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환자가 되고, 내가 간병인이 되다

by 김영연

치매엄마를 돌본다는 건 곧 내 시간을 온전히 내어드리는 일이 되었다. 데이케어센터에서 돌아오신 저녁 여섯 시부터 다음 날 아침 아홉 시 반까지, 그 시간은 전부 엄마의 시간이었고 그 안에는 나의 시간은 없었다. 외출도, 장보기도, 심지어 집 안에서의 작은 일도 엄마를 혼자 두고는 할 수 없었다.

“엄마, 여기에 잠깐만 앉아서 기다리세요.” 그 말은 더 이상 통하지 않았다. 음식을 챙겨드리고, TV를 켜드려도 금세 일어나 밖으로 나가려 하셨다. 내가 곁에 없으면, 아니 때로는 같이 있어도, 엄마는 금세 사라지고, 집 밖을 나가는 분이 되었다. 잠시 한눈을 팔고 있는 사이에 과일 접시는 서랍 속에, 먹다 남은 음식은 가방 속에, 물건들은 예측할 수 없는 곳으로 이동했다. 하루하루가 ‘어디에 있는지 모르는 것들’의 기록이 되었다.

· “엄마 양치해야지요.”
“센터에서 양치하고 왔는데 뭐하러 또.” 칫솔에 치약을 묻혀서 손에 쥐어 주어도 입을 꾹 다물고 눈을 감고 그대로 변기에 앉아있었다.

· “엄마 목욕해야지요.”
“아침에 씻었는데 또 씻나?” “냄새나니까 씻어야해요.” “냄새는 무슨 냄새가 난다고 하노?”

· “엄마 이 옷이 더 예뻐요.”
“옷도 내 마음대로 못 입나?” “바지를 두개나 껴입으면 활동하기 불편해요. 이 옷 위에는 이게 더 잘 어울려요.

· “엄마 식사하셔야지요.”
“금방 먹었는데 뭐하러 또 먹노.” 내가 또 먹어야 하나? 안먹어야하나 모르겠다면서 머리를 감싸쥔다. 음식 앞에 보이는 것에 집중하시느라 먹는 건 뒷전일 때도 많았다. 그래도 다행히 드시는 것은 욕심 내지 않았다. 화장실을 자주 가기 싫다는 이유로 스스로 조절하셨다.

· “엄마 약 드셔야죠.”
“이 약 무슨 약인데 맨날 먹으라 하노? 안 먹어도 된다.”

처음에는 설명하고 설득하고, 또 설명했다. 하지만 결국 이길 수 없었다. 그리고 나도 안다. 나는 사근사근하게 달래는 성격이 아니라 어느 순간 화가 잔뜩나서 윽박지르고 있었다. 화날 때 심호흡 몇 번 “엄마, 제발 그건 아니에요!” 말하고 후회하고, 또 다짐한다.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며, 다시 ‘엄마의 세상’으로 들어간다.


간병인으로서는 턱없이 부족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도 엄마와 부딪히는 순간마다 ‘이렇게라도 신경전을 벌여야 뇌에 충격이 조금이라도 가해져서 굳었던 뇌가 살아나서 정신을 차릴까’ 스스로에게 핑계를 대며 견디곤 했다.


아침에는 그저 식사만 챙겨드리면 되는 줄 알았다. 하지만 아침이 오면, 또 하나의 새로운 하루가 열렸다. 엄마는 밥을 드실 때 늘 국을 곁들이셨다. 국이 없는 날에는 물을 자주 찾으셨다. 밥만 먹는 일이 조금은 심심하셨던 모양이다. 빵을 드리면, 손으로 쥔 빵 조각을 천천히 씹으며 뭐가 이리 맛있노라고 했다. 그렇게 작고 소소한 기쁨에도 마음이 움직이는 모습을 보며, 나는 또 한 번 엄마가 하루를 살아내는 감각을 느꼈다.

음식이 딱딱해서도 안 되었다. 치아가 약한데도, 어떤 날은 딱딱한 사탕을 이를 써서 부수어 드시고 계셨다.

“엄마, 사탕은 그냥 천천히 녹여 드시면 돼요. 약한 이로 깨물면 약한 이가 부숴져요.” 그렇게 말을 해도, 습관처럼 다시 깨물곤 하셨다. 너무 무른 음식은 입 안에서 녹아 사라지는 느낌 때문인지 잘 드시지 않았다. 짜고 매운 맛에 대한 선호는 여전히 분명했다. 그 까다로움이 오히려, 혀가 아직 세상을 느끼고 있다는 작은 증거처럼 느껴졌다.


