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설고도 불안한
낯설었다. 대학시절 런던에 한번 여행을 다녀온 적이 있지만, 역시 난 어쩔 수 없는 이방인. 그곳은 낯선 곳이었다. 거기다 그동안 들려온 영국에 대한 안 좋은 소식들은 그런 낯선 마음에 불안감까지 더했다.
최근 들어 테러 소식은 더 자주 들려오고 있다. 언제 어디서 일어날지 알 수도 없고, 일순간에 수많은 목숨을 앗아가기도 하는 조직적인 테러와 더불어, 영국에 온 외국인을 상대로 한 영국인들의 테러도 심심치 않게 일어나는 듯 보인다. 그래서인지 첫 여행지에 도착했다는 설렘도 잠시, 먼저 숙소 근처 동네를 둘러보자며 길에 나선 우리는 적잖이 불안에 떨었다. 설레면서도 불안했다. 둘이 함께 다니니 혼자인 것보다는 훨씬 안전하긴 했지만, 누군가 갑자기 해코지하진 않을까, 예상치 못한 사고가 나진 않을까 왠지 모르게 머릿속 불안한 생각들이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우리 숙소가 있던 월덤스토우Walthamstow 지역은 다양한 문화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사는 커뮤니티라고 한다. 그렇다 보니 할랄 음식점을 포함한 이국적인 상점들이 많이 보였다. 길거리에도 다니는 사람들도 우리가 일종의 편견처럼 갖고 있는 '전형적인 영국인'의 모습은 아니었다. 아무래도 그런 분위기가 마음속 불안감을 좀 더 조성한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어찌 보면 백인들만 모여있는 곳이 더 위험한 곳일지도 모르는 일이다.)
두 손 가득 동질감을 사다?
그렇게 묘한 느낌을 가진 채 거리를 둘러보다 영국에서의 첫 끼를 먹었다. 분명 메뉴는 샌드위치인데 가격은 코스 요리인 것은 왜 때문이냐며 두 손을 벌벌 떨 수밖에 없었던 우리는 저녁은 그냥 집에서 간단히 해 먹기로 했다.
점심식사 후 시작된 우리의 쇼핑. '구제 킬러'를 자처하는 우리의 첫 시선을 잡아끈 곳은 British Heart Foundation이 운영 중인 Charity Shop이었다. (영국에는 NGO가 운영 중인 중고 물품 샵들이 곳곳에 많다. 굉장히 부러운 부분이다.) 보람이 빨간 장화를 5파운드라는 혜자스러운 가격에 '득템'한 뒤 우리는 흥이 오르기 시작했다. 우리나라에선 워낙 비싼 치즈와 버터가 즐비한 식료품점에서는 혼이 나간 듯 바구니를 채워담았다. 빵집에서 빵도 사고, 대형 할인마트까지 섭렵한 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엔 자연스레 원투 스텝이 밟아졌다.
묘하게도 쇼핑 후 두 손 가득 들고 있는 봉지들 때문인지 내가 마치 이곳에 속한 사람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함께 길거리를 걷고 있는 사람들에게서 느껴지는 묘한 동질감. 그들에게 우린 여전히 '동양 어디선가 온 외지인'으로 보였을지 모르지만, 나의 마음만큼은 뭔가 달라져있었다. 마치 나도 이곳의 일상을 살아가고 있는 듯한 기분. 그곳의 물건을 사면서 그곳 사람으로 인정받은 기분.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 묘한 착각에 빠진 순간부터 그곳과 그곳의 사람들이 처음처럼 낯설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우리는 그렇게 두 손 가득 동질감을 샀던 걸지도 모르겠다.
두 마음이 충돌한 첫 외출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결국 동네에서 길을 잃고 헤매면서 우린 이곳에서 어쩔 수 없는 이방인임을 다시 한번 처절하게 깨달았지만, 처음 그 길을 나선 때만큼 불안하거나 두려운 마음이 들지는 않았다. 낯선 시작점에서, 우리는 그곳과 정말로 가까워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