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좇는다

Wire in the Blood (+Hannibal)

by XX








한니발에 대한 약간의 잡담





<데드 라이크 미>, <푸싱 데이지스>의 브라이언 퓰러가 기획과 극본에 참여한 <한니발>은 기대에 비해 실망이 컸다. 브라이언 퓰러 특유의 판타지가 가득 담긴 작품이라는 것은 알겠다. <더 헌트>의 매즈 미켈슨과 한니발은 꽤 신선한 조합이었지만, 안타깝게도 이 아름답고 고상한 드라마의 캐릭터 형성이나 극의 전개는 모두 공기 빠진 풍선처럼 강력한 아우라 없이 클리셰 언저리를 계속 맴돈다. 

<한니발>은 레퍼런스가 굉장히 많다. 원작에 대한 레퍼런스뿐만 아니라 한니발이라는 드라마를 위한 레퍼런스 또한 상당하다. <한니발>을 이해하기 위해서 섬세한 분석이 필요한 것도 이 때문이다. 레퍼런스의 중요성은 그 작업의 레이어가 얼마나 견고한지를 살피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러한 수많은 레퍼런스와 작가의 태도가 결합되어 나타나는 직관이 우리들에게 다양한 감정들을 전해주는데서 드러난다. 감상자는 작업의 밀도 높은 레이어를 통해 순간의 직관을 느끼지만, 작업자의 입장에서는 사실상 그 직관이라는 것이 만들어지기까지 단단한 성을 쌓는 과정이 필요한 것이다. 그런데 <한니발>의 레퍼런스는 마치 죽은 상징들 같다. 하나하나 살펴보면 분명 그 상징들은 고유의 촉감과 냄새, 소리와 맛을 지니고 있는데 이 상징들이 드라마 안으로 들어왔을 때, 서로 제대로 맞물리고 있지 않고 불협화음을 내고 있다. 캐릭터에도 극의 전개에도 이 상징들은 어떠한 역할도 하고 있지 않다. <한니발>의 레퍼런스들은 직관으로 가지 못한 채, 개별적인 사물들로 존재할 뿐이다. 

캐릭터는 어떤가. 내가 그들에게 몰입하기 전에 이미 드라마 자체가 그들에게 과도한 몰입을 하고 있다. 이미 드라마의 눈은 윌을 연민의 시선으로 바라본다. 드라마의 눈은 절대자의 시선이다. 그러므로 캐릭터에 대한 시선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감상자가 캐릭터를 느끼기 전에 드라마의 눈이 먼저 캐릭터를 설명하게 되면 캐릭터는 힘을 잃게 된다. 계속 윌을 평면적인 캐릭터-아름다운 존재로 묘사하는 드라마의 도취적 시선은 에피소드가 진행될수록 확장되어야 하는 윌의 캐릭터를 답보상태로 빠뜨린다. 윌의 캐릭터는 끊임없이 시험당하고 고통받는 과정들을 통해 성장해야 함에도 극의 전개와 캐릭터 모두 이미 스스로가 나르시시즘에 빠져 있어 윌의 캐릭터가 그의 민감한 감응 능력과 연약함으로 괴로워하고 끊임없이 자기 분열을 겪는 것이 전혀 안타깝지가 않다. 그들에게 연민을 느껴야 하는 것은 감상자인데, 드라마 자체부터가 스스로에게 도취되어 이미 젖어있는 것이다. 윌의 캐릭터는 아름다워야 하는 게 맞지만 드라마는 윌에 대해 아름다움만 이야기한다. 심지어 그 아름다움이라는 것도 공감하기가 쉽지 않다. 

