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세 치매 엄마와 찾아낸 작은 기적들

by 김영연

엄마의 삶이 모든 점에서 무의미해져 가는 것처럼 보였다. 치매가 깊어지면서 일상의 동력이 하나씩 사라지고, 집에 가만히 앉아 있는 시간이 늘어났다. 물론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세살짜리 아이가 집안에서 사고를 치는 것처럼 엄마도 잠시만 한 눈을 팔면 엉뚱한 일을 벌여놓곤 했다. 나는 물었다. “엄마의 삶을 다시 의미 있는 삶으로 바꿀 수 있을까?” 그 질문이 간병을 잘 해보고 싶은 욕심으로 이어졌다.

평생 누군가의 감정을 대신 받아내며, 아버지의 눈치를, 자식과 며느리의 눈치를 살피느라 엄마의 마음에는 늘 작은 상처들이 붙어 있었을 것이다. 둘째로 태어난 삶의 방식이, 결국 엄마의 인생 전체의 방식이 되어버린 셈이다. 엄마는 평생 누군가의 얼굴을 먼저 바라보고 그들의 감정을 먼저 짊어지는 방식으로 책임을 실천해왔다. 하지만 그 책임은 종종 엄마 자신의 삶을 비워낸 자리에서 이루어졌다. 나는 그동안 엄마가 드시지 못한 것을 드시게 하고, 가보지 못한 곳에 모시고 가고 싶었다. 누리지 못한 것들을 최대한 누리도록 해 드리고 싶었다. 엄마의 엄마다움, 가장 여성스러운 엄마의 존재 자체로 잠시동안만이라도 살게 하고 싶었다. 그 모든 순간을 기록으로 남겼다.


치매에 걸리더라도 진행 속도를 늦추는 방법이 있다고 했다. 치매를 더 이상 공포의 대상으로 볼 필요가 없다는 말을 듣고 지금 할 수 있는 것들을 실천해 보기로 했다. 인지치료, 미술치료, 심리치료, 음악치료, 운동치료, 사회 활동 치료 등을 주변의 도움을 받아 나름대로 하나씩 해 나갔다. 치매환자라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이 아니었고, 엄마의 삶의 질도 높여드리고 싶었다. 그리고 이런 활동들을 해 가다 보면 뇌건강만이 정신과 육체에도 분명 큰 도움이 될 것 같았다.


세계보건기구는 뇌 건강은 거창한 계획이 아니라 매일의 작은 습관에서 비롯된다고 했다. 걷기, 웃기, 수면, 균형 잡힌 식사, 사람과의 연결등…이 단순한 일들이 뇌를 오래 지켜주는 가장 큰 힘이라는 말을 믿기로 했다.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을 때 할 수 있는 일을 찾기로 했다.

- 뜨개질

엄마가 무료하지 않도록 나는 뜨개질을 다시 권했다. 한때는 동생이 “자세가 더 나빠질까 봐, 치매를 더 악화시킨 건 아닐까” 하는 불안에 뜨개질 가방을 멀리 던질 정도로 걱정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생각이 달라졌다. 엄마가 무엇이든 한다는 것 자체가 다행이었다. 그래서 조금씩, 오래 집중하지 않도록 조절해가며 엄마는 다시 수세미를 짜기 시작했다. 남대문 시장에서 엄마와 직접 고운 실을 골라 사 왔고, 엄마는 집에 오는 사람마다 수세미를 하나씩 건넸다. 그 수세미들은 일본으로, 미국으로, 독일로 날아갔다. 그 이야기에 엄마는 더 신나서 뜨개질에 몰두했다. 그 순간만큼은 치매 환자가 아니라, 그저 원래의 ‘우리 엄마’였다.

- 꽃들과 대화, 사진찍기

산책길의 꽃들은 늘 엄마와 나를 멈춰 세웠다. 나는 일부러 꽃 이름을 묻기도 하고, 엄마 가까이에 서서 사진을 찍어드리기도 했다. 여름날, 담장 아래 능소화가 활짝 피어 있으면 우리는 매번 그냥 지나치지 않고 잠시 멈춰 사진을 찍었다.

이번에는 엄마가 직접 찍어보도록 도왔다. 꽃 가까이서, 멀리서, 사람 중심으로…엄마는 서툴고 조심스러워했지만 사진을 찍는 순간만큼은 무언가에 참여하는 사람이었다. 엄마가 찍은 사진을 가족 단톡방에 올리면 “우리 엄마 사진사 다 됐네!”라는 댓글이 달렸고 그것을 읽어드리면 엄마는 웃었다.

