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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폴: 오디어스와 환상의 문-잔혹동화

by X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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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심한 잔혹 코드-마더구즈는 애초에 별생각 없이 전해 내려오는 내용이라고 하지만 이 잔혹함이 과연 현실과 전혀 무관한 것인가에 대해선 좀 더 생각해봐야 할 여지가 있다. 나긋한 동화를 통해 역으로 전해지는 이 현실의 잔혹함은 절대 단순하지도 않고 가볍지도 않다. 때문에 <더 폴: 오디어스와 환상의 문> 은 영리한 영화다. 유치하고 제멋대로이며 난해하지만 그게 끝이 아님은 어린아이 같은 순수한 동화 같은 이야기의 본질이 이렇게 잔인할 수도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위에서도 말했지만 이 영회는 난해하다. 카메라의 시선은 전지적 위치가 아닌 3인칭 관찰자에 불과하다. 마치 조각이 분해된 것처럼 이야기 진행이 원활하지 않고, 묘사가 한정적이기 때문에 영화를 끝까지 봐야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다. (여기서 스토리를 미리 접하고 영화를 감상하는 것은 제외시켜두자. 난 영화를 보기 전에 그 영화에 대한 정보를 찾아서 보지 않는 편이니까) 심지어 남자가 아이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는 시도 때도 없이 변한다. 아이와 남자가 개입하는 이야기의 시나리오는 밖에서 들려오는 대화와 이야기의 안에서 진행되는 이야기가 섞이고 또 섞이면서 예측할 수 없게 된다.


이 영화에서 가장 알 수 없는 사람은 아이-알렉산드리아에게 이야기를 해주는 남자다. 이 남자-로이는 사실 사고로 하반신이 마비된 스턴트맨이다. 그런 그가 알렉산드리아에게 이야기를 해주는 이유는 죽기 위해서이다. 과다 모르핀 복용으로 자살을 하려고 하지만 알렉산드리아는 그저 무료한 병원 생활 속에서 그의 이야기를 더 듣기 위해 왜 로이가 그 약을 가져오라고 하는 것인지 이유도 모른 채 그의 부탁을 들어준다.

죽기 위해 이야기를 들려주는 남자와 해맑게 웃는 아이의 광경은 기묘하다. 절망적인 눈빛으로 아이를 몰아세우며 약을 가져오라고 강요하는 로이가 안타까운 것은 그의 희망이라는 것이 오로지 죽음뿐이기 때문이다. 아이에게 상처 주고 싶은 마음도 주고 싶지 않은 마음도 없고, 그에게 목숨을 담보로 하는 보잘것없는 스턴트맨으로서의 결말은 떠나버린 여자와 평생을 휠체어에 의존해야 한다는 사실밖에 남아있지 않다. 그 누구와도 공유할 수 없는 그만의 참담한 고통이 그가 죽어야 해방될 수 있게끔 만든다.


이들의 이야기는 어둡고 습한 병원과는 대조적으로 붉고 푸르고 노란, 원색의 색감과 몽환적인 분위기로 이루어져 있다. 병원의 약 냄새는 제거되고, 멋있게 말을 타는 주인공과 오디우스를 죽이기 위해 모인 사람들이 모험을 떠난다. 어느 순간에는 알렉산드리아도 가면을 쓰고 깜찍한 꼬마 총잡이로 등장한다.


개연성 없는 난해한 이야기와 현실과의 접점은 찾기 힘들다. 하지만 동시에 중요한 의미를 갖는 이유 또한 현실과의 간극 때문이다. 로이는 멋진 옷을 입고 멋진 말을 타는, 스턴트맨이 아닌 영웅이며,