윌의 감응 능력이라는 것이 과하게 관념적으로 표현되는 것도 문제점이다. 은유들로 가득 채워져 있지만 이 은유들이 시적 직관력으로는 도달하지 못하고 현학적인 분위기로 빠져서 텍스트에 멈춰있다. 그래서 윌의 감응이라는 것은 지나치게 초능력적이다. 윌의 감응 능력이 한니발이라는 세계관과 아무런 물질적인 관계를 맺지 않기 때문이다. 독보적이고 절대적이며 고답적이다. 어째서 과하다 싶을 정도의 은유들로 채워져 있는 윌의 캐릭터가 이렇게 단순하고 설명적인 것인가. 감응 능력은 판타지 영화에서 나올법한 마술이 아닌데도 윌의 재능에는 어떠한 인과관계도 없다. 드라마는 그것이 원래 그렇다고 얼버무리는 듯 하지만 윌의 가정사가 그의 감응 능력을 명료하게 설명해주지는 못한다. 카메라의 절제된 아름다운 연출과 (솔직히 말해서 아름다워 보이지 않는다. 극의 전개와 캐릭터, 그 어느 것과도 맞물리지 못하고 겉돌면서 아름답고 우아한 척은 한다. 잉여적이다. 데드 라이크 미와 푸싱 데이지스의 사랑스러우면서도 이상야릇한 연출은 다 어디로 갔나) 복잡한 상징들만으로도 부족하다. 캐릭터 그 자체가 스스로 극의 전개와 맞물리면서 발산해내는 힘이 윌에게는 없다. 

극의 전개는 지극히 평범하다. 드라마의 장르가 수사물이 아니라는 생각으로 본다면 에피소드마다 등장하는 다소 불친절한 사건들이 크게 불편하지는 않다. 다만 매 에피소드의 사건들과 한니발 렉터, 잭 크로포드, 알라나 블룸, 애비게일 홉스 이 모든 캐릭터들의 시선이 향하는 곳이 결국은 윌이라는 것. 드라마의 모든 것들이 과하게 윌에게 집중되어있음으로 해서 드라마의 진행이 지지부진해지고, 확장이 없다. 그래서 드라마의 극의 전개 방식이 전혀 흥미롭지 않다. 모든 것이 윌에서 시작되어 윌에서 끝난다. 캐릭터는 캐릭터 나름대로, 극의 진행은 진행 나름대로, 적당히 평행선을 유지하면서 서로 피드백을 주고받아야 하는데 모든 것들이 윌이라는 캐릭터를 위해 소모될 뿐이다. 윌과 한니발의 관계도 드라마의 윌을 향한 도취적 시선 때문에 오히려 거북하다. 개인적으로 매즈 미켈슨의 우아하면서도 뱀 같은 관능적인 분위기를 좋아하지만 이 드라마에서 한니발 렉터의 윌을 향한 감정은 내게 아무 울림이 없다. 브로맨스적 요소? 남녀관계뿐만이 아니다. 동성관계에서도 성적인 긴장감과 우정과 사랑 사이의 야릇함은 얼마든지 있다. 윌과 한니발의 관계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나, 타인과 타인이 관계를 맺을 때, 일어나는 욕망이나 온갖 잉여적인 찌꺼기들, 비참함 같은 현실에서의 더럽고 우아하지 못한 것들이 모두 제거된, 한니발과 윌의 관계가 내게는 그저 브라이언 퓰러의 판타지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브라이언 퓰러의 이전 작들을 재미있게 봤기 때문에 그만큼 기대가 컸던 것 같다. 한편으로는 브라이언 퓰러의 역량에 한니발은 맞지 않는 작품이 아니었나 생각도 해봤다. 혹은 자신의 드라마를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도저히 객관화를 시키기 어려워 아마추어적인 실수를 한 걸지도... 어쩌면 나는 브라이언 퓰러가 만든 가벼운 블랙코미디를 원했던 걸지도 모른다. 깊고 어두운 심리스릴러물을 기대한 게 아니라.  







<와이어 인 더 블러드>는 드라마 <한니발>과 캐릭터 면에서 유사한 점이 많다. 두 드라마 모두 원작이 있다는 점에서 보면, 양들의 침묵이 1988년에 출간됐고, 발 맥더미드가 87년 데뷔 이후 미스터리 물을 집필하다가 95년도에 처음으로 토니 힐 시리즈를 발표했으므로, 프로파일링이라는 측면에서는 토니 힐 시리즈가 양들의 침묵의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충분히 있지만 적어도 드라마 간에 어떤 실제적인 관계 같은 것은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리고 소설이 아닌 드라마로는 <와이어 인 더 블러드>가 시기적으로 <한니발>보다 앞서있다. 

