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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당히 낯선 생활
by 영원 Jun 04. 2018

오후 네시에 다같이 문을 닫자

전환마을 토트네스의 워라밸

워라밸이란 그저 '배부른 소리'일뿐인가

근무시간은 근로계약서에 분명히 기재되어있었다. 그러나 나의 출퇴근 시계는 대체로 그전부터 더 늦게까지 향했다. 파란 날도, 빨간 날도 결코 안전하지 않았다. 대한민국 수많은 직장인들이 겪고 있는 일상의 싸움을 나 역시도 피하지 못한 채 온몸으로 받아내고 있었다.


그러면서 늘 의문이 들었다. 어떻게 이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나 많은 시간 일을 하고 있음에도, 이리도 행복하지 않을까. 사람들로 꽉꽉 들어찬 지하철에 오를 때면 그 의문은 항상 내 머릿속을 찾아왔다. 너무나 아이러니하지만 그저 수긍하고 지나가는 것 말고는 답을 찾을 수 없는 의문. 그렇게 같은 칸에 올라선 이들도 나와 같은 답을 내리고 있으리라 생각하니 속이 더욱 쓰려오곤 했다.


그래서 요즘 '워라밸'이라는 말이 각광을 받고 있는 걸까. 설령 더 적은 보수를 받게 된다 하더라도 '나의 삶'이 보장되는 일을 갖고자 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고 한다. 혹자는 그런 선택이 '배부른 소리'라든지 '개인주의적'이라든지 '세상을 잘 모르는 것이다'라는 식으로 비판하거나 못마땅해하기도 하지만, 각자가 할 수 있는 능력과 분량대로 일과 삶의 밸런스를 맞춰 살고자 노력한다는 것이 내 눈에는 그리 나쁘게 보이지 않는다. 아니, 나 역시 그 '밸런스'를 꼭 갖고 싶다는 소망이 날이 갈수록 강해져 갔다.





결혼을 하고 나니 '워라밸'을 중요시하는 트렌드에 더더욱 동조하게 되었다. 둘이 함께 삶을 꾸려 가보자며 한 집에 살게 되었건만, 출퇴근 시간이 서로 다르다 보니 평일엔 밥 한 끼도 제대로 함께 먹어보지도 못하고, 겨우 잠만 같이 자는 룸메이트나 별반 다를게 없이 지내기도 했다. 차차 그런 삶에 익숙해져 갔고, 그게 얼마나 슬프고 비참한 것인가에 대한 감성도 잃어버리고 말았다. 평일에 친구들과 약속 한 번 제대로 잡아볼 수 없는 삶은 어느 정도 받아들였지만, 아내와도 같이 한 식탁에 앉아 시간을 보내는 일이 이렇게 힘든 일이 되어서야, 이건 정말 안 될 일이었다.


하지만 이제 막 필드에 발을 들여놓은 사회초년생에게, 혼자서 일과 삶의 밸런스를 맞춰보겠다는 것은 자의든 타의든 허락될 수 없는 욕구였다. '그래, 나만 이렇게 살고 있는 거 아닌데 뭐'라는 식으로 스스로 위안을 하려다 보면, 또 그것만큼 현실에 회의감 들게 하는 말이 따로 없었다.



토트네스의 메인 스트리트인 High Street


네시가 되면 모든 가게가 문 닫는 동네


토트네스를 첫날 돌아보며 신기했던 건 가게들이 모두 오후 네시 전후로 문을 닫는다는 것이었다. 처음엔 어쩌면 단순히 소도시가 갖는 특징이라 생각했다. 런던에서는 밤늦게까지 우리의 눈, 코, 입을 만족시켜주는 가게들이 불을 밝히고 있었다. 아무래도 그만큼 수요가 많지 않은 동네에서 그와 같은 운영은 소모적일 것이다. 그래서인지 서울에서부터 올빼미 생활에 익숙했던 우리에게는 해도 지기 전에 대부분의 가게들이 마감을 준비하고 있는 토트네스의 모습이 매우 낯설게 느껴졌다.


