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서울 도심의 개천에서도 작은 발톱 수달이 이따금 목격되곤 합니다>
“언제부턴가 서울 도시의 개천은 이따금 범람하곤 했습니다. 에고! 마침 비가 옵니다. 마구 옵니다. 개천은 범람하고, 둥지도, 구슬도 떠내려가네요.”
지겹다.
고 생각하던 차였다. 사랑하는 일이. 그리고 살아가는 일이.
스물여섯이 한창 어린 나이라면 벌써 권태가 깃든 오만함이 두려웠고, 이제 어린 나이가 아니라면 어린아이처럼 떼쓰는 스스로의 꼴이 우스웠다.
함께 하는 삶을 주장하면서도 혼자 살아가는 나의 모순이, 예술을 동경하면서도 마음껏 춤추지 못하는 경직이 미웠다.
미운 마음이 가득한 내게 S는 함께 연극을 보자고 제안했다. 마침 표가 생겼다고 S가 연락을 해왔을 때 나는 침대에 누워있었다. 글이 써지지 않고, 읽히지도 않아 잔뜩 성이 나있던 차였다. 나는 왜 무던하지 못한 사람인지, 급하고 좁은 성정을 탁하고 있던 때였다.
오랜만에 국립극장을 찾았다. 공연을 안 본 지 꽤 오래됐다는 걸 그제야 깨달았다. 이렇게 게으른 배우라니. 스스로가 또 한 번 미워졌다.
사위가 어두워지고 조명이 켜졌다. 초췌한 영원의 모습이 나와 닮아있다고 생각할 무렵, 플라스틱을 골라내는 지혜와 소방관인 정현이 등장했다. 둘은 가난 속에서 영원을 키웠다. 둘은 서로를 사랑했고, 영원을 사랑했고, 세상을 사랑했다. 세상을 사랑해서 쓰레기를 처리하고 불길 속에서 고라니와 소를 구해냈다. 정현은 폐암에 걸려 세상을 떠났고, 정현을 떠나보낸 지혜는 20년을 더 살다 범람하는 개천으로 수달을 찾아 떠났다.
수달.
극에는 지혜가 찾아 떠난 수달 세 마리가 등장한다. 그들은 각각 지혜, 정현, 영원과 연결된다. 사람들의 손에 의해 생존 본능을 잃고, 사람들의 손에 의해 버려진 수달. 어떤 수달은 사람들을 위해 춤을 추고, 어떤 수달은 사람들을 의심했으며, 어떤 수달은 사람이 던져준 과자를 먹다 과자 봉지 속에 든 플라스틱 조각을 삼켜 죽는다.
무섭다.
고 생각했다. 수달은 비인간 동물이 되고, 노인이 되고, 어린이가 되고, 여성이 되다가, 내가 된다. 그물처럼 이어진 세계가, 돌고 돌아 나를 찾아올 것들이 두려웠다. 반복적으로 범람하는 서울 도시의 개천에 버려져 둥지도, 구슬도 잃는 수달이 서울 한복판에 덜렁 남겨진 내 모습과 자꾸 겹쳐져, 그 모든 걸 외면하는 비겁한 사람이 되고 싶어졌다.
희망.
연극은 희망적인 설정을 제시하며 끝이 난다. 무엇이든 될 수 있는 투명한 구슬, 투명한 세계, 투명한 사람들을 비추면서. 지겨운 세상을 사랑하며 살고 싶어졌다. 미운 세상을, 미운 구슬을, 미운 나를 어여삐 여기면서. 그물처럼 이어진 세계를 가엾게 사랑하면서.
서울 도심의 개천에서 발견된 작은 발톱 수달.
서울 도심의 한 복판에서 발견된 나.
우리가 서로 기대 끝까지 살아남길, 그리하여 부디 건강하고 행복한 엔딩으로 끝나길 빌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