이 두 드라마의 주인공들이 공유하고 있는 세계관의 유사함은 흡사 서로가 서로를 비추는 거울 관계로 보이는데, 특히 타인과의 관계 설정에 어려움을 겪거나, 자기 내부로 파고드는 파괴성 같은, 타 드라마에서도 볼 수 있는 일반적인 설정을 뛰어넘어, 윌과 토니 힐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감응 능력이라는 것이 각자의 드라마에서 다르게 묘사되고 있다는 점은 상당히 흥미롭다. 한니발 속, 너무나도 명백하게 스스로 드러내고 있는 우아한 스릴러물을 만들고자 하는 야심이 드라마 한니발이라는 정체성 없이, 오마주와 클리셰로 오히려 캐릭터와 극의 구성을 단순하게 만들었다면, 와이어 인 더 블러드는 그러한 드라마를 만들기 위한 과정이 드라마 속 여러 요소들과의 맞물림을 통해 느리지만 섬세하게 짜인 직물처럼 구체화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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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의 눈






와이어 인 더 블러드는 변사체의 발견을 시작으로 드라마의 시점을 범죄자의 행적 혹은 정교한 살인과정과 수사과정으로 나누어서 극을 전개해나간다. 일정한 호흡 속에서 인물과 사건에 대한 감정이 배제된 시선으로 묘사되는 이 병치 구조는 응시의 대상을 살인마뿐만 아니라 경찰과 기자 그 외의 인물들로 확장시킨다. 일반적인 수사물에서 바라봄을 당하는 대상, 표적물이 범죄자뿐이었다면 와이어 인 더 블러드는 모든 인물들을 관찰의 대상으로 삼는다. 살인마의 행적, 사람을 죽이는 과정, 놓인 변사체들, 하나 둘 늘어나는 변사체의 숫자들 앞에서 무능하고 무기력한 경찰들은 마치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듯 적나라하게 노출되면서도 극의 전개는 그것에 가까이 다가가지도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설명하려 하지도 않는다. 관찰-집중과 관조-분산으로 인해 살인마의 정체와 살인마가 계속 살인을 저지르는 이유, 원점에서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하는 경찰들의 모습은 모두 조각난 퍼즐처럼 산산이 흩어져있다. 사건, 증거, 범인 이 모든 것들의 속성은 드라마의 배경이 되는 가상의 도시 브래드 필드의 뿌옇고 축축한 안개처럼 불확실성을 띤다.

이러한 불확실성 속에서 인물들은 제각각 각자의 이해관계에 따라 움직이며 대립한다. 이 순간, 조용히 느리게 응시하던 카메라의 눈이 노골적인 시선을 취하기 시작한다. 끔찍하게 난도질당한 변사체뿐만 아니라 살아있는 이도 발가벗기고 그 나체의 몸을 관찰하는, 어떤 집요함이 조용한 응시 속에 숨어있다. 모호함을 한 꺼풀 벗고 관음증적인 집요함을 드러내는 시선은 이들의 관계 속에 얽혀있는 도착적이고 자폐적인 욕망을 포착한다. 자신의 뒤틀린 환상을 살인을 통해 채우는 범죄자들, 권력욕과 편견, 아집에 휩싸여 서로가 서로를 믿지 못하거나, 서로를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하는 경찰국 사람들과 타자와의 교감에 실패하고, 일방적인 관계를 통해서만 만족감을 얻는 주변인들 모두 정서적 교감의 불능에 빠져있다. 

표면적으로 수사물의 법칙을 따르고 있는 이 드라마 속 살인마와 피해자, 경찰, 그 밖의 인물들은 각각이 바다 위에 홀로 떠 있는 섬과 같다. 집단적인 소속감이나 유대감 없이 모두들 영영 서로의 거리를 좁힐 수 없는 피상적인 관계망 안에서 각자가 볼 수 있는 것만을 본다. 때문에 동질감을 느끼지 못하는 인물들의 건조하고 서늘 한 관계는 흡사 범죄자의 살인행위와도 닮아있다. 자기만의 방식대로 타자와의 관계 형성을 시도하지만 번번이 실패하는 것으로부터 어떤 파괴적인 인간의 유형 같은 것을 우리들은 살인행위와 살인행위를 쫒는 것 모두에서 보게 되는 것이다. 범죄자를 잡아도 해소되지 않는 허탈함은 수사물의 전형적인 카타르시스보다 패배한 인간들의 음울하고 절망적인 미래상에 더 가깝다. 사실상 이 드라마에서 범죄자를 잡았는지의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매 에피소드의 결말은 범죄자가 가지고 있는 인간적인 결함이 범죄자가 아닌 경찰, 기자 그 밖의 모든 인물들에게도 마치 전염병 마냥 퍼져있음을 암시할 뿐이다.

