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트네스가 더불어 사는 법
도시 다움
대만에 갔던 적이 있었다. 대만에 도착하자마자 제일 유명하다는 시먼딩 거리를 찾았다. '대만의 명동'이라는데 별명을 참 잘 붙였다 싶었던 것이 정말 거기가 명동인지 시먼딩인지 걷는 내내 헷갈릴 정도였다. 맥도널드, 스타벅스, 유니클로 같은 다국적 기업은 물론, 더 페이스샵이나 이니스프리 같은 한국 브랜드들도 차례로 나타났다. 심지어 사람이 북적대는 통에 정신이 혼미해지는 것마저 명동과 비슷했다. 서울에서도 명동을 최악의 장소라 손꼽는 마당에 대만의 명동이라니. 다음에 대만에 온다면 시먼딩은 오지 않으리라 다짐하며 거리를 빠져나왔다. 사람마다 여행의 이유는 제각각이라 도시마다 호불호는 있기 마련이지만, 아무튼 나에게 시먼딩은 매력이 없었다. 거리를 걷는 내내 시먼딩이 명동과 같다면 시먼딩에 올 이유는 무엇이며, 명동다움과 시먼딩다움은 무엇일까 하는 의문이 진하게 남았다.
'도시 다움'은 어디서 기인하는 것일까. 서울과 런던이, 뉴욕과 도쿄가 각각의 아름다움으로 남도록 하는 요소는 과연 무엇일까. 도시 다움이라는 것이 한 두 마디로 규정할 수 있는 단순한 문제는 분명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히 도시 다움의 요소를 꼽아 보자면 지역의 특색을 담은 작은 가게들이 있느냐 하는 것을 들 수 있지 않을까. 한 번 상상해보자. 스타벅스와 커피빈, 맥도널드 그리고 버거킹이 쭉 늘어선 거리와 제대로 읽을 수도 없는 간판을 가진 거리. 어느 쪽이 더 이국적으로 다가올까. 여행지에서 만나는 스타벅스와 맥도널드의 '표준적인 맛'의 매력을 나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각 도시만이 지닌 고유한 매력을 드러내는 요소가 되기는 어려울 것이다. 도시마다 작은 가게를 지키는 것이 중요한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토트네스를 토트네스 답게
만드는 작은 가게들
그런 점에서 토트네스는 꽤나 훌륭한 여행지였다. '토트네스다운' 가게들이 즐비한 곳이었으니까. 토트네스에는 NGO에서 운영하는 세컨핸드 샵과 외곽의 대형마트 외에는 프랜차이즈나 다국적 기업을 찾아보기가 힘들었다. 영국에서 스타벅스보다 더 대중적이라는 프랜차이즈 카페 '코스타 Costa'가 토트네스에 입점을 시도했다가 주민들의 강력한 반대로 철수했다는 자랑 아닌 자랑(?)을 듣기도 했으니 토트네스의 지역 가게 사랑은 혀를 내두를 정도다.
토트네스의 지역 가게 사랑을 보여주는 또 다른 증거 하나는 바로 토트네스 주민들이 직접 만든 토트네스 지역 가게 소개 지도(Free Map : Independent Cafes, Restaurants &Pubs). 토트네스에 들어오자마자 호스트 진 Jean이 건네는 지도를 받았다. 토트네스에 있는 동안 이 지도를 가지고 돌아다녔음은 물론이고, 지도의 안내로 만난 가게들이 무척이나 훌륭했음은 더 말할 것도 없다.
토트네스에서 보내는 첫날, 늦은 점심을 해결하려 마을에서 가장 오래된 가게 중 하나라는 브리오슈 The Brioche에 들렀다. 단출한 차림과는 다르게 건강하고 풍부한 맛에 먼저 놀라고, 동네 사람들이 오며 가며 우연히 만나 자연스레 합석해 즐겁게 대화하는 모습에 또 한 번 놀랐다. 함께 온 강아지들도 서로 인사하며 반갑게 인사하는 모습이 정다웠다. 토트네스의 카페나 레스토랑은 지역 농산품이나 오가닉 제품을 쓰는 곳이 대다수였고, 채식을 지향하는 곳도 많았다. 적어도 먹거리에 대해서는 안심하고 외식할 수 있는 곳인 셈이다. 환경과 지역 살림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토트네스의 정신이 상점 하나하나에 녹아있는 것이 몸으로 느껴졌다.