손님이 없기 때문이라는 단순히 경제적인 이유로 자연스럽게 형성된 문화였을지도 모르지만, 그곳이 '전환마을의 본거지, 토트네스’였기에 왠지 그 너머에 있을 이유를 우리는 상상해보기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여행을 떠나기 전에 보았던 토트네스에 관한 SBS 다큐멘터리에서 보았던 한 사람의 이야기가 자연스레 떠올랐다. 수백만 불의 연봉을 받던 월스트리트 출신 직장인이 토트네스에 정착하여 그때와는 비교도 안되게 적은 돈을 벌고 있지만, 밤낮없이 일하던 삶과는 차원이 다른 여유와 행복을 누리면서 살고 있다던 이야기. 자신의 일을 하면서, 아이를 돌보고 아내와 함께 할 수 있는 삶에 더없이 행복해하던 그 얼굴이 떠올랐다.


그래. 모두가 다 같이 저녁에 일을 하지 않는다면? 온 마을이 모두 함께 하던 일을 멈춘다면? 가게 문은 닫히고 사무실 문이 잠긴다면. 모두가 각자의 집에서 자신의 가족과 저녁시간을 보내게 될 수 있겠구나. 비록 그 시나리오가 어느 정도 진실인지 아닌지는 확인할 수 없었지만, 그런 뒷배경이 우리 머릿속을 채우자, 그곳이 한없이 부러워지기 시작했다.


"이거 이거. 이게 진정한 워라밸이네."



빵집이 문을 닫기전 허둥지둥 빵을 산다. 마감 직전엔 떨이로 세일을 많이 한다.


저녁을 해먹기 위해 미리미리 장을 봐둬야 한다


오늘 저녁은 Pasty(콘월 지역의 전통음식)와 Mushroom Soup


저녁을 함께 먹는다는 것은 '밸런스'가 맞고 있다는 얘기겠지


그래서 우리는 토트네스에 있는 동안 대부분 저녁을 만들어먹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여유롭게 동네 산책을 마무리하면서, 가게들이 문을 닫기 전에 동네 마트에서 찬거리를 사고, 정육점에서 고기를 사고, 빵집에서 빵을 샀다. 그렇게밖에 할 수 없는 선택지가 전혀 싫지 않았다. 물건을 사고, 계산을 할 때면 기분이 참 좋았다. 지금 이 종업원도, 가게 주인도 오늘 저녁은 집에 돌아가, 혼자서든 가족들과 함께든 자신의 삶을 살 수 있는 시간을 보내겠지. 그 생각을 하니 기분이 저절로 좋아졌다. 정말 우리에겐 '낯선 생활'이 아닐 수 없었다. 


그 모든 가게 주인과 그곳에서 생업을 이어가는 사람들이 그 '밸런스'로 인해 행복함과 자유로움만을 느끼며 살고 있을까? 물론 그건 아닐 수도 있다. 그렇지만, 한국에서의 나의 삶에서는 분명 결핍된 행복의 요소라는 것은 결코 부정할 수 없었다.


서로가 서로의 저녁시간을 지켜주는 마을. 설령 이 마을이 그렇게 구조적으로 개인들의 삶을 위해 규칙을 형성한 것이 아니라 하더라도, 그곳의 워라밸이 나의 삶에 던지는 메시지는 분명히 뚜렷했다. 가족이 되어서도 서로의 일상을 제대로 돌아볼 수도, 돌봐줄 수도 없는 삶보다는, 서로 걱정 없이 저녁시간을 맞추어 함께 숟가락을 뜰 수 있는 삶이 훨씬 더 '밸런스'가 맞는 삶이라는 것. 그래서인지, 저녁마다 맛 본 토트네스의 워라밸은 참으로 기분 좋은 맛이었다.



사진이 찍힌 시간은 17시 32분. 모든 가게는 문을 닫았다.








적당히 낯선 생활 인스타그램 @our_unusual_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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