현실에서 로이의 여자 친구를 빼앗아간 잘 나가는 영화배우-오디우스, 나쁜 악당을 죽인다. 현실에서 가질 수 없었던 주인공 역할을 로이는 가졌다. 그리고 알렉산드리아는 자상하고 따뜻한 아빠를 얻었다. 알렉산드리아의 현실은 답답한 병원과 아빠의 부재, 늘 따르던 간호사의 섹스 장면의 목격이다. 사랑을 나누는 의사와 간호사가 나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알렉산드리아에게는 이 모든 것들이 비정하고 자기에게서 등을 돌린 악당이 돼 버린다. 그리고 아빠의 부재를 알렉산드리아는 이들의 이야기를 통해 되살린다. 존재하지 않는 사람을 환상을 통해 존재하게 만드는 알렉산드리아는 어쩌면 이 영화에서 제일 불쌍한 아이다. 적어도 로이는 자기의 비참한 현실을 인식하고 자살을 결심했다. 단지 죽기 위해 들려주는 이야기가 로이에게는 어느 순간, 욕구의 비틀린 대리만족이었을지 모르지만, 알렉산드리아에게는 또 다른 현실 그 자체였다. 즉, 알렉산드리아는 현실과 허상을 혼동하고 그것들을 뒤섞어버린다. 환상의 문으로 들어가는 원색의 이야기가 잔인한 이유가 바로 여기 있다. 악의 없는 순수함은 그래서 더 비극적이고 더 잔혹하다.


현실과 허상의 경계에서 헤매는 로이는 우리와 닮아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현실에 한 발을 걸치고 허상을 꿈꾼다. 하지만 이루어질 수 없는 비참한 꿈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로이처럼 우리는 소리 없이 운다. 알렉산드리아는 울지 않는다. 이 아이에게 현실은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날 수 있다. 현실의 정의가 정확하지 않기에 어떠한 모습으로든 보일 수 있는 것이다. 우리에게 비극적이고 잔혹하게 비추어지는 알렉산드리아의 현실이 과연 알렉산드리아에게도 같은 무게의 비참함인가에 대해 절대 쉽게 답을 내릴 수 없는 이유 또한 여기 있다. 그 여리면서도 단단한 감성에 우리는 끼어들 여지가 없으며 정의를 내릴 수도 없다.


꿈과 현실을 오가는 이 영화를 치유의 과정과 희망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다. 영화를 보고 판단하는 것은 관객들의 몫이다. 그만큼 다양한 시선들이 존재하고 영화를 통해 풀어낼 수 있는 이야기들은 무한대이다. 나에게 이 영화는 일종의 잔혹동화다. 순수하지만 또한 비극적인. 이 잔혹동화는 모든 사람들에게 존재한다. 비정상적으로 팽창되거나 뒤틀리고 하늘을 날아다니다가 추락하지만 사라지지는 않는다. 사람들은 상상하는 동물이니까. 정상인을 구분 짓는 경계선은 무엇일까. 우리는 모두 과대망상증 환자와 다름없다. 꿈꾸지 못할 것들을 자신들 만의 동화 속 이야기에 구겨 넣고 허상의 상상 속 도서관에서 위안을 얻는다.


이 영화의 스토리는 굉장히 단순하다. 그래서 영상미(장소 섭외에 17년, 그리고 촬영만 4년 반. 엔딩 크레딧의 각국의 로케이션 스텝들의 굉장한 명단들을 보시라)에 감탄하고 빈약한 스토리에는 아낌없는 비난을 던지는 사람들이 많지만 글쎄.. 취향으로 단지 치부하기에는 단순히 읽히지 않는 의미들이 이 영화에 상당하다고 난 생각한다. 영화 <메멘토>또한 스토리는 매우 단순하나 굉장히 복잡하면서도 독특한 구성 방법을 가지고 있다. 표현 여부를 달리 진행시켰다고 해서 담고 있는 의미의 무게까지 가벼워지는 것은 아니다.





이 영화에서 데이빗 핀처와 스파이크 존즈는 제작자로 참여했다. 감독 타셈 싱은 리바이스, 코카콜라, 나이키, 마이크로소프트 등 수많은 CF를 연출했다. REM의 뮤직비디오로 MTV 어워드를 수상했으며, 뉴욕 모던 아트 뮤지엄에는 그의 광고 몇 편이 소장되어 있는 등 상당한 경력을 가진 감독이다.


영화 속의 기괴하고 충격적인 비주얼들이 그의 작업 성향을 짐작하게끔 한다. 영화 속의 몸짓, 묘사 등이 묘하게 역겨운 분위기를 풍기고 있는데, 이 냄새나고 건조한 영상미가 나에게는 매우 매력적이다. 영화가 거의 끝나갈 때쯤 나오는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은 퀘이형제를 아는 사람들이라면 당연히 그 사람들을 떠올렸을 법한 장면들인데, 타셈 싱 또한 그들에게 의뢰할 생각으로 이 장면을 생각했다고 한다. 결과적으로 퀘이형제가 만든 애니메이션은 아닌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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