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우리집 게스트하우스에서 함께 사는 일은 편치 않았다. 무엇보다 사위 눈치를 보는 일이 문제였다.
“내가 왜 사위 집에 사노?”였다.
손녀인 유진이도 “할머니, 이제 할머니 집은 어디에요?, 우리집이 바로 할머니 집이
에요”를 그렇게 설명을 해 드려도 엄마는 금방 잊어버렸다. 사람과 공간, 기억과 현실이 충돌하는 순간이었다. 집이란 단순한 물리적 장소가 아니라, 존재의 기준이자 마음이 놓이는 자리다. 엄마는 자신의 ‘집’을 찾아 헤매며, 여전히 자기 삶의 주체로서 존재하려 했다.
환경을 바꾸는 일이 치매 환자에게 좋지 않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하지만 변화를 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서울로 와서 우리집에 살다가, 가까운 집으로 또 이사를 했다. 엄마는 갑자기 환경을 두 번이나 바꾸었다. 엄마도 힘들었지만, 우리도 하루에 몇 번씩 두 집을 오가며 빨래를 들고 날랐다. 일상의 반복 속에서 하루를 종종걸음을 치면서 이어갔다.
엄마는 조금만 섭섭해도 말했다.
“내가 여기 너무 오래 있었지. 너를 힘들게 했네. 내일은 가야지.”
“엄마, 여기는 엄마집이에요. 내가 엄마집에 와서 사는 거예요”라고 말해도, 엄마는 금세 보따리를 들고 나가려 했다. 어느 순간부터는 ‘내일 가겠다’는 말로 바뀌었다. 오빠를 부를까요? 하고 물으면, “아니,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한다”며 화를 내셨다. 오빠집에는 안 가고 싶다는 것인지 알 수없었지만, 그 순간은 존재의 의지와 기억의 혼란이 교차하는 순간이었다.
이사로 갑자기 환경을 변화시키는 것이 힘들까 봐 걱정이 되었다. 센터에서 돌아오면서도 먼저 우리집에 자주 가서 머물렀다. 잠잘 때가 되어서야 엄마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저 집, 이 선생집에 불이 켜 있나 봐라!”
“불이 켜진 집은 다른 집이에요.”
“우리가 그 집에 왜 가노?”
“엄마, 이제 저 집은 엄마집이에요.” 엄마는 아직도 울산에서 살았던 오래전 시절, 우리가 빌려 살던 2층 집을 기억하고 있었다. 지금 새로 이사한 집은 1.5층, 구조와 높이가 비슷하다는 이유로 그 기억 속 집과 혼동하는 듯했다. 치매라는 현실 속에서도, 과거와 현재가 겹쳐진 시간 속에서 엄마는 여전히 자신의 세계를 살아가고 있었다.
심지어 엄마의 집으로 이삿짐을 옮긴 뒤에도 며칠 동안은 우리 집에서 지냈다. 갑작스러운 변화를 주는 것이 좋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이사를 온 후, 엄마는 침대에서 자고, 나는 같은 방의 방 바닥에서 잤다. 엄마는 “같이 침대에서 자자”고 하셨지만, “엄마, 더워서 같이 잘 수 없어요. 그리고 같이 자면 잠을 푹 잘 수 없어요”라고 말했다. 그럼에도 엄마는 “그러면 당신이 방바닥에서 자겠다고?” 하셨다. 나는 엄마 옆에 바짝 붙어 누어서 “엄마, 엄마” 하면서 비위를 맞출 줄 아는 그런 딸이 아니었다. 갑자기 그런 딸로 변신할 수도 없었다.
새로 이사한 집에 적응해야 하는 일도 만만치 않았다. 엄마는 그 집을 남의 집이라고 하시며 들어가기를 거부했다. 그저 우리가 살던 집으로, 평소 생활하던 방으로 가겠다고 하셨다. 결국 엄마를 모시고 집 앞에서 한참을 설득해야 했고, “간다, 안 간다” 하며 실랑이를 벌이다가 억지로 모시려던 순간 함께 길바닥에 넘어지기도 했다. 엄마가 크게 다치지 않았을까 걱정이 밀려왔고, 동시에 참을 수 없는 화도 치밀었다. 다행히 지나가던 분이 우리를 일으켜 주셨다. 그분은 “저도 엄마를 잘 못 돌보고 있어요”라며, 자기 사정을 들려주면서 나를 이해하려 애써 주셨다. 그 말에 마음 한쪽이 조금 누그러졌다.