엄마의 옷은 이제 아무 데서나 살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계절마다 면으로 된, 적당한 윗옷과 바지를 고르는 일부터 쉽지 않았다. 윗옷은 단추가 많지 않아야 했고, 입고 벗기가 편해야 했다. 바지는 허리가 고무줄이어야 했다. 화장실에 가서 볼일을 볼 때, 조금이라도 빨리 벗어낼 수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바지통도 중요했다. 너무 좁아도 안 되고, 너무 넓어도 안 됐다.


속옷은 남자 런닝을 샀다. 여름에는 그것 하나로 잠옷이 되었고, 봄과 가을에는 반내복처럼 편안했다. 팬티는 요실금 팬티가 기본이었다. 일자형 기저기를 차야 하는 날에는 더 큰 사이즈가 필요했다. 팬티형 기저기는 밤중에 화장실을 오가야 할 때 오히려 불편했다. 벗어내리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몸을 거의 움직일 수 없는 사람에게는 팬티형 기저기가 더 적합하다는 것도 그때 알게 되었다.


신발 역시 마찬가지였다. 신고 벗기 쉬워야 했고, 뒤축이 약간 단단해 발이 쉽게 들어가야 했다. 발볼이 너무 크지도, 너무 작지도 않아야 했으며, 무엇보다 바닥이 미끄럽지 않아야 했다.


엄마가 좀 편하게 주무시기를 바래서 큰 침대를 마련했다. 혼자 주무시면 불안하실까 봐 나란히 누워 잠을 잤다. 한여름 밤에도 엄마는 내 이불을 덮어주느라 내 잠을 깨우곤 하셨다. “엄마, 더워서 이불 안 덮어도 되니까 이불 덮느라 잠을 깨우지 말아요.” 짜증을 안 부릴 수가 없었다.

어느 날 밤, 코끝을 찌르는 지독한 냄새에 눈을 떴다. “엄마, 오줌 쌌어요?” 방바닥엔 소변이 흘러 있었고, 엄마의 팬티가 벗겨져 있었다. 높은 침대에서 서둘러 내려오다가 그만 참지 못하신 모양이었다. 얼른 목욕을 시켜 드리고 새 옷으로 갈아 입혔다. 또 오줌을 싸면 어쩌지? 잠이 오지 않았다


간병인은 치매라는 병보다, 먼저 사람을 보아야 한다고 들었다. 사랑은 치매조차 멈추게 할 수 있다는 말이 있고, 그 말의 진실을 엄마를 돌보면서 조금씩 확인했다. 치매를 알아간다는 것은 단지 치매에 관한 지식을 공부하는 일이 아니었다. 치매에 대한 의학적 지식 뿐 아니라, 치매와 감정의 관계를 함께 이해하는 일이었다.


치매를 끝낼 수는 없어도, 늦출 수는 있다고 했다. 치매는 종종 나쁜 감정을 타고 찾아온다고 했기에 사랑이 꼭 필요하다고 했는데 실상은 얼마나 어려운 일이었는지 모른다. 치매가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더라도, 고통받지 않았던 사람처럼 회복하지는 못하더라도, 더 이상 고통 속에 머물지 않게 할 수 있도록 힘을 써볼 뿐이다.


치매는 감정이 없어지는 병이 아니라 기억이 사라진다는 말은 여러 차례 들었다. 정말 그랬다. 오히려 감정이 더 깊게 드러나는 병이었다. 기쁨·불안·서운함 같은 감정은 끝까지 남아 있었다. 치매 돌봄은 결코 기억을 더 좋게 하는 일이 아니었고, 감정을 보살피는 일이라는 것을 또 배워가고 있다. ‘치매 환자 돌보는 법’등을 물어보고, 공부를 해 가지만 가장 큰 교과서는

치매 환자인 엄마였다.


엄마는 환자가 되었고, 나는 간병인이 되었다. 그 모든 사실보다 더 큰 진실은 하나였다. 우리는 여전히 ‘엄마와 딸’이라는 것이다. 언제까지 나는 이 관계를 잘 지탱해 갈 수 있을까? 환자와 간병인, 엄마와 딸 사이이를 오가느라 빨리 지치지 않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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