드라마는 연쇄살인마에게 동정의 시선도, 면죄부도 주지 않는다. 하지만 결말의 허탈함은 살인마를 역겨움이나 두려움 그리고 연민이라는 양가감정의 잔상 같은 이상야릇한 여운을 만들어낸다. 이는 와이어 인 더 블러드의 독특한 이중 감정으로부터 비롯된다. 감정이 배재된 눈과 관음증적인 눈을 오가며 등장인물들을 냉소적으로 바라보는 시선이, 살인마-괴물의 심연 속을 들여다보는 주인공 토니 힐의 프로파일링과 맞물리면서 우리들은 살인마에게서, 그 어떤 동류의 감정도 느끼지 못하지만 한편으로 가장 인간적이라고 할 수 있는 본질 또한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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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니 힐





위에서 언급했듯이 극의 전개 속에서 살인마와 살인행위는 파편적으로 보일 뿐, 그들이 누구인지, 왜 계속 사람을 죽이고 있는지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사실'이라고 할 만한 정보를 드라마는 드러내지 않는다. 우리들이 알게 되는 살인마의 트라우마나 살인 동기, 살인마와 피해자와의 유기적인 관계 같은 것은 경찰들의 수사과정에 의해서가 아닌, 토니 힐의 단독적인 프로파일링으로부터 얻어진 결과물이다. 토니 힐의 프로파일링은 상대방을 완벽하게 이해하여 그 대상 자체가 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 과정에서 토니 힐은 살인마처럼 생각하고 말하며 때로는 발견된 변사체와 같은 자세를 취해보거나, 신문지를 입 속에 가득 구겨 넣은 상태에서 비닐봉지를 얼굴에 씌어 질식하기 직전까지의 실험을 통해 피해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직접 몸으로 느껴본다. 왜 어떤 방식으로 피해자가 죽었고, 그래서 살인범이 누구인가에 대한 프로파일링 과정은 변사체 혹은 변사체가 발견된 장소를 관찰하고 피해자의 가족, 주변 인물들로부터 얻은 단편적인 정보에 의한 토니 힐의 해석과 상상으로 구성된다. 때문에 해석과 상상에 의해 살인마의 내부로 들어가는 토니 힐의 프로파일링은 마치 그가 살인마에게 도취된 듯한 인상을 풍긴다. 빈 의자를 마주 보고 앉아 자리를 바꿔가며 상상 속의 살인마와 가상의 대화를 하는 모습이나 자폐적인 욕망에 사로잡힌 살인마의 환영이 캐롤, 알렉스 앞에서 토니 힐의 음성으로 재현되는 듯한 야릇한 장면들은 살인마와 완벽하게 동화된 듯한 토니 힐의 비정상적인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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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니 힐의 이러한 모습은 그와 살인마와의 관계에서 더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토니 힐의 면담 환자였던 매기 토마스, '목소리'에게 조종당했던 데릭 타일러, 죽은 남편의 연쇄살인을 재현하는 앤 쉐클리, 악마로 태어나지 않았지만 구원받지 못했던 악의 씨 로렌스 제임스, 아이의 고통을 통해 관심을 갈구하는 셀레스트, 성장과정에서 지속적으로 경험한 익사의 공포와 억압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오직 살인행위라는 환상 속에서만 자신의 힘을 확인하는 매튜 등 토니 힐은 이들 범죄자들과 아주 짧은 순간 혹은 오랜 시간을 통해 교감을 나눈다. 그들의 범죄는 어떤 식으로도 용납이 될 수 없지만, 살인마도 다른 평범한 사람들처럼 자신을 이해해줄 존재를 찾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들의 목소리를 토니 힐이 들을 수 있고 그들과 교감한다는 점이 범죄자를 지극히 인간적인, 연민의 대상으로 만든다. 현실세계에서 정상적인 인간관계를 형성할 수 없는 이들은 학대받았거나, 소외되어있고, 타자의 목소리를 결코 들을 수 없다는 점에서 고립된 존재들이다. 이들은 오로지 자신의 목소리만 들을 수 있고, 자신의 목소리가 만든 환상이 가리키는 곳만 본다. 간혹 잭 반스나 윌리엄 매카담, 제프리 마컴같이 자신의 목소리뿐만 아니라 타자의 목소리도 가질 수 있다는 오만과 교활함으로 타자를 이용하는, 영악하고 수완이 좋은 살인마들도 있지만 드라마에 나오는 범죄자들은 대체로 눈에 띄지 않고, 아주 평범하며 내세울 것 하나 없는 외로운 인물들이다. 그래서 토니 힐에게 이들은 단순히 역겹고 끔찍한 살인마가 아니라 상담과 치료가 필요한 존재들이며, 때로는 그것을 넘어서서 토니 힐이 그들을 대하는 방식을 보노라면 그들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투영해서 바라보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도 든다. 자신이 심리학자가 된 것이 처음에는 다른 사람들을 연구하기 위함이 아닌, 스스로를 치유하기 위해서였다는 토니 힐의 말처럼 그의 안에도 잠재적인 살인마 기질이 있어 그들을 남들과 다른 시각으로 볼 수 있는 게 아닌가 하는 것이다. 토니 힐이 매튜에게 한 말 "널 이해한다 “ 는 그 상황을 모면하기 위한 것이나 익사당한 다른 실험 심리학자처럼 인간을 실험대상으로 바라보는 위선적인 태도에서 나온 말이 아니었다. "진정으로 너의 그 고통을 나는 느낄 수 있다"는 토니의 간절함은 인간 대 인간으로서 매튜가 가지고 있는 그의 분노를 이해한다는 의미였을 것이다. 

