의 마감 연습을, 나의 자존감 수업을 완성시켜줄 것이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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