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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느린 Nov 03. 2017

불안과 설렘 사이의 시간

어느 순간, 이 반복이 지겨워졌다

삶은 무수한 반복으로 이루어진다. 매일 아침 해는 뜨고, 매일 같은 시간 울리는 알람 소리에 일어나, 매일같이 씻고, 입고, 먹기, 그리고 다시 자기를 반복한다. 왜 매일 세 끼를 먹어야 하는지. 왜 먹지 않으면 어김없이 이 야속한 배는 고파오는지, 먹고 난 후 설거지거리는 이토록 뻔하게 쌓이는지. 하루 세 번, 똑같은 그릇을 씻으며 나는 생각했다. 아, 이토록 지겨운 것이 삶이라니.


나와 영원은 어느 정도 지쳐 있었다. 사실, 누구나 겪는 일이었다. 특별할 것이라고는 없는, 한국의 흔한 신혼부부들과 같은 생활이었다. 광고회사에서 일하는 영원에게 퇴근 시간은 사실 무의미했다. 야근과 칼퇴의 경계는 늘 저녁 7시 어간에 정해지기 때문에, 나는 저녁마다 그에게 '오늘도 야근?'하고 연락을 했다. 절반 정도는 'ㅜㅜ' 같은 종류의 답이 왔고, 또 나머지는 답이 없었다. 답을 할 수 없을 정도로 바쁠 때는 그랬다. 영원은 종종 이직을 생각했지만, 또 한편으로는 이직한다고 답이 있을까, 하며 씁쓸하게 웃기도 했다. 


나는 졸업하고서도 진로 고민을 마치지 못했다. 몇 번의 이직과 퇴직 끝에 친구들과 가게를 열었다. 환상만 가지고 시작한 것은 아니었지만, 현실은 생각보다 더 썼다. 나의 불안한 경제 상황은 우리 부부의 가계마저 위협하는 듯했다. 결혼하고 1년 남짓, 함께 통장을 들어다 보는 일이 많았고, 또 그와 정비례하게 함께 한숨을 짓는 일도 많아졌다. 우리의 일상이 돈에 대한 걱정으로 물드는 것은 아무래도 싫었다. 돈은 우리의 행복의 기준이 될 수 없었으니까. 그래서 우리는 때로는 막연한 긍정으로, 또 때로는 현실을 회피하면서 불안을 달랬다. 하지만 우리의 힘으로 어쩔 수 없이 속상한 날도 있었다. 



여행 가자, 우리


결혼을 얘기하던 무렵, 지하철을 기다리며 결혼에 대한 환상을 그리던 중이었다. 신혼여행을 1년 정도 가면 어때? 그리고 돌아와서 무일푼으로 새로 시작하는 거야. 이유와 목적 따위는 없는 시시한 농담이었다. 이루어질 거라고, 혹은 이루고 말 거라는 생각도 없었다. 그런데 왠지 그 말이 우리의 마음을 흔들기 시작했다. 현실과 적당한 타협 후 나온 결론은 결혼하고 1년 후, 한 달 동안 여행하기. 둘 다 직장인이었던 시절, 한 달 동안 휴가를 주는 회사는 없었으므로 이 또한 꿈에 가까웠다. 하지만 말로는 뭐든 할 수 있는 법. 우리는 우리가 뱉어 놓은 말이 씨가 되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었다.


흐르는 물 같은 게 시간 이랬던가. 우리에게도 어김없이 시간이 흘렀고, 금세 1주년이었다. 상황은 우리 마음 같지 않았다. 영원의 회사에는 영원이 투입되기로 예정된 프로젝트가 기다리고 있었고, 이제 막 창업 전선에 나선 나에게도 한 달의 휴가란 부담이었다. 주변의 만류는 불 보듯 뻔했다. 요즘 취업이 얼마나 어려운데. 재취업도 쉽지 않아. 현실이 그렇게 녹록지 않더라. 진심 어린 걱정이었다. 그다지 용기가 뛰어난 사람들도 아니어서 '현실'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우리는 우리의 작은 꿈을 조금씩 미뤄두었다.




설렘과 불안 사이의 습자지 한 장


몇 개월 사이에 상황은 역전됐다. 영원이 다니던 회사의 모든 상황이 하루아침에 바뀌었다. 언제 달라져도 이상하지 않은 것이 일상이라니. 회사를 다녀도, 회사를 다니지 않아도 불안한 게 현실인 것 같았다. 어쩌면 삶이란 커다란 불안을 통과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고 우리는 생각했다. 어쨌든 변화는 우리에게 기회였다. 퇴사까지 생각했던 영원에게 회사는 한 달이라는 휴가를 허락했다. 오래된 소망을 이룰 수 있는 순간이 바로 눈 앞에 있었다. 이때를 대비해 매달 꼬박꼬박 모았던 여행용 저축은 때에 맞춰 빛을 발했다. 우리에게 주어진 공백과 같은 한 달의 시간을 채우는 일만 남았다.


불안의 시기를 넘기고 나니 마냥 설레기만 했다. 이전과 똑같은 일상인데, 여행을 가기로 마음먹기 전과 후가 이렇게 다를 수 있다니. 마음은 신기한 것이었다. 기존의 스케줄에 여행 준비가 더해지니 몸은 더 분주했지만, 왠지 어떤 것이라도 버텨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일을 마치고 만난 밤이던, 주말 오후던 서로 시간이 날 때마다 컴퓨터 앞에 나란히 앉아 여행 계획을 세우는 것도 즐거웠다. 여행을 간다는 벅찬 감동이 갑자기 밀려와 '남편, 우리 진짜 가나 봐!' 하며 옆에 있던 영원을 꼭 껴안기도 했다. 낯선 미래가 주는 신선함이 가득한 나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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