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트네스의 자연과 함께한 시간
녹색으로 시작하는 하루
토트네스에서 처음 묵었던 진Jean의 집에서 시가지로 걸어나가기 위해서는 동네 놀이터 하나를 지나가야 했다. 중심가로 이어진 지름길인 산길로 들어가기 전에 위치한 아주 거대한 놀이터였다. 사실 놀이터라 부르기엔 스케일이 매우 크고 야생의 느낌이 물씬 나는 곳이었다. 소싯적 놀이터 생활 좀 해봤다는 우리지만, 그 놀이터는 한국에선 결코 경험해볼 수 없었던 차원의, 정말 말 그대로 자연친화적 놀이터였다. 우리에겐 너무 낯선 개념의 그 놀이터는 진의 집에 머무는 동안 출퇴근(?) 코스로 꼭 들르는 곳이 되었다. 특히 그곳에서 탈 수 있는 짚라인 Zip line 놀이 기구는 나의 스릴 본능을 충족시켜 주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어린이용임이 틀림없는데 어째서!) 도르래(?)를 끌어와 타고 내려오고 다시 올라가길 여러 번 반복하다가, 과몰입 증세가 나타날 쯤에는 보람의 단호한 '이번이 마지막이야' 카드가 등장하곤 했다.
아침에 나올 때면 아무도 없이 적막한 곳이었지만 오후 느지막이 집으로 돌아올 때면 아이들이 곳곳에 자리를 잡고 놀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녹색으로 시작해서 끝나는 하루. 아이들에게 이만한 놀이터이자, 배움터이자, 쉼터인 곳이 있을까. 그 아이들은 이런 따분함이 싫다며 정작 도시생활을 부러워하고 있을지는 모를 일이지만(물론 그런 표정은 전혀 아니었다), 우리 입장에서는 그들이 누릴 수 있는 자연과 여유가 정말 부러웠다.
현실이라기엔 너무나 꿈같은
토트네스는 작은 동네이다 보니 하루 반나절이면 마을의 대부분을 볼 수 있었다. 그래서 그곳에 머무는 일주일 남짓의 시간 동안 어떤 특별한 일정을 해내고자 서두르지 않고, 그간 못 누렸던 여유를 제대로 만끽해보자는 마음으로 지냈다. 토트네스 근방에 있는 다트무어 국립공원을 가보고 싶었는데, 대중교통으로는 가기가 쉽지 않을뿐더러 도착해서도 그 공원이 워낙 크기 때문에 도보로 다니며 볼 수 있는 수준이 아니라는 진의 말을 듣고 포기하게 되었다. 그리고 진의 추천을 받아, 배를 타고 다녀올 수 있는 근처 도시인 다트머스Dartmouth에 다녀오기로 했다.
다트머스로 가는 배를 기다리며 선착장 앞에서 점심을 먹었다. 음식이 나오고 소시지를 썰다가 문득 내가 지금 누리고 여유가 감당이 안될 정도로 벅찼다. 비록 토트네스 다른 식당들에 비교하면 음식 자체는 가격 대비 맛이 그리 좋지 않았지만, 고개를 돌리면 푸른 하늘과 나무들과 고요하게 늘어선 요트들을 옆에 두고 앉아 점심을 먹고 있자니 '이게 정말 현실인가'하는 마음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배를 타고서는 생각보다 쌀쌀한 강바람에 떨어야 했지만, 한편으론 훼손 없는 강둑에 모여 앉은 새들이나 언덕 곳곳에 누워있는 소와 양들, 잔잔히 흐르는 강물 위에서 찾아오는 평온함을 느낄 수 있었다. 다트머스로 가는 내내 우리 배의 선장은 주변 지역의 역사와 스토리들을 설명해주었다. 하지만 음질 좋지 않은 스피커를 통해 들리는 강한 엑센트의 영국 영어는 좀처럼 알아듣기가 어려웠고, 배경지식과 함께 좀 더 풍성하게 그 풍경을 누릴 수없었던 것이 못내 아쉬움으로 남는다.
