뱀파이어물 하면 공포가 자연스레 떠오르는 사람도 있겠지만, 나를 포함해 늙지 않는 외모를 먼저 생각해내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적어도 나는 <뱀파이어와의 인터뷰>라는 영화의 영향이 컸다. 죽지 않고 늙지도 않는 몸, 무엇을 물어봐도 무엇이든지 막힘없이 대답해 줄 것 같은 지적능력, 상상을 초월하는 힘은 거칠고 냉정한 히어로를 떠올리게 한다. 아마 이러한 점 때문에 뱀파이어물이 영화 <트와일라잇> 같은 로맨스물로 둔갑하지 않았나 싶다. 결국 나온 결과물은 상이하지만 <뱀파이어와의..>와 <트와일라잇> 에는 공통점이 존재한다. 아름다운 외모, 쓸쓸해 보이고, 인간에게 늘 쫓기지만 어디까지나 철저하게 경계선이 존재해서 그 이상으로 나아가면 그때부터는 뱀파이어에게 주도권이 생긴다는 것, 즉, 간단하게 말하면 두 영화들을 포함하여 뱀파이어들을 다루는 대부분의 매체에서 그들은 강하고 매력적이며 고독하지만 또한 고독하지 않다. 일종의 절대자의 모습이다.
하지만 <뱀파이어와의 인터뷰>라는 영화 이후 적어도 내가 봤던 만화나 책에서 그들은 조금은 지쳐 보이고 주도권이라고는 전혀 없는 패배자의 모습이었다. 본 작품들 대부분이 대중적이지 않았을 뿐.
영화 <렛 미인> 도 마찬가지다. '별로 되고 싶지 않은' 뱀파이어가 여기에도 등장한다.
이엘리는 피를 마시지 않으면 몸에서 악취가 난다. 이미 죽은 몸이기 때문에 피를 마시지 않으면 아마도 시체가 썩는 고약한 냄새가 조금씩 심해지는 건지도 모른다. 창백하지만 살아있는 송장과도 같기에 결코 아름답지는 않다. 몸은 젖내 나는 어린애지만 눈빛은 왠지 모르게 지쳐 보인다. "너에게서 냄새가 난다"라는 오스칼의 말에 난감해하고, 먹지도 못하는 캔디를 오스칼이 건네주자 입에 넣었다가 괴로워하며 게워낸다. 붉은 피만 나오지 않는다면 조금은 무미건조하지만 어린애들의 사랑놀이로 봐도 무방할 정도다.
굳이 뱀파이어가 나오지 않는다 해도 오스칼이 사는 이 동네라는 곳은 소름 끼치게 건조하다. 발이 푹푹 빠지는 눈 덮인 배경은 그렇다 쳐도 날씨는 늘 우중충하고 건물들은 금방이라도 귀신이 온갖 관절을 기이하게 꺾으며 기어 나올 것 같은 공포감을 조성한다. 전체적인 색감이 차가워서 그곳의 사람들도 차가워 보인다. 아니, 그렇다. 왕따를 당하는 오스칼에게 그 어떤 어른들도 도움을 주지 않는다. 그를 괴롭히는 패거리들에게서 옷을 뺏긴 후 추운 겨울 허옇게 드러낸 몸에 큰 부츠를 신고 터벅터벅 걸어가는 오스칼에게는 그 누구도 구원자가 없을 정도로 절망적이지만 모든 것을 포기한 듯한 오스칼의 뒷모습이 사실 더 절망적이기도 했다. 이혼한 부모 때문에 가끔씩 아빠와 지내는 오스칼은 아빠와 남자와의 묘한 긴장감을 평소와 같이 대하지만 그것의 옳고 그름을 떠나서 결국 오스칼의 말을 관심 있게 들어줄 어른이 없다는 건 참 가슴 아픈 일이다.
그래서 어디서 왔는지 정확히 나이가 몇 살 인지도 모르는 이엘리와 오스칼은 가까워진다. 가까운 가족보다 오히려 이엘리에게 오스칼은 위안을 얻는다. 사랑인지 우정인지 모호한 경계지만 자신의 말을 경청해주고 공감해주는 관계란 쉽게 오진 않는다. 이엘리와 오스칼은 진정한 친구가 됐을지도 모른다.
이엘리는 오스칼과 그의 '동반자'에게 하는 행동을 칼같이 구분한다. 마치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이 그의 '동반자'에게는 냉정하다. 피를 구해오지 못한 그를 쓰레기 보 듯 바라보며 고장 난 고철덩어리 취급한다. 정작 '동반자'는 자신의 삶이 없다. 겨울밤 사람을 거꾸로 메달아 놓고 그 혹은 그녀를 위해 피를 받다가 사람에게 들키면 도망가야 되고, 자신의 상황과 이엘리의 신분 때문에 어디에서도 타인과 어울리지 못한다. 더 이상 어울리는 방법조차 까마득하게 잊어버렸는지 모른다. '동반자'가 사랑한 이엘리는 사람이 아니라 뱀파이어이기 때문이다.
염산에 의해 너덜 해진 얼굴로 이엘리를 바라보던 '동반자'는 이엘리에게 피를 빨리고 저 아래로 추락한다. 그게 그의 끝이었다. 평생을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피를 바치다가 결국엔 자기도 그렇게 죽어버렸다. 죽어버린 '동반자'를 무표정하게 내려다보던 이엘리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생각해보면 이엘리는 이미 죽은 사람이다. 심장이 뛰지 않고 심장이 있다면 그건 피를 갈구하는 악마의 심장이다. 갈증에 허덕이는 악마의 입이 원하는 건 오로지 혈액이다. 이엘리도 피를 원한다. 자신을 대신해서 피를 구해주고 대신 죽을 사람이 필요하다.
이엘리에게 오스칼은 어떤 존재일까.
아름답지만 음울한 사랑이야기. 영화를 보기 전에 봤던 문구가 본 후라고 크게 달라질 건 없다. 하지만 이 <렛 미인>의 사랑이야기는 그런 고상함보다는 좀 더 처절하고 세계가 버린 이들이 하는 이기적인 사랑이다. 오스칼에게는 자신을 버리지 않고 늘 자신의 말을 경청해 줄 친구가 필요했고, 이엘리 에게는 늙고 병든 이보다는 젊고 자신의 욕구를 충분히 채워줄 '새로운 동반자'가 필요했을 뿐이다. 이엘리와 오스칼의 만남은 일종의 본능이다. 어쩌면 이엘리는 느꼈는지 모른다. '이 아이라면 미련 없이 나와 함께 떠날 수 있겠지. 그리고 '동반자'가 되어줄 수도 있을 거야.' 사랑이라면 사랑이다. 이전의 죽은 '동반자'도 이엘리와 같은 사랑을 했는지도 모르고.
렛 미 인-나를 허락해 줘. 오스칼은 받아들였고 이제 그들은 떠났다. 자신들만의 세계로. 오스칼은 언젠가 늙고 병 들것이고 이엘리는 여전히 아이의 모습 그대로 인 채 시간은 계속 흘러갈 것이다. 계속 혼자 남겨지는 이엘리의 기분은 어떤 기분일까. 생각하고 싶지 않다. 그게 '별로 되고 싶지 않은' 뱀파이어인 이유이다. 그리고 가장 현실적인 이유이며 <렛 미인>이 너무나도 슬프고 음울한 사랑이야기인 이유이기도 하다. 쳇바퀴처럼 굴러가는 시간 속에서 이엘리는 지금도 닫힌 세계를 끝없이 걸어 나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