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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은 Feb 04. 2022

아빠와 음악과 나  



"내 방에 장롱은 없어도 커다란 스피커로 음악은 들어야 했어."



젊은 시절 아빠의 방에는 책상만큼 커다란 스피커 두 대와 턴테이블, 책장 하나를 가득 채울 정도였다는 LP판이 가장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저 음악을 듣는 게 좋았다고 했다. 강한 저음이 심장을 두드리는 듯한 느낌과 귀를 간지럽히며 오르내리는 선율이 좋았다고 했다.



나는 20대 중반이 끝나가도록 아빠가 음악을 사랑했다는 걸 몰랐다. TV에서 음악이 흘러나오면 아빠는 하나도 맞지 않는 음과 한 박자씩 느린 템포로 노래를 따라 불렀고, 그건 전혀 듣기 좋은 소리가 아니었다. 한 마디로 말하면 '음치'인 것이다. 가창에 재능이 단 1%도 없는 것은 확실했다. 연주할 수 있는 악기도 없고 관련된 것을 배우고자 하는 의지도 없었다. 듣는 음악도 항상 옛날 노래들이었다. 그냥 보통의 사람들처럼, 아니 그들만큼도 못하게 음악을 듣는 평범한 중년 아저씨일 뿐이었다. 내가 평생 바라 본 아빠는 음악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그에 비해 엄마는 음악을 사랑한다는 게 잘 보였다. 젊은 시절 밴드와 함께 노래를 했고, 노인대학에서 노래를 가르치는 봉사를 했다. 어린 나를 학교에 보낸 뒤 구청에서 운영하는 주부음악교실에 다니며 노래를 배웠다. 엄마는 살림과 육아에 바쁜 와중에도 음악에 대한 끈을 쉽게 놓지 않았다. 엄마는 지금도 좋아하는 노래가 생기면 그 노래를 제대로 배워서 불러 보고 싶다고 하고, 항상 휴대폰으로 음악을 들으며, 요즘 데뷔하는 어린 가수들도 꽤나 많이 알고 있다. 엄마는 외할아버지에게서 가창력을 선물받은 것 같다. 외할아버지도 노래를 굉장히 잘하셨고, 판소리에 지대한 관심이 있으셨다. 외가 친척들 중 클래식음악, 무용, 글, 방송 등 예술분야에 종사하는 가족들도 많은데, 나 또한 어린 시절부터 예술을 동경해 왔고, 실제로 미술이나 악기, 연기 등 예술 분야에 꽤나 재능을 보이기도 했다. 그 동경은 오랫동안 유지되어 공연예술에 대한 꿈을 만들었고, 나는 뮤지컬전공으로 대학을 진학했다. 나의 예술에 대한 재능과 관심은 모두 엄마의 덕분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재능은 어디까지나 내 기준에서 잘하는 것이었고, 세상은 넓고 천재는 많았다. 날고 기는 음악천재들이 많은 이 시대에 나의 평범한 음악적 재능은 아빠의 열등한 음악적 재능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빠는 나의 타고난 예술적 재능에 마이너스를 해버린 사람이었다.



아빠의 옛날이야기를 듣게 된 건 두 달 전쯤의 일이다. 나는 올해 생일을 맞아 턴테이블을 하나 장만했다. 스마트폰 하나만 있으면 터치 몇 번에 선명하고 깨끗한 음질의 음악을 휙휙 바꿔가며 들을 수 있는 세상이지만, 디지털과 함께 성장한 Z세대인 나에게는 느리고 번거로운 아날로그가 새롭게 느껴졌다. 사람은 언제나 새로운 것을 찾기 마련이니까. 돌고 도는 패션처럼 그 시대의 감성이 담겨져 있는 오래된 음향 장비도 새로운 유행처럼 돌아왔다.


턴테이블을 세팅한 후 LP를 올리고 그 위에 바늘을 얹자 LP가 돌아가며 음악이 흘러나왔다. 디지털에서는 들을 수 없는 지직거리는 노이즈 낀 음질과 빙글빙글 돌아가는 LP, 그 위를 긁는 바늘. 무형의 음악이 LP라는 물체로써 존재하고, 내가 그것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이 참 좋았다. (바늘이 LP를 긁는 것으로 어떻게 소리가 나는지 아직도 너무 신기하다.) 방에서 혼자 한참동안 음악을 들었다. 살아보지 못한 시대지만 어쩐지 그리움이 느껴지는 듯 했다. TV나 사람들의 말을 통해 간접적으로 경험한 그 시절이 나의 현실이 되는 순간이었다.