한 시간 반 남짓 걸려 목적지에 도착했지만, 토트네스로 돌아오는 배 시간이 맞지 않아 다트머스에서는 정작 그리 긴 시간을 보낼 수 없었다. 그래서 강가를 따라서 잠시 걸어보는 정도로 만족해야 했다. 비록 벤치에 여유롭게 앉아서 강을 바라본다든지, 핫도그나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베어 먹으며 여유로운 산책을 해보지 못했지만, 오고 가는 길 배 위에서 누릴 수 있었던 여유만으로도 충분히 꿈같은 여정이었다.
이래서 영국에서 텔레토비가 나올 수 있었나
토트네스를 돌아보던 첫날, 방문 계획이 없었던 곳이 우리 눈에 계속 들어왔다. 바로 토트네스를 둘러싸고 있는 언덕들. 구름과 살포시 맞닿은 동산 위에서 여유롭게 풀을 뜯고 있는 양들을 보고 있노라면 마음 한 켠부터 오묘한 평온함이 서서히 퍼져왔다. 파란 하늘 아래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언덕의 모습은 이따금 매우 비현실적으로 느껴지기도 했다. 이런 그림 같은 풍경을 보고 있으면 영국에서 텔레토비가 나온 게 이런 이유가 아닌가 하는 엉뚱하지만 왠지 설득력 있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우리 저기는 꼭 올라가 보자"
그래서 토트네스 일정에서 마지막 날은 고대하던 언덕들을 정복해보자며, 교회를 다녀온 뒤 다른 일정을 가지 않고 온전히 언덕을 걷는 데에 집중했다. SBS 다큐멘터리에서 보았던 특별한 농장이나 학교들도 저쪽 언덕 너머 어딘가 있겠구나 생각하며, 부지런히 머릿속에 마을의 면면을 담았다. 언덕 위 농장들은 모두 사유지이다 보니 마음대로 들어가거나 하지 못하는 한계가 있었지만, 궁금했던 언덕 위에서 푸른빛 자연과 고요한 마을과 어우러진 모습을 맞은편 동산을 바라보니 내 세상이 훌쩍 넓어진 기분이었다.
푸른 여유에게 삶의 한자리를 꼭 내어주자
개인적으로 토트네스에서 가장 기억에 남고 좋았던 스팟은 선착장 맞은편에 있는 공원이었다. 다리를 건너 다니며 매일같이 보았지만 그곳 역시 여행 막바지에야 시간을 내어 가볼 수 있었다. 선선한 바람을 맞으며 산책로를 따라 걸어가니 주변에는 친구, 연인, 가족, 멍멍이와 함께 나온 사람들이 걷기도 하고, 벤치에 앉아있기도 하고, 잔디 위에 누워있기도 하며 여유를 즐기고 있었다. 하늘과 구름과 강과 나무와 잔디와 사람과 동물. 모든 게 마치 하나의 그림처럼 어우러진 모습. 정말 꿈속에 있는 듯한 착각을 주었다. 어떻게 보면 현실로 돌아가기 싫은 꿈이기도 했다.
토트네스를 떠나기 직전에도 그곳에 앉아 시간을 보냈는데 그 모든 푸른 여유를 놓고 떠나려니 마음이 울컥했다. 결국 이 여유는 두고 떠날 수밖에 없구나. 급박하게 돌아가던 서울 생활이 떠오르자 목구멍이 턱 막혀 오르는 느낌이었다. 왜 우리는 그렇게 쫓기듯 살아야 하는 걸까. 도망치듯 여행을 떠나와서야 겨우 이런 낯선 삶을 만날 수 있는 걸까. 풀과 물과 바람이 주는 여유를 뒤로한 삶. 그게 나를 점점 더 좁고 삭막한 사람으로 만드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삶에 '푸른빛 여유'가 한자리를 차지할 수 있게끔 자리를 내어주라고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
적당히 낯선 생활 인스타그램 @our_unusual_d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