딱 그 정도만 기억해도 괜찮아요

by 김영연

혜화동 골목을 한 바퀴 돌며 데이케어 센터에 오가곤 했다.

“엄마, 허리에 손 얹고 등을 쭉 펴봐요.”
이 말은 어느새 잔소리이자 노래처럼 매일 따라붙는 멜로디가 되었다.

햇살 좋던 날, 노란 국화가 만개한 골목에서 우리는 잠시 발걸음을 멈췄다.
“저기 노란 꽃 이름이 뭔지 알아요? 향기 참 좋죠?”
“높은 데 있어서 잘 안 보이네.”
“작은 국화, 소국이에요.”
“작을 소, 소국이라… 아, 그렇구나.”
“우리 엄마, 한자도 잘 아시네!”

엄마가 소국이라는 말뜻을 알아듣는 순간, 나는 문득 웃음이 났다. 아주 작은 이해 하나가 하루를 밝히는 등불이 되었다.


조금 더 걸어 올라가면, 학교 담장 너머로 매일 우리를 내려다보는 나무들이 있다.
“엄마, 저 나무 이름이 뭐예요?”
어제도 그제도 물었던 질문인데, 나는 또 묻는다.
어느 날 내가 깜빡 잊고 지나치자, 이번엔 엄마가 먼저 물었다.
“오늘은 왜 나무 이름 안 물어?”

기억은 조금씩 먼지처럼 흩어져 가지만, 그 속에서 여전히 반짝이는 ‘엄마의 앎’이 있었다.
“저건 가시개뽕나무야. 잎이 가시개처럼 생겼잖아.”
“가위가 가시개였지?”
“응, 맞아.”

그러다 문득 엄마가 골목 저편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리고 저건 가죽나무… 외갓집 앞에 있었잖아.”

가죽나무 이야기가 나오자 엄마의 목소리가 눈에 띄게 환해졌다.

“그 잎으로 가죽자반도 해먹었지.”
“엄마, 가죽자반은 어떻게 만드는 거예요?”
“찹쌀풀 묻혀서 말려서 튀겨 먹는 거지!”
“맞아요. 고추장에 묻혀 말린 것도 맛있었어요.”

오래된 기억을 조심스레 꺼내어 엄마에게 되묻고, 엄마는 잠시 나를 바라보다가 미소 지었다. 그 짧은 웃음 하나가 내 아침을 환하게 밝혔고, 잠이 덜 깬 마음에 따뜻한 빛이 스며들었다.


어릴 적 나는 가죽 잎 반찬을 좋아하지 않았다. 향이 너무 강해서였다. 그러나 어느 해 중국에서 살 때, 시장에서 여린 가죽 잎이 돼지고기보다 비싸게 팔리는 걸 보았고 그 순간 멈칫했다.
‘이 향이 나는 가죽이 비싼 이유가 분명 있겠지.’

그해 나는 가죽잎을 사 와 무치고, 전을 부쳐 먹으며 조금씩 그 향의 깊이를 배워갔다.
요즘도 그 향이 그리울 때면 큰외숙모께 전화를 드렸다. 외숙모가 정성껏 보내주신 가죽 잎 반찬 봉지를 열 때면, 나는 늘 같은 곳으로 돌아갔다.

햇빛이 스며들던 외갓집 앞마당.
바람에 흔들리던 가죽나무.
그 아래서 나를 부르던 막내이모의 목소리.

입에 넣기도 전에 이미 그 시절의 빛과 공기, 사람들의 온기가 먼저 밀려왔다.
가죽 잎 특유의 쌉싸래한 향은 내 유년의 문을 여는 비밀번호 같아서, 한 점만 맛보아도 잊었다고 생각했던 얼굴과 웃음소리까지 되살아났다.


하루의 시작은 늘 같았다.
식사, 약, 그리고 산책.

꽃을 보고, 찬송가를 부르고, 나무 이름을 맞히는 놀이를 하면서 엄마의 기억이 피어나는 시간이 더 없이 소중했다. 따스한 햇살, 나무 아래의 시원한 그늘, 높은 하늘의 뭉게구름, 살랑이는 바람이 엄마에게 꼭 필요했기에 이 모든 것들에 대해 감사를 새삼 더 느끼고 살아가고 있다.

나는 그 반복 속에서 배운다.
같은 하루는 하나도 같지 않다는 것을.

그리고 엄마가 오늘 웃었다면—
그건 새로운 하루가 가져다준 작은 기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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