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중한 자매 J에게
J. 오랜만에 너에게 편지를 써. 너와 나의 격차는 겨우 1년 반 남짓한 시간인데 그 시간 때문에 누구는 ‘언니’, 누구는 ‘동생’으로 평생을 살아간다는 게 좀 웃기기도 해. 하긴 몇 분 차이로 태어난 쌍둥이도 있으니 다른 누군가에게 1년 반이란 꽤 큰 시간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나는 시간이 갈수록 너와 나의 나이 차가 별 거 아니라는 걸 느껴. 내가 점점 철없이 살고 있는 탓일까. 어떨 땐 네가 언니로 느껴질 때도 있다니까.
남들은 우리가 쌍둥이처럼 똑 닮았다고 하지만 성격, 취향, 관심사까지 우린 공통점보다 차이점이 훨씬 많은 자매야. 시간이 갈수록 늘어나는 차이점을 헤아려보면 너와 내가 완전히 다른 인격체가 되었다는 걸 실감할 수 있어. 지금보다 더 어릴 땐 이해할 수 없던 너의 행동들을 우리가 완벽한 타인이라는 걸 인지하고 난 후엔 한결 편하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지.
가족. 참 어려운 관계야. 특히 우리에겐 풀지 못한 숙제 중 하나지. 피는 물보다 진하다고 강조하는 한국 사회에서 가족을 완전히 다른 인격체로 보기란 쉽지 않은 일인가봐. 가족과의 연락을 끊고 독립한 내게 사회가 강조하는 가족 형태는 늘 내 마음을 불편하게 해. 어쩌면 그건 늘 너와 나를 괴롭히는 폭력일지 몰라. 그리고 그 폭력이 한동안 너와 나의 관계를 어렵게 하기도 했다고 생각해. 가족은 당연하지 않은 것을 당연하게, 당연한 것을 당연하지 않게 생각하는 관계가 되기 쉬우니까.
다른 편지보다 이 편지를 쓰기까지 유독 시간이 오래 걸렸어. 함께한 시간이 많은 만큼 공유한 추억이나 감정도 많은데, 그래서인지 더욱 너에게 할 말이 정리되지 않는 거야. 파편처럼 흩어진 감정과 단어들을 모아 정리하는 데 시간이 필요했어. 그런데 아직도 내가 네게 전하고 싶은 말과 감정을 명확히 정리하진 못했어. 한 통의 편지 안에 그 모든 것을 담기에 아직은 내 능력이 부족한가봐.
나는 나와 똑 닮은 네가 행복하길 진심으로 바라. 그래서 주마다 성당에 가서 내 행복과 함께 네 행복을 빌곤 해. 그건 네가 나와 가족으로 이어진 관계이기 때문이 아니야. 우리의 DNA가 상당 부분 유사하다는 사실이 내 감정을 움직이는 건 아니니까. 나와 별개의 인격체인 너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사랑하면서 너의 행복을 바랄 뿐이야.
이전엔 너와 나를 완전히 분리하는 게 쉽지 않았던 것 같아. 그래서인지 네가 내 기준에서 엇나가면 너를 많이 미워했지. 어른들이 우리를 비교하는 일도 참 싫었어. 형제란 원래 선의의 경쟁자라는데 나는 그 ‘경쟁’이란 구도 자체가 납득되지 않아. 모든 게 경쟁인 자본주의 사회에선 가족도 경쟁 대상이 되곤 하는구나. 그런 생각을 하다 보면 어쩐지 씁쓸해지지. 너와 경쟁하지 않아도 되고, 우리의 삶이 완벽하게 분리된.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지금이 너와 붙어있을 때보다 한층 가깝고 편한 사이가 된 시점인 것 같아.
다만 무언가 꾹꾹 눌러 담고 참는 데 익숙한 네가 걱정돼. 상처는 사라지지 않고 곪기 마련이지. 빨리 치료하지 않으면 더 큰 흉이 질지도 모르고. 네가 어릴 적 다리미에 덴 흉터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때때로 필요할 때 언제든 내게 기대 펑펑 울고 욕하는 네가 되었으면 좋겠다. 진심으로.
우리는 종종 통화를 하고 이해할 수 없는 어른들에 대해 이야기 나누지. 그럴 때마다 마음 한편이 무거운 건 왜일까. 어쩌면 나도 우리가 말하는 그런 어른이 될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일 거야. 그렇지만 두려움에 갇혀 무기력하게 있기보다 두려움을 원동력 삼아 좋은 어른으로 성장하도록 애쓰고 싶어. 구체적으로 그려지지는 않지만 미래의 행복한 순간마다 오래도록 너와 기쁨을 나눌 수 있길 바라.
때로는 따뜻한 말로, 또 때로는 따끔한 말로 나의 성장을 도와주는 네게 고마워.
각박한 세상, 감정을 공유할 사람이 있다는 건 감사하고 행복한 일이지.
네가 나와 닮은 가족이라는 건 중요하지 않아. 생물학적으로 비슷한 유전자를 가지고 있다는 것도.
가족이란 허울이나 의무를 넘어 너 자체를 존중하고 사랑하는 사람이 될게.
존중과 사랑을 담아 너의 자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