그가 살인마들을 이해하는 것, 즉 그들에게서 닮음을 느끼는 것은 살인마들이 가지고 있는 유년시절의 트라우마가 살인을 유발하는 기폭제가 되었듯이, 망상증 환자였던 자신의 어머니에 의해 형성된 토니의 트라우마 때문일 수 있다. 그것은 어떻게 그가 그토록 심리학에 능한 것인지에 대한 약간의 설명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토 니 힐이 범죄자뿐만 아니라 범죄자에 의해 혹은 부모에 의한 학대나 폭력으로 낙인 같은 트라우마가 형성된 아이들에게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이들이 받은 상처가 이들을 잠재적인 범죄자로 만들게 되는 어떤 악습의 고리를 끊어내고자 하는 시도와도 같다. 

그 이유가 어찌 됐든 간에 어쩌면 토니 힐의 집요한 프로파일링은 어쩌면 범인이 아닌 자신 스스로를 향한 것일지도 모른다. 사이코 패스가 지배와 복종의 관계에서 지배의 역할에 몰입하여 자신의 욕망을 자폐적으로 실현해나가는 것처럼 토니 힐의 프로파일링 또한 가상의 존재하고만 관계를 맺으면서 상상 속의 살인마를 실체화시키는 자폐적인 성향이 강하기 때문이다. 그는 보통 물리적 증거라고 부르는 것들을 믿지 않는다. 목격자나 물리적 증거는 현실세계에서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합리적인 지표이며, 그만큼 현실세계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지만, 와이어 인 더 블러드의 몇몇 에피소드에서 알 수 있듯이, 명확한 증거물은 오히려 진범이 아닌 다른 사람을 가리키고, 엄청난 오해에서 비롯된 목격자의 진술은 수사과정의 방향을 전혀 다른 방향으로 바꾸어놓기도 한다. 이러한 현실세계의 지표를 따라가지 않고 토니 힐은 오로지 변사체와 장소 같은, 말하지 않으며, 살아있는 것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죽은 흔적을 관찰, 해석하고, 주변인들의 진술을 의심하는 과정을 겪으면서 이윽고 자신과 자신과의 자폐적인 만남을 통해 살인마를 만난다. 토니 힐이 살인마의 마음속을 들여다본다는 것은 결국 토니 힐 자신의 마음속을 들여다보는 것과도 같은 것이다. 토니의 프로파일링과 살인행위는 서로 대치점에 놓여있음에도 이들의 기저에 깔린 본질은 외부 세계의 실체 없이 완성된다는 점에서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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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드라마 속 살인마들이 성불구자이거나 여자와 제대로 된 관계를 맺지 못하는 것처럼 토니 힐도 이성 관계에 있어서 비슷한 문제점들을 안고 있다. 