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좇는다

케빈에 대하여

by XX






<케빈에 대하여>는 섬세하고 예민한 영화다. 시간순서대로 구성되지 않은 탓에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예상치 못한 장면들과 사운드, 사물의 미세한 움직임, 영화에서 계속 반복되는 붉은 이미지(물감 혹은 페인트 혹은 잼, 토마토 축제 등등)들은 불안의 징후를 상징하며 영화가 전달하고자 하는 심리적인 긴장감을 표현하는데 있어 공간이나 인물들의 대사, 스토리라인에 의존하는 게 아닌, 일상 속 사물, 상황 등의 예민한 관찰을 통해 어떤 심리적인 요소를 포착한 뒤 이것을 영화상의 이미지로 옮겨놓는다. 이는 영화의 초반 에바의 출산장면에서도 알 수 있다. 아주 잠깐 스쳐지나가는 출산장면을 차지하는 얼굴들의 이미지는 왜곡되고 일그러져있다. 매우 엽기적이다. 마치 에바의 운명을 미리 예견이라도 하듯 영화에서 케빈의 탄생은 이미 축복보다는 악몽에 가깝다.


이 영화에서 에바와 케빈의 관계는 가장 중요한 핵심이다. 악마 같은 아이와 그런 아이가 혐오스럽고 참을 수 없는 엄마. 우리들은 끊임없이 생각하고 원인을 찾으려고 할 것이다. 뭐가 문제지. 근본적인 원인은 뭘까. 누구의 잘못이지. 계획적이지 않은, 갑작스러운 잉태가 잘못인가. 아이를 낳기 전의 자신의 삶을 그리워했던 에바의 문제일까. 공사판 한 가운데서 유모차에 태운 아이의 울음소리를 드릴소리로 막아버린 에바의 문제일까. 아님 이미 태어날 때부터 악마였던 케빈이 문제일까. 에바가 왜? 라는 질문을 가지고 케빈의 입장에서 케빈과 대화를 시도하려고 했다면 이런 끔찍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까. 수많은 물음들이 뒤따른다.


흔히들 말하는 아이는 부모의 거울, 부모를 보면 아이를 알 수 있다 등의 매우 보편적이지만 한편으로는 일반화의 가능성이 농후한 문구들이 있다. 하지만 아이의 정서적인 안정감은 분명히 가정환경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는 것이 사실이고, 설령 선천적으로 정신적인 결함을 안고 태어났다 하더라도 부모의 지속적인 관심과 치료에 따라 정상적인 생활을 유지하는 아이들이 있다는 점은 아이로부터 부모가 절대 자유로울 수 없음을 보여준다. 에바가 케빈을 대신해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받는 멸시와 조롱을 견뎌야 하는 것은 케빈이 그녀의 아이이기 때문이다. 아직 엄마로서 준비가 안 된 그녀가 아이를 낳은 시점부터 그녀가 원하든 원하지 않았든 간에 엄마란 존재는 아이에 의해서 죄인의 삶을 살거나 존경받는 삶을 살거나 둘 중 하나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엄마의 삶이 강요될 수 있는 걸까. 엄마는 자신의 아이를 무조건적으로 사랑해야 할 의무가 있는가. 어째서 엄마의 모성애란 이토록 당연하게 여겨지고 있는 걸까. 좀 더 잔인하게 말하자면 사실 우리가 알고 있는 엄마의 모성애란 엄마의 역할에 익숙해지는 것일 뿐, 절대적인 사랑의 형태는 실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우리들이 에바의 문제인지 케빈의 문제인지 원인을 찾는 것도 분명 누군가는 잘못을 했을 것이라는 확신에서 나온 것일 테지만 만약 에바와 케빈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니라고 하면 어떨까. 에바는 케빈을 단 한 번도 사랑하지 않았을 뿐이고, 케빈은 그런 엄마에게서 태어난, 운이 없었을 뿐이라고. 케빈이 어떤 정신적인 결함을 타고난 것이든, 폭력과 결핍 등의 트라우마로 인한 후천적인 문제를 가지고 있든 간에 우리가 대화해야 할 것은 잘못을 한 사람을 가려내는 것이 아니라 왜 우리는 나의 자식을 선택할 수 없고, 나의 부모를 선택할 수 없는지에 대해, 이 비극적인 사실에 대해 조금 더 이해할 필요성에 대한 것이 아닐까. 단지 나의 유전자를 가졌다고 해서 내가 선택하지 않은 아이를 무조건적으로 사랑하라는 것은 어찌 보면 매우 잔인하고 비현실적인 강요가 아닌가하고 말이다. 익숙하지 않고 낯설은 이 아이의 모습이 엄마에게 완벽한 타인으로 보일 수 있다는 것. 그래서 우리들이 타인과 관계를 맺을 때, 의심하고 또 의심하며 불신의 벽을 허물고 신뢰를 쌓는 것처럼 엄마와 아이와의 관계도 이러한 수순이 필요할지 모른다.


가족은 결코 완벽하고 견고한 관계가 될 수 없다. 엄마가 아이를 낯설어하고 늘 자신의 모성애를 시험받는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면서 아이를 양육하는 것처럼, 그리고 때로는 죽이고 싶을 정도로 아이가 미울 때도 있고, 너 같은 거 낳지 말았어야했다고 아이에게 마음 속 뿐인 말을 직접 입으로 쏘아주고 싶을 때도 있는 것처럼, 우리는 가족이라는 관계를 지켜내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필요로 한다. 그러는 와중에 간혹 에바와 케빈의 비극이 생기곤 한다. 아이를 사랑할 수 없었던 엄마와, 그런 엄마를 원망하고 증오할 수 밖에 없는 아들. 이러한 관계를 우리들은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케빈와 에바에게는 대화가 필요하지 않다. 그들에게는 충분한 대화와 소통을 할 수 있었던 시간이 이미 있었다. 마지막 장면에서 케빈을 향한 에바의 한 마디는 2년간 끊임없이 그 과거의 고통을 계속 마주하며 견뎌냈던 그녀가 마지막으로 그에게 건넬 수 있는 유일한 물음이었을 것이다. 그것은 대화의 형식이라기보다는 그 기억의 순간들을 다시 짚어나가며, 자신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며, 자신이 겪었던 그리고 앞으로도 겪어야 하는 상황에 대해 침착하게 2년 동안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졌던 그녀가 그녀의 아이에게 해줄 수 있는 유일한 한 마디가 아니었을까 싶다. 그녀 입장에서는 아이의 대답이 무엇이건 그건 이미 상관이 없는 것이다. 그들의 포옹은 희망이라기보다는 어떤 체념의 것에 더 가깝다. 마치 너는 왜 나의 아이로 태어났고, 나는 왜 너의 엄마로 선택되어졌을까. 소용없는 질문을 이들은 허공에 던진다. 엄마는 엄마이기에 이 고통의 시간을 견뎌야하며, 아이는 자신의 엄마이기에 그토록 증오하면서도 엄마를 놓을 수 없다. 이들의 비극은 그게 그저 그렇게 선택되어졌을 뿐이라는 것이다. 서로가 다른 아이, 다른 엄마를 가졌었다면 이런 비극이 어쩌면 없었을지도 모른다는 헛된 희망과 함께.


케빈에 대하여 이야기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은 이미 에바와 케빈의 관계에서 더 이상 대화를 필요로 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음을 의미하는 것 아닐까. 마치 끊임없이 원인에 대한 답을 찾기를 원하는 우리들을 향해 영화의 제목은 그것이 답을 찾지 못하는 이유임을 상기시켜주고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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