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좇는다

인셉션- '기억'에 집착하는 남자-레너드와 코브

by XX



전작이 다크 나이트였기 때문에, 혹은 인셉션의 스케일 때문에 다크 나이트와 인셉션을 비교하는 사람들이 꽤 있지만 사실 이 영화는 메멘토와 비슷한 점이 많다. 현실을 거부하는 남자, 트라우마에 집착하는 남자가 주인공이라는 점이 그렇다. 물론 놀란 감독이 새롭게 창조한 배트맨은 고뇌한다. 박쥐에 대한 트라우마를 이겨낸 후, 가면을 쓰고 고담시의 히어로가 되지만 결국 가면에 의존해야 하는 브루스 웨인은 또다시 트라우마에 갇힌 셈이다. 하지만 브루스 웨인은 고뇌하는 '히어로'이다. 선과 악이 공존하는 히어로이긴 하지만 배트맨의 영향력은 고담시라는 세계관에 흡수되지 않고, 동등한 위치에 존재한다. 또한 어둡고 기괴한 고담시에 '... 현실이란 존재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은 어울리지 않는다. 다크 나이트는 우리들에게 '절대'악과 '필요'악에 대한 존재 여부와 당위성의 질문을 우리에게 계속 던진다.

메멘토의 레너드나 인셉션의 코브는 매우 나약한 인물들이다. 배트맨이 고담시와 동등한 위치에 존재한다면, 레너드와 코브는 각자의 세계관에 먹혀들어간다. 그들의 존재는 당위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 레너드와 코브는 계속 현실로부터 튕겨나가며 배제되고, 있으면서도 없는 투명인간과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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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전하며 불확실한 기억은 색깔이나 모양을 왜곡할 수 있다.

기억은 기록이 아니라 해석일 뿐. 난 사실만 믿고 행동해.'

-레너드-




기억을 불신해서, 온몸에 사실들의 기록을 새겨 넣고, 메모를 하고, 사진을 찍으며 자신이 찾고자 하는 것의 흔적을 계속 추적하는 레너드는 실체 없는 유령이다. 레너드에게는 그를 주체적 존재로 지탱하게 해주는 요소가 없다. 아주 기본적인 욕구와 일상생활의 지식을 제외하고는 그의 실체는 빈껍데기이다. 레너드에게는 기억이 없기 때문이다. 그의 기억은 강간을 당하고 비닐에 쌓여있는 아내의 모습에서 멈춰있다. 아내에게 일어난 사고 이후, 단기 기억상실증에 걸린 레너드는 사고 이전의 기억들만을 단편적으로 떠올릴 수 있을 뿐, 현재의 레너드에게 기억은 계속해서 '말소' 되고 '생성' 된다.

레너드는 '새미'의 일을 본으로 삼아 자신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실들은 반드시 체계적인 기록으로 남긴다. 그는 기억을 절대 믿지 않는다. 그는 '새미'를 안타깝게 생각하나 절대 그처럼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으리라 다짐한다. 그래서 그는 기록에 집착하고 계속 자신의 존재의 당위성을 찾는다. 그 결과 '새미'는 할 수 없었지만 자신은 충분히 잘 해내리라는 것을 확신한다. 새미에게는 없으나 자신에게는 있는 것, 즉, '자신의 아내를 강간하고 죽인 살인마를 찾아야 한다.' 한다는 사실. 그는 이 사실에 움직인다. 오직 이 사실만이 그를 살아있게 하고 자신의 존재의 당위성을 만든다.

우리들은 영화 속의 레너드를 좇아가며 레너드가 쫓고 있는 사건에 대한 몇 가지 단서들을 얻는다. 그런데 이 단서들은 조금 이상하다. 레너드가 믿는 사실들의 기록과는 조금씩 뒤틀려 있기 때문이다. 무엇이 옳은 것인가? 무엇이 진실이며 누가 범인인가?

우리에게는 수많은 기억들이 있고 그 기억들이 우리를 만든다. 그리고 그 기억들이 때로 우리들의 방어기제를 작동하게 하기도 한다.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불안이 자신의 자아를 위협할 때, 기억을 왜곡하거나 거부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특정한 기억에 계속 고통스러워한다. 어렸을 때, 일정한 한 사람에게 지속적으로 정신적, 물리적 폭력을 당한 기억이 매 순간 그를 옭아맨다. 그런데 기억이 아닌 사실에서 그 고통은 매우 가벼운 것이었다. 아니, 폭력을 가한 그 당사자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 존재하지도 않는 존재를 있게 만들어야 했던 이유에는 그 자신에게 있었다. 자신에게 문제점이 있다는 사실을 그는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점차 자신의 문제점이 노출되면서 그의 불안은 증폭되고, 자신의 문제점이 자신의 탓임을 부정하고 합리화, 투사를 하기 시작한다. 왜곡이 현실이 되는 순간이다. 곧 기억은 왜곡되어 존재하지 않는 인물을 만들어내게 되고, 그는 그 기억을 사실의 기록이라고 믿게 된다.