캐롤 조던과의 관계를 묘사하는 방식은 그중에서도 가장 흥미롭다. 둘 간의 대화가 오가는 동안 공간의 기류가 미묘하게 달라지고, 얼굴이 클로즈업되면서 표정에서 드러나는 미세한 감정 변화가 섬세하게 표현되면서도 이들의 관계에는 어떤 본질적인 한계가 있음이 암시된다. 시즌 1, 3화에서 늦은 밤 토니의 집에서 둘 간의 대화가 이루어지는 장면이 특히 인상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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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니 힐은 캐롤에게 한밤중에 전화를 걸어 사건과 관련된 기록물을 다시 확인하고 있는 중이라고 말한다. 연인과 함께 누워있던 캐롤은 "가서 도와줘요?"라고 묻는데, 토니 힐은 긍정도 부정도 아닌 그러고 싶으면...이라는 애매한 반응으로 본심을 숨긴다. 이 둘은 분명 서로에게 강하게 끌리고 있지만 그 감정을 받아들이고 드러내는데 있어서는 다른 태도를 보인다. 정도가 다를 뿐 모든 관계는 지배와 복종으로 이루어진다는 토니 힐의 말에 캐롤이 그를 향한 감정을 숨기지 않고, 자신과 토니 힐의 관계에 대해 묻는 것으로 표출한다면, 토니 힐은 굴복당하기 않기 위해 상대를 굴복시키는 싸움이라는 대답으로 자신에게 다가서는 캐롤에게서 한 걸음 물러난다. 사이코패스 안젤리카 베인과의 관계에서 지배의 위치에 서 있었던 모습과는 대조적이다. 하지만 토니와 캐롤이 대화를 주고받으면서 그들의 얼굴이 점점 클로즈업되는 장면은 성적인 긴장감으로 가득하다. 그리고 이 순간 토니는 캐롤에게 가까이 다가갈 듯 말 듯 멈칫멈칫하며 마치 그녀에게 키스를 갈구하는 듯한 표정으로 캐롤을 바라본다. 그의 얼굴에서 캐롤에 대한 욕망을 읽는 것은 너무나 쉽다. 그럼에도 토니가 캐롤을 원하는 것은 자폐적인 환상 안에서만 가능할 것이다. 이는 토니 힐이 대학 동창과 다시 재회한 에피소드에서 더 구체화된다.

이 에피소드에서 토니 힐은 10년 전 처음으로 그가 경찰과 협력하여 해결한 사건이 그 당시 그가 지목한 범인 제이슨 에글리가 가석방으로 풀려나면서 다시 검증받게 되는 상황에 직면하게 되는데, 10년 전의 사건에서 나온 DNA가 제이슨 에글리의 것이 아닌 것으로 판명되면서 그는 그가 일적으로 쌓아온 모든 것이 한순간에 바닥으로 추락하는 과정을 겪게 된다. 그런 상황 속에서 토니는 동창 카렌 버먼을 20년 만에 대학 동창회를 통해 다시 만나게 되지만 그날 밤, 카렌과의 섹스는 실패로 끝난다. 토니는 다음 날 카렌에게 말한다.


"난 재난구역이야. 일하면서 했던 모든 게 미디어 현미경으로 검증받으려고 하고 있어.… 지킬 건 아무것도 없어. 단순히 직업이 아냐. 나라는 존재지. 다른 누군가를 위한 방이 내겐 없어."