채식 뷔페, 시드 투 토트네스 Seed 2 Totnes도 인상 깊었던 가게 중 하나. 한 명당 7.5파운드로 착한 가격에 배불리 먹을 수 있음은 물론이고, 고기가 없으면 맛이 없을 거라는 나의 고정관념을 무참히 짓밟아 준 곳이기도 했다. 그 외에 일일이 열거하기가 민망할 정도로, 방문했던 모든 가게들이 자신들만의 특색과 매력을 갖고 있었다. 맛없기로 유명한 영국에서 가는 곳마다 연신 맛있다를 외치며 식사는 경험도 놀라웠다. (런던과 너무나 상반되는 경험!) 식당과 카페뿐일까. 정육점이며 식료품 상점이며, 심지어 치즈가게까지. 특별한 상품으로 가득한 상점들을 둘러보노라면 하루가 모자를 정도였다. 재방문 의사 200%인 가게가 이토록 가득한 동네라니!
지역과 이웃을
지키기 위한 작은 실천
토트네스의 메인 스트릿은 1Km 남짓. 볼거리가 가득한 런던이나 에든버러에 비하기에는 체급 차이가 너무 크지만, 매일 보아야 할 스폿을 쭈욱 적어놓고 다닐만한 여행지는 분명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걸어서 한 시간 정도만 다녀도 웬만한 곳은 다 가봤다 싶을 정도로 동네가 작았다. 하지만 이 작고 단순한 동네가 결코 지루해지지는 않았던 것은 작은 가게들의 힘이 컸다. 심지어 일주일이 넘도록 있고도 더 있지 못한 것이 아쉬울 정도. 관광지 대신 가봐야 할 가게들을 쭉 써놓고 매일매일 다른 가게에 쏘다니다 보니 일주일이 모자랐다. 맛있었던 곳은 두 번이고 세 번이고 가고 싶은데, 아직 가야 할 곳이 많이 남아 있어 매번 남은 시간이 아쉽기만 했다.
프리 맵에는 지역 가게를 이용해야 할 이유를 친절하게 적어 놓았다. 첫째, 토트네스를 방문하고 싶은 특별한 곳으로 유지하기 위해. 둘째, 지역 사람들이 운영하는 독립된 비즈니스들을 지원하기 위해. 셋째, 토트네스만의 특별한 매력을 가진 하이스트리트를 번성하게 하고, 활기 있게 만들기 위해서. 그리고 마지막, 토트네스와 주변 지역 경제를 돕기 위해. 코스타나 스타벅스 대신 지역 가게를 이용해야 하는 이유를 정리하면 이웃의 삶을 지키고, 토트네스다움을 만들어가기 위함이라는 뜻이겠다. 지역 내 소비를 더 활성화해보려고 토트네스의 지역 화폐도 만들어 사용 중이라 했다. 다국적 기업과 대기업의 서비스에 이미 익숙해진 우리에게 적잖이 낯선 실험이었지만, 이웃과 지역을 살리는 실천을 꼭 배우고 싶었다.
얼마 전 운영하던 가게를 정리했다. 1년 남짓 운영한 가게를 접으며 이런저런 어려움이 많았지만, 무엇보다 경제적인 부침이 컸다. 임대료는 자꾸 올라가는데 기댈만한 지역 공동체는 없었다. 더 아쉬운 것은 지근에 있어 종종 만났던 동네 가게들 서너 군데도 비슷한 시기에 문을 닫았다는 사실. 망원이며 연남이며 핫해지는 거리에 매력적인 가게들을 점점 많아지는데 꼭 그만큼 작은 가게들이 자리를 지키기 어려워지는 이유는 무얼까. 작은 가게들이 버티기에 팍팍한 도시, 서울. 이 서울의 서울다움은 계속 유지될 수 있을까. 동네 가게가 문 닫은 자리에 열리는 프랜차이즈들이 우리 동네의 동네 다움을 지켜줄 수 있을까.
적당히 낯선 생활 인스타그램 @our_unusual_d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