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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빛길 Mar 25. 2022

시선을 공유한다는 것

요시고 전시회를 보고 와서

작년 말, 저렴한 필름카메라 하나를 샀다. 진부했던 일상을 소중히, 곰곰이 보는 습관을 기르고자 고민 끝에 산 물건이다. '고민'이 필요했던 데는 이유가 있다. 많은 이들이 필름 카메라의 매력으로 꼽는 것 중 하나는 한정된 필름의 특성이다. 사진을 금세 찍고 지울 수 있는 디지털 방식과 달리 아날로그 방식은 필름이 유한하다는 점때문에 신중한 시선으로 고르고 골라 장면을 남겨야 한다. 게다가 의도대로 사진이 찍혔는지 곧바로 확인할 수 없기 때문에 나의 신중함이 옳았는지 확인하는 데도 기다림이 필요하다. 효율을 중시하고 성격이 급한 내가 과연 필름 카메라의 느긋함을 감당할 수 있을지 알 수 없었기에 카메라를 사는 데까지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걱정과 달리 몇달째 필름사진 찍기를 잘 즐기고 있으니 꽤나 뿌듯한 소비라 할 수 있지만 말이다. 숨이 넘어갈 듯 필름 현상을 기다리며 못해먹겠다고 생각하다가도 마음에 드는 사진이 나오는 걸 보면 도저히 필름 카메라를 놓을 수가 없다.


그러나 필름 카메라 하나로 진부한 일상이 확 바뀐 것은 아니다. 나는 여전히 대부분의 시간을 소중하게 보지 못하고, 곰곰이 보지도 못한다. 사소한 일에 감사함을 갖자고 몇번씩 다짐해놓고도 요즘은 감사는 커녕 불만을 넘어 눈을 감는 무관심으로 일상의 기조가 기울고 있다. 예술을 하고싶다는 사람 치고 나처럼 삭막한 사람도 없을 거란 생각을 하고 있을 때쯤 동업자 J가 요시고 사진전을 함께 가지 않겠냐는 제안을 했다. 그제서야 요즘 외부 문화 활동을 전혀 하지 않았다는 걸 알았다. 연극도, 뮤지컬도, 전시회도 본 지가 까마득한 것이다. 얼핏 보았던 요시고 사진 특유의 색감과 느낌도 나쁘지 않았던 터라 겉으로는 함께 가겠노라 무덤덤히 답하고 사실 전시 전까지 한껏 들떠있었다.


높은 채도와 안정적인 구도. 요시고의 사진은 내가 좋아하는 수학적 요소를 담고 있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내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사진 곳곳에 묻어있는 요시고 특유의 여유로움이다. 창문이 빼곡해 닭장같은 건물이 요시고의 사진에선 안식처로 변모한다. 사람이 빼곡한 해수욕장도 실제라면 질색했을텐데 어쩐지 요시고의 사진에선 파라다이스같다. 물을 워낙 좋아하는 터라 바다나 수영장을 배경으로 한 사진이 많다는 점도 마음에 들었다. 다양한 자세로 물에 둥둥 떠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니 나도 좀 더 여유로이 세상을 부유하고싶다는 욕망을 느꼈다. 배경을 방해하는 사람들마저 조화로운 피사체로 담아내는 능력. 그 안엔 요시고 특유의 여유와 애정이 담겨있다.


또 하나 인상깊었던 것은 빛과 그림자다. 스페인 건물 외관을 비추는 햇빛, 교토 밤 거리와 어울리는 가로등 불빛, 그리고 그 모든 빛들과 엮여있는 그림자. 시간의 흐름과 함께 사라지는 찰나의 순간을 기록한 요시고의 사진은 인위적인 유화같은데 어쩐지 다큐멘터리같은 구석도 있는 아이러니함이 있다. 그 아이러니가 신기해서 요시고 사진 속 빛과 그림자를 한참 바라보기도 했다.


여유가 묻어있는 요시고의 사진으로 세계 곳곳을 둘러 본 직후엔 한번도 가지 못한 해외를 그렸는데 집 오는 길 곳곳에도 찰나의 순간이 가득하다는 것을 깨닫고 새삼스러움을 느꼈다. 매일 봤던 풍경의 새삼스러움이 이국적인 느낌으로 다가오기도 했던 것 같다. 집으로 돌아와 요시고의 사진 엽서를 벽에 붙이며 오래 오래 그 새삼스러움을 기억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열정과 인내를 가지고 사랑어린 눈으로 세상을 보면 일상에 즐거움이 더해지겠지. 즐거운 자극이 된 사진전의 소회를 남기며 함께 가자고 제안해준 J에게도 고맙다는 말을 전한다. 역시 필름 카메라를 사길 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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