토니에게 있어 임상심리학자로서 하고 있는 일, 경찰과 함께 일하면서 범죄자를 프로파일링 하는 모든 것들은 단순히 직업이 아니라 그가 그의 존재를 증명해낼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일반적인 사람들이 타자와의 정상적인 관계 맺음을 통해 에너지를 만들어내고 소모시킨다면 토니 힐은 그의 모든 에너지를 그의 자폐적인 프로파일링에 쏟아붓는다. 그는 자신의 직업으로 얻게 되는 성취감을 통해 그가 다른 사람들처럼 해내지 못하고 얻지 못하는 행복을 대신 보상받는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것들이 의심받고 무너지기 시작했을 때, 토니에게는 남아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그는 그가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일, 사건을 생각하고, 범죄자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일을 통해 모든 이들과 관계를 맺는다. 그 관계라는 것도 공적인 영역 안에서만 유효하다. 관계가 공적인 일이 끝남과 동시에 단절되면 남은 시간을 그는 집에서 툼 레이더 게임을 하거나, 범죄자와 면담을 하는 것으로 보내며, 심지어 사적인 시간마저 범죄자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차서 프로파일링에 매달린다. 토니의 연인이 자기만족적인 환상 속의 상상 속의 존재라면 캐롤과 카렌은 실체적인 존재들이다. 실체적인 세계와 실체적인 존재들을 포용하기에 토니의 자의식은 너무나 거대하고 그 자체로 자기만족적이다.







인어의 노래   







내 머리를 뒤로 갈라 볼까? 감히 복숭아를 먹어 볼까?

흰 플라넬 바지를 입고, 해변을 걸어 보겠어.

나는 인어들이 노래하는 것을 들었다, 서로서로에게.

나는 그들이 나에게 노래해 주리라고는 생각치 않는다.

나는 그들이 파도를 타고 바다 쪽으로 나가는 걸 보았다

바람이 바닷물을 흰색 검은색으로 불어댈 때

파도의 흰 머리칼을 뒤로 불어 넘겨 빗질하면서.

붉은색 갈색 해초로 화환을 두른 바다 소녀들 옆에서

우리는 바다의 방들에서 머물렀었다.

인간의 목소리들이 우리를 깨울 때까지, 그리고 우리는 익사한다.

-T.S 엘리엇 [J. 알프레드 프루프록의 연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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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토니 힐이라는 캐릭터는 좀 더 복잡하고 다면적이며 중의적이다. 토니에게는, 사람들과의 관계가 원만하지 않고, 매주 목요일마다 살인마를 만나러 가며, 집에 돌아와서 정장 차림으로 소파에 앉아 툼 레이더 게임을 진지하게 즐기는 어떤 사회 부적응자의 모습뿐만 아니라 과시하는 것을 좋아하고, 요령이 좋아 쉽게 타인들의 주목을 끌어 자신에게 집중된 관심을 즐기며, 이익에 따라 위선적인 태도를 취하는 사람에게는 꽤나 짓궂은 태도로 대응하는 유아적인 모습 또한 존재한다. 적당히 가볍고 여자들에게 둘러싸여 농담 던지기를 좋아하는 남학생 고든을 매번 바람 맞히거나, 캐롤이 사고를 당해 자리를 비운 틈을 타 서장의 눈을 의식하며 승진의 기회를 노리는 케빈에게 "자네가 날개를 펼치는데 옆에서 걸리적거릴 순 없지" 라며 빈정거리는 토니의 태도에서 토니가 이런 부류의 사람들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 수 있다. 그의 이러한 성향은, 연쇄살인마였던 자신의 과거를 과시하며 그 시절의 영광을 재현하고자 하는 윌리엄 매카담이 연쇄살인마의 다음 표적이 될 것임을 깨닫고 경찰서에 전화를 걸지만 곧 말없이 끊고 묵인함으로써, 알면서도 그의 죽음을 방관하는 살인방조로까지 이어진다.