- 사진 모델 하기

“엄마, 이런 표정도 지어보세요.” 처음에는 어색해 하시던 엄마도, “이렇게?” 하면서 조금씩 다양한 표정을 지어 주셨다. 내가 앞에서 하트 모양도 다양하게 만들어 보이며 사진을 찍으면, 엄마도 따라 하며 즐거워하셨다. 그렇게 꽃과 사진은 우리 둘만의 작은 놀이이자, 산책길의 특별한 순간이 되었다.

행복을찍는사진사께서는 계절이 바뀔 때마다 풍경이 가장 아름다운 곳에서 우리 3대 세모녀를 화보처럼 멋진 작품의 사진을 찍어 주셨다. 엄마와 함께 찍은 사진이 많지 않았던 우리에게, 이날은 정말 귀한 선물 같은 시간이었다. 엄마가 평생 찍었던 사진보다 더 많은 사진을 찍었다. 엄마는 그 사진들을 보고 또 보고, 그저 즐거워하셨다.

대학로 연극센터에서 무대복을 입고 찍은 인생네컷도 엄마에게는 놀이였고, 우리에게는 잊히기 전에 남겨야 하는 기록이었다. 베스킨라빈스에서는 젊은이들처럼 아이스크림을 맛있게 먹었고, 학림다방에서는 비엔나 커피를 시켰다. 동대문 쌍화차거리에서는 더쌍화를 마셨고, 성북동 금옥당에서는 단팥죽과 쌍화차를 곁들여 이층에서 거리를 내려다보았다. 이대를 한 바퀴 돌며, 엄마가 높은 곳을 걸어 올라갈 수 있을까 걱정하던 순간도 있었다. 하지만 엘리베이터로 쑤웅 올라가, 다시 아래를 내려다보며 즐거워하는 엄마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때로는 일정이 벅차기도 했지만, 엄마는 끝까지 힘을 내 주셨다.

- 성경읽기

시편 읽기를 시작했다. 성경을 읽으면 치매가 좋아졌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고, 나에게도 또 하나의 희망이 되었다. 책을 6분 읽는 것만으로도 스트레스가 줄어든다고 했으니 어떤 일보다 먼저 했다. “내가 이것을 읽을 정신이 있나…” 처음에는 망설이던 엄마도 한 장, 두 장 읽더니, 어떤 날은 30분 넘게 읽었다. 나는 그 모습을 촬영하며, 그 자체가 귀한 순간임을 느꼈다. 엄마의 목소리로 읽어 내려간 시편 150편. 이 목소리는 엄마가 떠나고 나서도 남아 있을 소리의 기록이자, 믿음의 기록이자, 시간의 기록이었다.

어떤 때는 엄마가 “너는 왜 성경도 안 읽고 나만 읽으라고 하노?”라고 말씀하시기도 했다. 나는 “엄마가 읽는 것이 듣기가 좋아서요. 엄마 많이 읽어 주세요! 엄마가 읽은 것을 사람들이 많이 보고 있어요.”라고 대답했다. 그 말을 듣고, 나도 엄마를 따라 다시 성경을 읽기 시작했다. 엄마의 말대로 엄마만 읽게 하는 것이 양심에 찔렸다. 내가 화가 난 날에도, 엄마는 나를 보라는 듯 혼자서 성경을 읽고 계셨다. 마치 나에게 점수를 따려고 하는 것 같아 안쓰럽기도 했다. 한 번 리듬을 놓친 뒤 다시 성경책을 펴고 읽는 일에 집중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이제 와서야 실감한다. 그동안 엄마가 이렇게 잘 따라와 주셨다는 사실만으로도 감사한 마음이 든다. 성경쓰기도 도움이 될 것 같아 시도를 하고 있는데 읽는 것만큼 쉽지는 않다.

- 어디가나 기도하기

식사기도는 물론, 엄마에게 기도를 부탁하는 일은 마치 축복권을 드리는 것처럼 여겨졌다. 그래서 누구를 만나든 늘 말했다.

“엄마, 기도해 주세요.”

처음에는 왜 맨날 자기에게만 기도를 시키느냐며 못마땅한 기색을 보이지만, 막상 시작하면 기도는 청산유수였다. 기도하며 했던 말을 또 하고, 어디에서 끝내야 할지 몰라 같은 자리를 맴돌기도 했다. 그럴 때면 엄마를 툭툭 쳐 드리면, 그제야 알아차리고 기도를 마치곤 했다.

