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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빛길 Mar 14. 2022

일터에서 찾는 인간관계

일을 하며 좋은 사람을 만나는 게 가능할까?

"어느 방향으로 가세요?"

일터에서 가장 두려워하는 말 중 하나다. 대개 어느 방향으로 가냐는 질문 뒤엔 집 방향이 같으니 같이 가자는 말이 붙기 마련이다. 사람을 좋아하는 나라지만 친하지 않은 누군가와 둘이 길을 걷는다는 건 상당한 에너지가 드는 일이다. 무엇이든 혼자 하는 게 익숙한 내게 친하지 않은 누군가 동행을 제안할까봐 나는 종종 다른 곳에 들렀다 간다고 거짓말을 하거나 집방향과 전혀 다른 곳을 가리키기도 한다. 처음 만난 M이 내게 집방향을 물었다면 나는 거기가 어디든 무조건 M과는 반대의 방향이라고 대답했을 것이다. 

  

입시를 끝낸 이후 아르바이트를 쉬어 본 적이 거의 없다. 카페, 식당, 옷집, 웨딩홀, 모델하우스, 판촉 사원...... 다년간 아르바이트를 하다보니 의도치 않게 여러 경험을 하고 여러 사람을 만났다. 일을 하며 느낀 점 중 하나는 일터에 기대를 가지는 게 그냥 허튼 짓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그냥' 허튼 짓이 아니라 '아주', '퍽', '너무' 허튼 짓이다. 성인이 되어 스스로 돈을 벌 수 있다는 기대도 잠시, 초보 알바인은  남의 지갑에서 돈을 꺼낸다는 게 그리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나마 신체의 피로는 각오했던 일이라지만, 정신적 피로까지 계산하지는 못했던 것이 실수였다. 이용자가 지불한 돈엔 서비스 비용이 포함되어 있었고 비용에 걸맞는 서비스를 제공하느라 나도, 동료들도 한껏 예민해져 있었다. 그나마 인복이 좋은 편이라 좋은 사장님, 좋은 동료들을 만나 무난하게 일한 편이지만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일 자체보다 일터에서 만나는 이와의 관계가 어렵고 힘들다는 이야기를 심심치 않게 들을 수 있었다. 하긴. 돈벌러 간 일터에서 사고나 안치면 다행이지, 좋은 인간 관계를 기대한다는 것 자체가 지나친 욕심인 것 같다고 생각했다. 호의적이되 너무 가깝지 않은 관계. 일터에서의 인간관계는 딱 그 정도의 거리가 적당한 것이다.


스물 둘 여름 방학을 맞아 새로운 알바를 구했는데 초등학생 아이들을 관리하는 영어캠프 교사일이었다. 영어를 두려워하는 내가 영어캠프 교사라니. 아이러니하지만 엉성하게나마 영상을 만들 수 있다는 특기덕분에 면접에 붙어 일을 시작했고 거기서 팀장이었던 M을 만났다. 단정하게 묶은 머리와 낮은 목소리, 깔끔한 옷매무새. 빈틈없는 듯한 M에게 적어도 찍힐 일은 없도록 하자고 생각했다. 찍힐 일이 없으려면 되도록 눈에 띄지 않는 게 좋으니 M과 둘이 조우할 일 자체를 피하면 되겠다는 마음이었는데 내 속을 알 리 없는 대표님은 M과 나를 룸메이트로 붙여주었다. 이제 와서 고백하건대 M과 둘이 숙소를 쓰라는 청천벽력같은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나는 잠시 대표님을 미워했다.


캠프 준비는 하루종일 자잘한 일이 넘쳤다. 아이들을 맞기 위해 풍선을 붙이고 책상을 옮기고 물품을 나눴다. 함께 일하는 동료들은 각자의 숙소에서 편히 뻗어 잘텐데 나는 M과 어색하게 숙소를 쓸 생각을 하니 방에 들어가기도 전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종일 일을 하느라 피곤할텐데 숙소에 돌아와서도 노트북을 켜놓고 일을 보는 M이 로봇같았다. 워낙 피곤하다보니 캠프를 진행하는 5박 6일동안 M과 한 이야기는 별로 없었다. 


무사히 일을 마치고 일상을 보내던 어느 겨울 대표님께 연락이 왔다. 이번 분기에도 영어캠프를 함께 하자는 제안이었다. 이번 방학 땐 또 어떻게 아르바이트를 구해야 하나 걱정이 가득했는데 나를 또 찾아준 대표님이 고마웠다. 한번의 경험도 경험이라고 두번째 캠프 준비는 첫번째보다 비교적 수월했다. 적어도 대표님이 M과 나를 또 룸메이트로 붙여주기 전까진 말이다. 동료와 방을 써도 불편할 판에 상급자와 방을, 그것도 두번이나 써야 한다니. 실수하면 안된다는 생각으로 바짝 긴장하고 있던 차에 M은 먼저 말을 붙여주었다. 혹시 자기와 방을 쓰는 게 불편하진 않냐고 물었다. 물론 아니라고 손사래를 치는 와중에도 속으로는 너무나 불편하다고 하느님께 구조신호를 보냈지만 말이다.


그래도 두번째 함께 숙소를 썼을 땐 전보다 여유가 생겼는지 M이 안쓰러워 보이기 시작했다. 오늘도 피곤했을텐데 저렇게 늦게까지 일을 하는구나. 대표님과 소통하면서 직원들에, 애들까지 관리하려면 힘들겠다. 그래도 힘든 티를 안 내는구나. 대단하다. 뭐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언제 스몄는지도 모르게 나는 M이 익숙해졌고 M과 편히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함께 아이들을 가르치니 울고 웃을 일이 많았다. M은 마음껏 사랑하고 관계에 진심을 다 하는 사람이었다. 동물을 좋아했고, 센스있는 농담을 던졌고, 자신의 이야기를 빌려 위로를 건네기도 했다. 오랜만에 사람을 보며 질투없이 부러운 감정을 가져보았다. 코로나19가 기승을 부리며 모든 캠프가 취소되고 M과 함께 일을 못 한지도 꽤 되었다.


그동안 M은 꼬박 꼬박 생일 축하 메시지를 보내주었고, 기쁜 일이 있을 땐 꽃바구니를 보내주었으며, 일자리가 없을 때 일을 내줬다. 일터에서 만난 사람과 이렇게 정을 주고받을 수 있다는 게 놀라웠다. 처음엔 그래 내가 참 인복이 많지 하다가, 꾸준히 나의 인복이 되어준 M을 보며 이젠 나도 누군가의 인복이 되어야지 다짐했다.


M이 어느 방향으로 가냐고 물을 때 나는 되도록 M과 같은 방향으로 가려고 한다. 이제는 M과 함께하는 일이 기대되고 재미있다. M을 만나면 세상을 사랑하고싶어지고 즐겁게 살아내고싶어진다. 일터에서 애정어린 사람을 만날 수 있다는 걸 알려준 M. 그와 더 오래도록 서로를 응원하며 같은 방향으로 걸어나갈 수 있길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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