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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은 Feb 19. 2022

Mainstay : 핀란드에서 크로스컨트리 스키를 타며

Mainstay : (무엇의 존재·성공을 가능하게 하는) 중심 


핀란드 라플랜드 사리셀카


3년 전 이맘때 즈음, 핀란드에서 크로스컨트리 스키를 탔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도 난 스키의 ㅅ자도 몰랐다. 한 번도 스키를 탄 적도, 타보고 싶다는 생각도 한 적이 없었다. 높은 곳에 올라가는 걸 무서워하기도 했고 운동신경이 없어 딱히 스포츠를 즐기는 타입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핀란드로 여행을 간 김에 그곳에서 즐길 수 있는 경험을 하고자 크로스컨트리 스키 체험을 신청한 것이었다. 


크로스컨트리 스키는 우리가 아는 보통 스키와는 조금 다르다. 언덕과 평지를 막론하고 눈 위에 스키 폭만큼 파인 홈을 따라 스키를 앞뒤로 움직이며 나아가는 것이다. 편하게 리프트를 타고 언덕으로 올라가는 보통 스키장과는 다르게, 크로스컨트리 스키는 올라가는 것부터 쉽지 않았다. 스키를 신은 채 미끄러운 언덕 위로 홈을 따라 올라가는데 스무 번은 족히 미끄러진 것 같다. 그렇게 미끄러지면 올라온 만큼 혹은 올라온 것보다도 더 뒤로 내려가기도 한다. 스키를 제대로 타보기도 전에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이 들었던 순간이다. 


폴로 바닥을 겨우겨우 짚어가며 언덕에 올라 다른 사람들이 스키를 타며 내려가는 것을 봤다. 차례가 다가올수록 더욱 긴장이 되었는데, 다들 약속이라도 한 듯 똑같은 구간에서 넘어졌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같은 곳에서 넘어져서 길 따라 깊게 파여있던 홈도 그곳은 옅은 자국만 있을 뿐이었다. 홈이 깊게 파여있지 않고 불분명하니 스키는 흔들리고, 흔들리니 중심이 바로 서지 못해 넘어졌던 것이다. 그 말인즉슨, 운동신경도 없고 스키를 타본 적도 없는 나는 분명 넘어질 것이라는 뜻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는 와중에도 사람들은 계속 그 '마의 구간'에서 넘어졌고, 저 사람들이 넘어지는 게 꼭 10분 후 나의 모습처럼 보였다. 



2019년 2월 겨울, 핀란드에서


내려갈 차례를 앞두고 핀란드인 강사가 간단한 트레이닝을 해주었다. "무릎을 굽히고 허리를 숙이고 배에 힘을 주어라. 시선은 계속 앞을 응시하고 팔꿈치를 허리 쪽에 붙이고 폴이 땅에 닿지 않도록 뒤를 향하게 들어라. 이 자세만 유지한다면 넘어지지 않을 것이다." 강사는 직접 자세를 취해 보이며 설명해 주었고 우리도 똑같이 따라 하며 바른 자세를 배웠다. 두세 사람을 먼저 보낸 뒤 곧이어 내 차례가 되었다. 긴장되는 마음에 강사에게 쓸데없이 말도 걸어보았다. "저 스키 처음 타봐서 넘어질까 봐 무서워요." 강사는 웃으며 대답했다. "자세만 바르게 유지해요. 흔들려도 배에 힘 꽉 주고 중심을 지켜요. 제일 중요해요. 그러면 안 넘어질 거고, 스키의 재미를 느낄 수 있을 거예요." 사람 좋은 웃음을 띄우며 말하는 그의 대답에 나는 용기를 얻었다. 그래, 이 자세로만 있으면 될 거야. 하지만 막상 언덕 위에 서서 아래를 바라보니 더 무서워졌다. 내려가기 직전, '마의 구간'의 옅은 홈과 사람들이 넘어지며 만든 자국들을 보며 다시 한번 마음을 다스렸다. 배에 힘 꽉, 중심 지키고 자세 유지! 


온통 하얀 설원 위로 스키를 타며 내려가기 시작했다. 아래로 갈수록 가속도가 붙어 꽤나 빨라졌다. 곧 '마의 구간'이었다. 내 머릿속은 한 가지 생각밖에 없었다. 바른 자세를 유지하는 것. 계속해서 내려가는 속도는 빨라졌고, 생각보다 빠른 속도에 조금 당황스럽기도 했다. 그리고 역시나 그 구간에서 크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중심을 지키자.' 처음 언덕을 내려오며 취했던 바른 자세 그대로를 유지하기 위해 흔들림 속에서도 몸의 중심인 코어에 힘을 주며 자세를 유지했다. 흔들리긴 했지만, 걱정과는 달리 넘어지지 않고 부드럽게 그 '마의 구간'을 넘어섰다. 그러자 굉장한 희열과 성취감이 느껴졌다. 내가 해냈어!


그제야 스키를 타며 주위를 느낄 수 있었다. 찬 바람이 흐르며 뺨에 닿아 건조해지는 느낌, 하얀 눈과 키 큰 나무들이 가득한 멋진 설산의 풍경, 여러 인종의 사람들이 스키를 타는 모습, 두려움을 극복하고 스키를 탄 나. 


두려움 속에서 바른 자세를 유지하고 중심을 지킨다면 조금 흔들릴지 언정 넘어지지는 않는다. 크로스컨트리 스키를 타며 몸소 느낀 이 말을, 일상에서 가끔씩 마주치는 두려움에 포기하고 싶어질 때마다 꺼내어 본다. 흔들릴 수는 있어도, 중심을 바로 잡고 있다면 넘어지지 않는다. 이 경험을 통해 두려움을 대하는 자세를 배웠다. 처음 타본 스키에 굉장한 의미부여를 하는 것 같지만 이건 정말 당시의 내가 느낀 감정과 생각이다. 


그렇지만 만약 넘어졌다면? 몸에 묻은 눈을 탁탁 털고 다시 일어나면 되는 것이다. 한 번 넘어졌다고 더 이상 기회가 없는 건 아니니까. 우리는 다시 언덕을 오를 수 있고, 다시 스키를 탈 수 있다. 조금 지치더라도 하고자 하는 의지만 있다면 할 수 있다. 실제로 같이 크로스컨트리 스키 체험을 했던 외국인 친구는 두세 번의 도전 끝에 넘어지지 않고 '마의 구간'을 통과할 수 있었다. 그의 그 도전이 얼마나 가치 있는 것인지. 


만약 사람들이 넘어지는 걸 보고 지레 겁먹고 도전도 하지 않은 채 포기했다면 얼마나 후회를 했을지 모른다. 실제로 나는 몇 년간 고대했던 어떤 일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던 적이 있는데, 그것을 하기 직전에 자진해서 포기했었다. 해보지도 않고 포기해버린 것이다. 다시 돌아오지 않는 그 소중한 기회를 내 손으로 날려버린 그 경험은 내 인생에서 최고로 후회되는 일이 되었다. 


새로운 일을 앞두고 두려움이 생기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 두려움을 어떻게 대할 것인지 그 태도는 내가 결정할 수 있다. 나는 이제 더 이상 두려움 때문에 무엇을 포기하지 않는다. 두렵다는 사실 자체는 인정하고, 그저 내 중심을 바로 잡고 옳은 자세로 나아간다. 비록 흔들려 넘어지더라도 괜찮다. 내가 넘어질지 안 넘어질지는 일단 해봐야 아는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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