주기도문과 사도신경은 일어나면서도, 잠들기 전에도 늘 외우며 기도하자고 했다. 누워서 기도하면 안 된다며, 언제나 꿇어 엎드리거나 앉아서 기도하려고 하셨다.


- 산책하면서 찬송가 부르기

틈만나면 걸었다. 그러다가 엄마가 잘 아는 찬송가를 부르도록 했다. 엄마는 찬송가의 가사를 기억하고 있는 것이 많다. 노래를 부르면 천연 진통제인 베타 엔도르핀과 같은 신경 화학 물질이 분비된다고 한다. 그리고 노래를 부르려면 폐를 움직여야 하므로 호흡기 근육이 강해져서 숨을 쉬기가 훨씬 편하다고 했다. 노래부르기는 유산소운동이라고 했다. 노래를 부르면 우리 기분을 좋게 하고 활기를 주어 면역력까지 강해진다고 했다. 찬송가를 부르면서 은혜를 만끽하면서 건강까지 챙길 수 있었다.

- 인스타그램 계정 만들기

엄마의 일상을 세상과 소통하고, 가족들과 나누기 위해 [치매가 시작된 87세 옥란할머니]라는 이름으로 umma_why 인스타그램 계정도 만들었다. 엄마의 하루는 늘 사진과 영상으로 기록되었다. 하지만 엄마는 자신의 일상이 세상 사람들과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기 어려워하셨다. 영상을 보여 드리면 “너무 늙어서 보기 싫다”며 실망한 표정을 지으셨다.


그럴 때마다 나는 말했다. 친척들과 가족들, 그리고 심지어는 엄마를 모르는 사람들도 엄마를 보고 있다고 이야기해 드렸다. 엄마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궁금해하고 엄마를 응원하고 있다고 하면 엄마는 다시 얼굴이 풀어졌다. 사람들이 영상을 보고 “치매 환자인 줄 모르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 한 문장을 듣기까지, 이 장면에 이르기까지 엄마를 얼마나 많이 격려하고 설득했는지는 나만 알고 있다.


- 예닮 퍼즐아, 정말 고마워!

엄마는 원래 집중력과 성취감이 강한 분이셨다. 그런데 이제는 집중이 몇 분도 이어지지 않고,

“이제 와서 이걸 해서 뭘 하겠니.” 라며 많은 일에 흥미를 잃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퍼즐에 빠지셨다. 한두 시간씩 꼼짝도 하지 않고 집중하셨다. 내가 “퍼즐 박사님이네, 이제 대회에 나가셔야겠어요” 하고 부추겼더니, 더 신이 나서 어떤 날은 35개짜리 퍼즐을 네 판이나 하기도 했다.

그러다 건강 상태가 좋지 않았던 때가 있었다. 그때는 그렇게 좋아하던 퍼즐조차 까맣게 잊은 듯 엉터리로 하셨다. 순간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이제 이것마저 못 하게 되면 어떡하지?’ 하지만 몸이 조금 회복되자, 다시 아침저녁으로 퍼즐을 붙잡고 계신다. 때로는 105개짜리 퍼즐도 누군가와 함께하면 즐겁게 참여하신다. 물론 조각과 퍼즐판에 번호를 적어두고 하시지만, 그마저도 괜찮다. 퍼즐에 쓰인 숫자를 하나하나 찾아 퍼즐판을 살피고, 그 숫자 위에 맞는 조각을 이리저리 대어보다가 딱 맞아떨어질 때의 쾌감을 즐기신다. 그리고 마침내 퍼즐을 완성하고 나면, 성취감에 젖어 늘 뿌듯해하신다.

이렇게 몰두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어떤 날은 잠을 안 자더라도 다 해놓고 자야 한다고 하시기도 한다. 무언가에 몰입하면 심박수도 낮아지고, 근육 긴장도 풀리며, 두뇌에도 좋은 영향을 준다고 한다. 그래서 더없이 감사한 일이다.


- 시내버스를 타고 서울을 누비다

301번 시내버스를 타고 서울 관광을 했다. 차창 밖으로 스쳐 가는 풍경마다 엄마는 늘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동대문시장을 지날 때는

“저기 무슨 일이 있길래 사람들이 저렇게 많노?” 하고 물으셨다.

“엄마, 동대문 시장이니까 사람이 많은 거예요.”

엄마의 기억은 지금 어린 시절로 돌아가 있기 때문에, 모든 것이 시골에서 갓 올라온 눈으로 보였다. 울산에서도 살았고, 가끔 서울에도 오셨지만, 그 기억은 희미했다. 그래서 모든 것이 새롭고 놀라울 뿐이었다.

