끊임없이 기준선을 바꿔야 한다
사람은 일관성을 추구한다. 하지만 그 어느 누구도 기존의 일관을 무너뜨릴 수 있는, 사회의 크고 작은 변수들을 모두 예상치는 못한다. 그렇게 때로 큰 변수를 만나 일관성이 손상되면, 일관성을 되찾기 위한 다음 두 가지 방법을 생각할 수 있다:
1. 돌아와서 기존의 일관성을 더 오래, 더 잘 유지하여 무너졌던 과거를 희석시킨다.
2. 기존의 일관을 형성했던 여러 '언어' 중 방향성이 지나치게 구체적인 작은 것들을 버리고, 그 변수까지 포용할 수 있는 큰 것만을 남긴다. 그리고, 기존의 일관성은 다름아닌 그 큰 것이었음에 믿음을 키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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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꽤 긴 시간 동안 1. 의 생활양식을 가졌었음을 기억한다. 굳건하고 강인했고, 뚜렷이 가시화된 신념이 좋았었다. 허나, 이 생활양식은 끊임없이 "변수"들을 외면케 하고 혐오케 했다. 결국, 새로운 것들에 대한 필요이상의 보수성을 가지게 되었다.
그 후, 감당할 수 없는 몇개의 변수를 만났고, 몇 번의 굴복과 합리화를 거쳤다.
그러다가 2. 와 같은 짧은 언어로 '추구, 굴복, 합리화' 이 일련의 과정을 미화하여 정리하니, 구색좋은 철학이 되었다.
변수를 만나고, 자잘한 집착을 버리고, 본질적인 것에 대한 보다 더 큰 믿음을 가지는 철학.
그렇게 자잘한 집착들을 버리며 중요한 것만을 남기다 보면 가끔 (아직 언어로 표현하기엔 능력이 부족하나) 진리와 비슷하게 생긴 무언가를 보게 될 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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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잘한 집착을 버리는 과정을 '포기'나 '합리화'라는 단어로 밖에 표현 못했을 때는 이게 하나의 길이 될줄은 몰랐다. 그렇게 새로운 표현을 찾아내고 나면 새로운 뜻과 길이 보이게 된다.
(타 집단이나 타 국가의 언어를 공부하다보면 이런 깨달음을 자주 가지게 된다)
결국 언어란, 그저 경우에 따라 생각에 붙이는 설명일 뿐 그 자체로 긍정적이고 부정적인 건 없다.
나를 비롯한 모두가 지금보다 더 풍부한 언어를 사용하고, 그렇게 중요한 것을 많이 볼 수 있었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