턴테이블의 매력에 푹 빠진 나는 며칠 뒤 자랑삼아 아빠를 불러 턴테이블을 보여주었는데, 아빠는 그것을 보자마자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것을 마주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마치 순간적으로 깊게 과거 그 시절에 다녀온 것만 같았다. 신난 듯 말을 시작한 아빠는 당신이 얼마나 음악을 좋아했는지, 몇 달간 돈을 모아서 산 비싼 스피커의 소리가 얼마나 심장을 둥둥 울렸는지, 하나 둘 모았던 LP가 얼마나 많아졌는지, 방 안에 음악이 가득 차면 얼마나 기분이 좋은지 술술 이야기했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말하는 사람의 눈은 얼마나 반짝이는가. 한참을 말하던 아빠는 왠지 쓸쓸한 표정이 되었다.


"정말 좋아했었는데..."



아빠는 결혼을 하고 오빠와 나를 낳은 뒤 그 모든 것들을 버렸다. 버릴 수밖에 없었다. 작은 신혼집에서 턴테이블과 커다란 스피커, LP를 잔뜩 꽂은 책장이 있을 곳은 없었다. 음악이 자리했던 곳에는 육아용품과 장난감들이 들어섰고, 여유롭게 음악을 감상했던 시간은 사라져버렸다. 아빠는 하루 중 대부분을, 아니 하루종일 일을 하며 보냈다. 자영업을 하는 아빠는 매일 꼭두새벽에 출근했고, 늦게까지 일을 하느라 집에 들어오지 못하는 날도 자주 있었다. 개인적인 일과를 처리할 시간도 부족한 판에 취미는 사치였다. 어떤 새로운 취향을 발견할 시간도, 흥미있어 보이는 무언가를 할 시간도 없었고, 조금이라도 틈이 생기면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아빠의 방을 가득 채우던 음악은 멀어져 갔고 세월은 무심히 흘러갔다. 우리를 채워주면서 당신은 부족해져만 갔다. 나는 그렇게 아빠의 여유를 좀먹으며 자랐다.



몰랐던 아빠의 취미를 알게 되자, 몇 해 전 아빠의 오래된 필름카메라를 발견했던 일이 떠올랐다. 어느 날 우연히 서랍 속에서 필름카메라를 발견한 적이 있다. 내 나이보다도 많아 보였던 그 카메라는 아빠가 젊었을 때 산 카메라였다. 나는 아빠에게 바로 카메라 작동법에 대해 배웠다. 바로 필름을 구매했고, 바로 촬영에 나섰다. 스마트폰이나 디지털카메라로 쉽게 사진을 찍을 수 있지만, 나는 굳이 그 무거운 필름카메라를 들고 다니며 초점을 일일이 수동으로 맞추어 가며 사진을 찍었다. 턴테이블의 아날로그를 사랑하기 전, 먼저 나에게 아날로그를 제대로 느끼게 해준 것이 바로 이 필름카메라였다. 찍은 사진을 바로 확인해 볼 수도 없고 인화를 하는 데 시간도 돈도 드는 이 번거로운 작업을 나는 지금까지도 하고 있다. 여행을 갈 때마다 이 필름카메라를 꼭 챙기며, 이렇게 아빠의 젊은 시절 카메라는 나의 젊은 시절 카메라가 되었다.


그렇게 보니 내가 여행을 좋아하는 것도 아빠와 참 많이 닮아있었다. 짐 싸고 푸는 것도, 돌아다니는 것도 싫다던 엄마, 오빠와는 달리, 아빠와 나는 마치 역마살 낀 것 마냥 이곳 저곳 여행 다니는 걸 좋아한다.


참 신기하다. 20대의 아빠가 즐겼던 모든 취미는 고스란히 20대의 나에게 물려졌다. 필름카메라, 배낭여행, 바이닐음악. 누가 하라고 해서 했던 것들도 아니었고, 그저 내가 좋아서 했던 것들의 모양이 아빠가 과거에 사랑했던 그것들의 모습과 참 닮아있었다. 아빠는 나에게 예술적 재능을 감소시킨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예술적 재능을 준 사람이었다. 공기의 진동을 느끼고 소리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게 해주었다. 무언가를 관찰하고 그것의 순간의 미를 포착할 수 있게 해주었다. 용감하게 새로운 곳으로 향할 수 있게 하고, 낯선 것들을 수용할 수 있게 해주었다.


한 세대를 걸쳐 이어져 온 취향의 모습. 그 시절 호기롭게 세상을 여행하며 사진을 찍고 방 안 가득 음악을 채워 듣던 아빠는 이제 없지만, 그 모습을 빼닮은 나라는 존재가 그 자리를 메꿨다. 어쩌면 세상은 이렇게 돌아가는 것 같다.  



2021년 12월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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