한강 다리를 지나며 즐비한 아파트를 보시고는,

“무슨 아파트가 저렇게 많노?” 하고 물으셨다.

“엄마, 저 아파트들이 제일 비싸요. 한강을 바라볼 수 있어서 얼마나 비싼지 몰라요.” 엄마한테 설명해 줄게 많았다.

“엄마, 저기는 갤러리아백화점이에요.”

“엄마, 저게 갤러리아 백화점이에요. 명품을 파는 곳인데, 아주 비싼 물건만 팔아요.” 명품과는 상관없이 살아온 엄마에게 명품에 대한 설명을 해 드리는 일은 쉽지 않았다. 그렇게 삼성동 코엑스까지 갔다. 코엑스 앞은 한창 공사 중이었다.

“빌딩들이 왜 이리 다 높노?”

“엄마, 저 높은 빌딩이 우리나라에서 제일 높은 건물이에요.” 123층이라고 말해도 엄마는 별 미동이 없었다. 아마도 그 높이를 느끼지 못한 듯했다.

“예전에는 여의도 63빌딩이 제일 높았는데, 지금은 잠실에 있는 롯데타워가 제일 높아요. 저기도 한번 가볼까요?”

“아이고, 그런데는 안 가도 된다.” 그래도 123층 빌딩을 배경으로 사진 한 장은 남겼다. 잠실 별마당 도서관에도 들러 에스컬레이터를 오르내리며 젊은이들 틈에 끼어 인증 사진도 찍었다.

현대백화점에 들러 맛있는 식사를 하며, 그렇게 하루 동안 서울을 만끽했다.

늙고, 치매 환자가 되었어도 엄마는 결코 무력해지지 않았다.


버스에 앉아 바깥 경치를 바라보며, 엄마의 옛날 이야기도 실컷 들었다.

강남도 가고 신촌도 버스를 타고 갔다. 파란색 버스를 좋아하는데, 아마도 엄마가 어릴 적 신작로에 다니던 버스 색깔이 파란색이 아니었나 싶다. 그래서 주로 파란색 버스를 타고 다니곤 했다.

엄마는 외출하는 것을 좋아했다. 외출을 하면 행복감이 훨씬 높아진다고 했다. 어떤 날은 피곤하고 할 일이 있어도 다 접어두고 엄마를 따라 나가야 했다. 다음에는 2층버스를 타고 서울시내를 누비는 경험도 해 볼까?


- 일요일의 수난

토요일 오후와 일요일, 그리고 공휴일에는 엄마와 함께 보내야 할 시간이 유난히 길다. 특별한 계획이 없으면 서로가 지쳐 가는 날들이었다. 토요일 오후, 엄마가 네 시쯤 집에 돌아오시면 함께 목욕탕에 가거나 동대문시장을 들러 저녁을 먹고 오기도 했다. 그렇게 하루를 천천히 마무리했다.


일요일 아침이면 엄마는 늘 센터에 가야 한다며 일찌감치 나갈 채비를 하셨다. 몸에 밴 습관 때문이었다. 돌발 상황이 이어지는 일요일 아침이었지만, 주일에는 교회에 가시니 그나마 반나절쯤은 숨을 돌릴 수 있었다. 오후에는 할머니 옷가게에 들러 또래 할머니들과 시간을 보내기도 했고, 어떤 날은 예배를 두 곳에서 드리기도 했다.

설교가 조금만 길어져도 엄마는 늘 한마디를 하셨다.

“설교가 좀 길다.”

사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다만 때로는 그 말을 큰소리로 내뱉는 바람에, 옆에 있던 나는 깜짝 놀라기도 했다.


엄마의 삶이 무의미해진 줄 알았던 시간은, 사실 새로운 의미를 발견해가는 과정이었다. 뜨개질 하나, 사진 한 장, 성경 한 줄, 꽃의 향기 등…모든 것이 조각처럼 모여 엄마의 하루를 다시 의미 있는 삶의 퍼즐로 채웠다. 그 과정에서 엄마도 변화했고, 나도 변했고, 엄마의 세계는 아주 천천히, 그러나 분명하게 다시 빛을 얻었다.

그렇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은 날조차 의미를 찾아 만족했던 날보다 오히려 더 큰 의미가 있다는 것을 차츰 알게 되었다. 하루를 온전히 잘 보내기보다, 때로는 아침만이라도 무사히 맞이할 수 있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일인지, 그때마다 새삼 깨닫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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