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남편을 그리워하면서 나를 걱정한다. <걱정>은 죽은 사람에겐 더 이상 필요 없는 마음으로 무의미한 감정이 되어버렸다. 그런데 참 이상하다. 나는 늘 남편을 걱정한다. 춥지 않은지? 배고프지 않은지? 외롭지 않은지?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공허한 걱정이란 것을 알면서도 어쩔 수 없다. 나는 남편이 늘 걱정된다.
힘들어하는 나에게 친구가 <천 개의 바람이 되어>란 노래 파일을 하나 보내주었다. 아메리카 원주민의 시에서 유래된 노랫말은 떠난 사람을 그리워하며 힘들어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위로해준다. 나의 마음을 울린 노래. 나는 이 노래를 듣고 또 들었다.
석재로 지은 가족 납골당만 생각하면 혹시라도 그 어두운 곳에서 추울까 봐 무서울까 봐 나는 늘 남편이 안쓰럽고 걱정돼 눈물을 흘렸다. 그런 나에게 노랫말은 속삭였다. ‘나의 무덤 앞에서 울지 마세요. 나는 그곳에 없어요. 그곳에 잠들어 있지 않아요.’라고.
그리고 ‘나는 수많은 바람 되어 넓은 하늘을 날아가고. 가을에는 무르익은 곡식 위에 비치는 햇빛이 되고. 겨울에는 반짝이는 눈꽃이 되어 빛나고. 밤에는 별이 되어 빛난다.’라고 속삭인다. 그렇다. 남편은 별, 햇살, 바람, 비, 자연이 되어 자유롭게 날아다니고 있다고 노래는 나에게 알려줬다.
어디 그뿐인가 ‘아침에는 새가 되어 당신을 깨우고. 밤에는 별이 되어 당신을 지킬 겁니다.’라고. 이처럼 남편은 내 주위에 머물며 나를 보호하고 있다. 그런데 혹시 나 때문에, 내가 걱정돼 저 세상으로 못 떠나는 것은 아닌지?라는 걱정도 잠시 해 봤다. 하지만 그렇게라도 남편이 내 주위에 있기를 바라는 이기적인 마음도 고개를 내민다. 그래서일까 나는 아프면 허공에 말한다. Chéri, j'ai mal au ventre! (여보, 나 배 아파!)라고. 남편이 나를 걱정해주기를 바라며 말을 걸어보지만 다 무의미한 행동일 뿐이다.
맞다. 나는 노랫말에 의지하고 희망을 품고 그리고 실망하고. 정말 내가 왜 이럴까란 생각을 하면서도 그 노래에 담긴 의미를 찾으려는 감정에 휩싸여 살았다. 하지만 그런 세월이 쌓여 지금의 내가 있지 않나 싶다.
드라마 <나의 아저씨>의 엔딩 장면은 나에게 많은 깨달음을 주었다. 남주인공 아저씨는 모든 아픔을 뒤로하고 잘 살고 있는 여주인공 이지안이 너무나 고마웠다. 그는 마음속으로 이지안에게 물어본다. “지안, 편안함에 이르렀나?”라고. 지안은 마음속으로 대답한다. “네!”라고. 그리고 자신이 편안함에 이르렀음을 강조한다. “네!”라고 다시 대답하며.
지안은 아저씨가 정말로 행복하기를 바랐다. 그런 지안에게 "편안함에 이르렀나?”라고 물어볼 수 있는 아저씨. 환한 웃음을 지으며 지안에게 안부를 물어볼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아저씨 자신이 편안함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드라마 속 아저씨처럼 나는 내 아픔을 딛고 일어나 잘 살고 있는 모습을 남편에게 보여줄 수 있을 때, 그리고 남편이 걱정 안 해도 되는 삶을 살고 있을 때 비로소 마음속으로 남편에게 물어볼 수 있을 것이다. “여보, 그곳에서 편안함에 이르렀나?”라고. 그리고 환한 웃음을 지으며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여보, 다시 만날 그날까지 잘 지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