이러한 토니 힐의 섬뜩한 모습은 때로 종교가 가지고 있는 신비하고 미신적인 힘을 경계하는 임상 심리학자이자 과학자로서의 냉철한 면모로 드러나기도 한다. 실제로 그의 프로파일링은 그의 다소 기벽적인 행동 때문에 살인마의 마음속을 들여다보는 일이 온전히 직관에 의해 완성되는 것으로 착각되기 쉽지만, 그는 어디까지나 객관적이고 반복 가능한 관찰에 근거하여 단계를 밟아나간다. 그 대상이 물리적 증거나 목격자의 진술이 아닐 뿐, 그의 직관은 언제나 객관적인 대상을 집요하게 관찰하고 분석하여 추론된 정보를 기반으로 한다. 폴라가 위장 잠입 수사를 하다 납치되자 경찰들은 분별력을 잃고 범인이 아닌 폴라의 거처를 찾는 일에 모든 전력을 집중시키지만, 이것이 범인이 의도했던 혼란과 공포임을 경고하면서 시야를 넓게 보고 폴라가 아닌 범인을 생각해야 한다고 조언하는 그의 모습에서도 냉정하게 사건을 관찰하고 분석하는 태도를 엿볼 수 있다. 그의 태도는 살인마와 동화된 듯한 그의 프로파일링이 범인을 찾기 위한 수단임을 우리에게 환기시키고, 자폐적인 상상 속의 토니 힐을 현실세계의 존재로 다시 끌어낸다. 토니 힐은 현실 속에서 튕겨나간 사회 부적응자가 아니다. 비록 많은 애로사항이 있지만 그는 임상 심리학자이자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수로서 그의 역할을 충분히 인지하고 현실을 살아가고 있는 인물이다. 이는 그가 살인마가 아닌 심리학자가 된 결정적인 이유가 된다. 토니 힐은 살인마와 교감하면서도 그들의 광기를 경멸하고, 그들과 함께 많은 시간을 보내면서도 그들과 적정한 거리를 유지한다. 검시가 끝난 변사체의 전신 위로 아무렇게나 덮인 하얀 천을 다시 가지런히 정리하거나 피해자의 가족을 위로하고 아이들을 다정하게 대하는 토니의 공감능력은 낯설 정도로 평범하다.

그럼에도, 토니가 윌리엄 매카담의 죽음을 알고도 방관했듯이 그의 모습은 가장자리에 아슬아슬하게 서서 분열을 겪고 있는 것처럼 불안하다. 불확실하고 변덕스러운 세상에서 토니 힐이 유일하게 확신을 가지고 의지하는 그의 프로파일링은 자폐적이기 때문에 훌륭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런 이유로 빗나간 판단, 실패로 끝나기도 하고, 뇌종양 진단을 받은 후, 무신론자인 그는 삶의 우연성과 필연성 사이에서 절망하다 성당에 찾아가 기도를 하며 한없는 두려움과 나약한 인간의 불완전성을 드러내기도 한다. 그리고 마침내 마이크와의 싸움에서 이긴 토니 힐의 허탈한 표정의 얼굴이 클로즈업되면서 드라마가 끝날 때, 이 마지막 장면이 전달하는 모호한 감정들을 맞닥뜨리는 순간 우리들은 다시 드라마의 응시로 되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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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토니 힐의 허탈한 표정은 자신이 볼 수 있는 것만을 보며 타자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는 모든 인간들의 태생적 한계를 암시한다. 토니 힐의 응시를 통해 우리들은 어떤 희망을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는 실패했고, 드라마의 냉소적 시선은 결국 그 누구도 인어의 노래를 들을 수 없는 불쌍한 인간들을 가리키고 있다. 살인마도, 살인마가 아닌 이들도 모두 타자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기 때문에 인어의 노래도 들을 수 없다. 타자의 목소리이자 인어의 노래는 우리들이 도달할 수 없는 저 너머의 관능적이고 아득한 꿈일 뿐이다.

토니 힐의 응시, 감응이 안타까운 것은 그가 양극단을 오가며 피해자와 범죄자를 끌어안고 모든 인물들을 이해하고자 함에도 결국 그 또한 인간적 한계에 갇혀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어떤 부분은 이미 인간적 한계를 초월한 것 같이 보이기도 한다. 그는 다시 그의 집으로 되돌아갈 수 있을까. 아니면 인어도 아니고 인간도 아닌 반인 반어들이 우리들에게 손짓하고 있는 저 바다로. 노래가 들린다는 착각에 익사하는지도 모르고 잠에 취하듯이 서서히 죽어갈까. 토니의 응시는 길을 잃은 듯 서글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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