이 예로든 이야기는 레너드의 상황과 매우 닮아있다. 구체적인 부분은 다를지라도 레너드가 자신의 기억을 온전히 옳은 사실이라고 믿는 '합리화' 가 이 영화의 키워드인 것이다. 단기 기억상실증은 이 영화의 캐릭터를 그럴듯하게 포장하는 설정에 불과하다. 그 점을 우리는 영화의 마지막에 가서 알 수 있다. 레너드를 도와주는 부패경찰 존 갬멀이자 아명인 테디가 레너드에게 진실을 말했을 때, 레너드의 단편적인 기억 속의 장면들이 빠르게 지나간다. 그는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실들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자신이 만든 새미의 존재, 강간당한 후 죽지 않았던 아내, 자신이 초래한 아내의 죽음, 이미 자신이 죽인 강간범,

이제 그는 혼란스러워진다. 기억을 불신하는 레너드는 자신이 만든 왜곡된 기억을 사실이라 믿고 있다. 이제 그는 모든 것을 인정하고 현실을 직시할 것인가?

테디의 말처럼 레너드는 풀 수 없는 퍼즐을 만들고 있다. 단기 기억상실증이 맞든 아니든 간에 그는 그가 만든 왜곡된 현실에서 진실을 찾고 있으며 죽지 않는 이상 그는 살인을 계속할 것이다. 레너드는 진실된 기록을 불태워서 없애고, 조작하고 계속 사람을 죽이면서 없는 진실을 찾고 있다.





꿈속의 억압된 무의식

-코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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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셉션의 결말은 열린 결말이다. 노멀 엔딩부터 코브의 림보설, 관객 타겟, 피셔가 아닌 코브가 인셉션의 타겟이었다는 설까지 무엇이 진정한 결말인지 알 수 없고, 깔끔하게 끝나지 않는 엔딩 때문이지만 결국 '답은 없다' 가 제일 그럴듯한 결말이 아닌가 싶다. 누가 어떤 결말을 생각하든 틀린 것이 아닌 다른 결말이라고 판단하도록 하는 것이 놀란 감독의 의도든 아니었든 간에. 나의 결말 기준은 코브의 림보설이다.

사실 개인적으로 메멘토의 레너드가 아주 거세게 몰아치는 태풍이라면, 코브는 찻잔 속의 아주 잠깐 출렁거리는 물결이라고 생각했다. 그동안의 크리스토퍼 놀란의 영화에 나왔던 인물들은 대부분 이성적이고 감정을 최대한 절제하는 데에도 불구하고 매우 불안하고 불안정하며, 언제 산산조각이 나서 분열될지 모르는 위험함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에 반해 코브는 이성적이고 감정을 최대한 절제하는 동시에 어떤 위험함의 징조도 전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오히려 이 영화에서 주체가 되는 것이 인간의 자아나 초자아가 아닌 거대한 무의식의 세계라면 접근방식을 달리 해봐야 할 필요가 있다. 위에서도 말했지만 코브는 자신의 무의식 속에 계속 먹혀들어간다. 이 영화를 봤던 사람들이 어딘가 영화의 구성이 미흡하다고 느꼈던 것은 배우들의 개성은 현저하게 줄어들고 의식과 무의식의 연속적인 나열 때문에 계속해서 공간이 바뀌는 장면들의 전환들이 낯설었기 때문 일 것이다. 소재의 기초가 되는 이론들을 사람들이 수많은 영화에서 접했는데도 불구 소재 자체는 굉장히 신선했기 때문에 이 설정에 익숙해지기 위해서는 장면이나 대사를 주의 깊게 봐야 한다. 무엇보다 인셉션에서는 우리가 쉽게 파악할 수 있는, 법과 제도, 규범에 길들여진 인간 너머의 무의식에 집중하고 있다. 즉, 배우의 캐릭터도 중요하지만 갑자기 튀어나오는 무의식의 산물은 이 영화에서 캐릭터 이상으로 존재감이 있는 셈이다.

긴 러닝타임 동안 벌어지는 프로젝트 인셉션은 내쉬가 설계하고 포인트 맨 아서와 추출자 코브가 사이토의 무의식 (꿈속의 꿈) -(레벨 2), (현실을 포함하면 레벨 3)으로 들어가 사이토의 기밀정보를 빼내고자 하지만 실패한 후, 이들의 실력에 만족한 사이토가 코브에게 제안하는 거래를 가리킨다. 인셉션은 기억을 삽입시킨다. 당사자조차 알 수 없는 가장 깊은 무의식의 공간에 들어가서 없는 기억을 만들어내는 인셉션의 표면상의 표적은 피셔다. 하지만 인셉션의 타겟-코브설이 전혀 설득력이 없는 것이 아닌 것처럼, 영화 인셉션의 대부분의 무의식은 피셔의 것이지만 오히려 피셔의 무의식에서 혼란을 느끼고 충돌하는 사람은 코브이다.