엄마에게는 아들 셋이 있었지만, 어느 집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들들은 엄마를 잘 돌보려 애썼지만, 남자라는 한계가 있었다. 요즘 며느리들이 누가 시어머니를 돌보겠는가. 나도 며느리이니 백 번 이해한다. 다행히 시누이 둘은 자신들의 엄마, 시어머니를 직접 돌보겠다고 했다. 오히려 나에게 “딸이 혼자라 엄마를 돌보기 힘들겠다”며 걱정을 해 주었다. 환자를 돌보는 일에는 딸들이 아들들보다 훨씬 섬세하고, 감정교감도 잘 되기에 딸들의 몫이 되고 있다. 그래서 요즘 들어 “딸이 없으면 어쩌겠냐”라는 말이 새삼 빛을 발하고 있다.
엄마 방에 엄마가 좋아하실 만한 옷들을 골라 정리해 걸어 두었다. 이 옷, 저 옷을 입어보며 작은 즐거움이라도 느끼셨으면 했다. 속옷과 양말도 잘 구분해 두었으니, 엄마가 스스로 챙겨 입을 수 있을 거라 믿었다. 하지만 엄마는 보이는 옷을 모조리 껴입으셨다. 심지어는 겉옷 위에 얇은 옷을 겹쳐 입고, 그 위에 또 다른 옷을 포개어 입었다. 옷은 속옷부터 하나하나 챙겨 드리며 입혀야 했다. 앞뒤를 구분해 입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하는 일이 되었다.
옷을 챙겨 드린 뒤 잠시 다른 일을 하고 있었다. 대충 훑어보니 제대로 입으신 것 같아 안심했는데, 다음 날 옷을 갈아 입히다가 깜짝 놀랐다. 내 런닝 두 개를 겹쳐 입고 있었다.작은 런닝을 껴입고 하루 종일 얼마나 답답하고 조였을까 생각하니 마음이 무너졌다.
“엄마, 왜 내 런닝을 입었어요?”
어떤 날은 내 팬티까지 겹쳐 입고 계시기도 했다. 그날 이후로 내 옷과 속옷은 모두 내 방으로 옮겼다. 엄마의 속옷과 겉옷도 최소한만 남길 수밖에 없었다. 보이는 대로 옷을 껴입는 마음이 왜 그런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저 왜 이런 사람으로 변해 가는 걸까, 짜증과 화가 치밀어 올랐다. 가끔 엄마는 마치 겨울을 몇 겹씩 통과하려는 사람처럼 보였다.
엄마 방에 있던 물건들도 하나 둘 정리해야 했다. 엄마는 손에 잡히는 대로 가방에 넣고, 이것저것을 뒤섞어 놓곤 했다. 처음엔 ‘정말 취미처럼 느끼시는 걸까?’싶을 만큼 열심히 싸 두고 엉뚱하게 정리를 하고 있었다. 가방에 늘 싸길래 가방을 다 치웠더니, 때로는 보따리에 싸기도 했고, 조금 큰 옷을 보자기 삼아 싸 두기도 했다.
싸 둔 것들을 풀어보면 엄마의 손끝이 얼마나 야무진지, 오히려 놀랄 때가 많았다. 겉으로 보기엔 아무 의미도 없어 보이는 시간들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것이 엄마가 이 시간을 견디는 방식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혼란 속에서도 하루를 이어가 보려는, 엄마만의 작은 몸짓이라 믿어보기로 했다.
두 집 살림이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정신이 없었다. 길에서 핸드폰을 잃어버려서 찾느라 진땀을 빼기도 했다. 어떤 날은 작은 손가방이 어디 있는지 몰라 이 집 저 집을 오가며 찾아다니느라 혼이 났다. 하루에도 열 두 번씩 물건을 들고 옮기는 일이 반복되었다. ‘내가 이걸 계속할 수 있을까…’ 속으로 되뇌이며 지쳐가는 나를 느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요령이 생겼다. 무엇보다 엄마와 보내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게스트하우스에서 몸을 빼서 내오는 여유도 생겼다. 손님들에게는 조금 미안했지만, 필요한 것들을 미리 챙기고 돕는 방식은 나와 엄마 모두에게 도움이 되었다. 그래도 피곤함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한편으로, 집에서 늘 손님을 돌보며 느끼던 피곤함은 조금 덜했다.
엄마와 함께 보내는 하루하루 속에서, 나는 조금씩 안정과 평화를 찾아가고 있었다. 피로와 혼란 속에서도, 엄마와 내가 함께 있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하다는 것을 서서히 배워갔다. 그러면서 엄마 곁에 머물며 느껴지는 감정들과 그날그날의 사실들을 자세히 관찰해 메모하기 시작했다. 지금까지의 변화와 내가 겪은 일들을 조금씩 적어 내려갔다. 글을 쓰다 보니 그것은 기록이자 공부가 되었고, 엄마의 치매를 이해하는 나만의 언어가 되어갔다. 이해하지 못해 화부터 내던 마음도, 그만큼 천천히 자리를 바꾸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