코브의 무의식의 산물은 세 가지가 있는데,

1. 열차-피셔의 무의식의 방어이자, 림보 상태에서 50년간을 살아온 코브와 맬이 현실로 돌아가기 위해 사용했던 탈출방법. 이때, 꿈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는 맬과 다르게 코브는 현실로 돌아가고자 했고, 맬에게 인셉션을 걸어서 이곳은 현실이 아닌 꿈이라는 생각을 심음. 열차를 통해 현실로 돌아왔지만, 맬에게 인셉션을 걸었던 생각이 무섭게 뿌리를 내려 현실조차 꿈이 되어버린 맬은 결국 자살함.

2. 코브와 맬의 아이들-코브의 아이들은 계속 등을 돌린 채로 나타난다.

3. 맬-현실에서는 이미 죽은 코브의 아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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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어떤 무의식의 산물보다도 집착이 강한 맬은 코브의 죄책감이다. 단순한 죄책감의 감정을 넘어 맬에 대한 사랑과 증오가 뒤섞인 코브의 내면이 계속 억압되고 짓눌리면서 아마 무의식의 산물 맬은 현실세계의 맬과는 점차 동떨어진 존재로 변했을 것이다. 무엇보다 코브가 제일 인정하고 싶지 않은 사실은 자신이 현실에서의 맬의 죽음에 어느 정도 일조를 했다는 점이다.

코브는 이 사실을 다시 한번 림보 상태에 가서야 밝히게 된다. 가장 마주하고 싶지 않은 꿈의 밑바닥까지 내려간 후에야 진실과 마주하게 되는 것이다. 아마도 이 인정하고 싶지 않은 진실이 그의 억압을, 깊숙이 박혀있는 끔찍한 악몽으로 만든 것일지도 모르며, 놀란은 이 억압을 엘리베이터로 표현했다. 생각해보면 파리의 시가지가 위로 뒤집히는 씬, 무중력 씬과 함께 억압을 가장 감각적으로 표현한 부분이 아닐까 싶다.

가장 억압이 많은 인물이니만큼 코브는 기억에 집착한다. 초반 아리아드네가 꿈에서 설계를 할 때, 코브는 아리아드네에게 기억에 기초에 설계하지 말 것을 경고하지만, 그는 매일 밤 꿈속의 아이들과 맬을 찾아간다. 등을 돌린 채로 자신을 바라보지도 못하는 아이들이 그리워서, 이미 죽은 맬이 보고 싶어서 무의식 속에서 마치 살아있는 존재 같지만 부유하는 유령 같은 맬을 매일 만나러 꿈속으로 들어간다. 내가 코브의 림보설을 결말로 생각하고 있는 이유도 이러한 복선 때문인데, 어쩌면 돔 코브는 아마도 레벨 1(현실을 레벨 1로 봤을 때 레벨 2)에서 총상을 입은 사이토를 바라보며 이미 이 순간부터 혹시 현실로 돌아가지 못할 상황을 염두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영화의 첫 장면, 수십 년을 림보 상태에서 보낸 사이토는 멜, 코브와 같은 상황에 놓여 있었고, 코브를 향한 사이토의 대사만으로는 사이토가 림보 상태에서 인셉션 없이도 계속 현실로 돌아가고자 하는 기억을 잊지 않고 있었는지 알기 어렵다. 그러므로 애초에 이미 이 상태부터 새로운 5단계의 림보에 코브가 들어갔을 가능성(현실을 1단계로 포함시키면 6단계)

혹은 이미 자신이 림보 상태에 빠졌다는 것을 알고 있는데도 불구 모든 것이 자신의 뜻대로 가능한 이곳에서 계속 살 것을 결심하고 코브에게만 총구를 겨누었을 수도 있다. 그리고 똑같이 새로운 5단계의 림보에 빠진 코브.

그 후의 장면이 없는 것은 놀란 감독의 의도였다고 생각하고 있다. 이 장면이 없기 때문에 더 여러 가지의 결말 추측이 가능해질 수 있는 듯하다.

내가 생각한 새로운 5단계의 림보는 코브가 좀 더 무의식에 깊숙하게 접근한 상태와도 같다. 즉 , 영화 내내 인셉션을 하기 위한 규칙과 조건들이 모두 무시된, 4단계의 림보를 뛰어넘는 더더욱 완벽한 무의식으로의 접근이다. 하지만 여전히 무의식의 상태이기 때문에 코브의 아이들은 성장을 하지 않은 채이고, 대신 늘 뒤돌아 있던 아이들의 모습을 코브는 그제 서야 서로 마주할 수 있게 된다. 이젠 더 이상 토템도 필요가 없다. 그 누구도 들어올 수 없는 무의식의 영역에서 코브는 아이들과 함께 지낼 수 있게 됐으니.

메멘토의 레너드와 (내가 생각하는) 인셉션의 코브는 모두 기억에 집착하고 그 기억에 기반 한 자신만의 세상을 견고하게 만들었다. 기억에 갇힌 채, 현실로 돌아오지 못하는 이들이 우리들 입장에서는 불행해 보이지만, 잘 생각해보자. 레너드와 코브 입장에서는 우리들이 불행해 보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꿈과 현실을 구분하는 것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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