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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르테의 꽃 Jun 07. 2022

시칠리아섬의 저녁기도

Opera by Giuseppe Verdi(1813-1901)

독일의 문호 괴테는 『이탈리아 기행』에서 '시칠리아를 보지 않고는 이탈리아를 보았다고 할 수 없다'라했고, 나이 마흔에 안정적인 교수직과 라디오 DJ를 그만두고 부인과 함께 시칠리아로 떠났던 소설가 김영하는 '시칠리아에는 어렸을 때부터 내가 생각해 오던 이탈리아가 있었다'라고 했다. 이탈리아 본토 남서부에 있는 시칠리아는 제주도 면적의 14배나 되는 거대한 섬이다. 지중해에서 가장 큰 섬이자 유럽과 아프리카가 만나는 요충지였던 시칠리아는 로마 제국 이후 1861년 이탈리아 반도가 통일될 때까지 다른 나라의 지배를 받았다.

국립발레단이 창단 60주년을 맞아 국내 초연으로 선보인 오페라 <시칠리아섬의 저녁기도 I vespri siciliani>는 1282년 3월 프랑스의 압제로부터 자유를 갈망하던 시칠리아인들이 부활절 저녁기도를 알리는 종소리를 신호 삼아 독립 투쟁에 나선 '시칠리아 만종 사건'을 다룬 작품이다. 프랑스 군인이 시칠리아 여인을 희롱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이에 격분한 시민들이 수 천명의 프랑스 군인을 살해하고 봉기를 일으켰다. 시칠리아인들의 프랑스인 대학살이라는 역사적인 사실에 근거하지만 극 중 인물의 이야기는 허구다. 극은 시칠리아의 공녀인 엘레나와 그녀의 연인이자 저항군의 중심인물인 아리고, 프랑스 총독 몽포르테, 시칠리아의 우국지사인 프로치다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1막 시작부터 긴장감 도는 분위기가 전개되는데 엘레나의 오빠가 적국인 프랑스군으로부터 죽임을 당했기 때문이다. 복수심에 가득 찬 엘레나는 아리고를 비롯한 시칠리아인들과 힘을 모아 프랑스에 대한 항거 계획을 세운다. 하지만 몽포르테는 과거 시칠리아 여인과 사이에서 낳은 자식이 아리고임을 알아채고 그를 불러 자신이 친아버지임을 밝힌다. 태어나서 아버지의 얼굴도 모른 채 자랐던 아리고는 자신의 아버지가 몽포르테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조국과 부정을 그리는 마음 사이에서 갈등하다 시칠리아인들에게서 멀어지게 된다. 시칠리아인들은 '태양빛도 어둡게 빛나라'며 아리고를 향해 저주를 퍼붓는다. 몽포르테는 아리고의 외로움과 고통을 무시한 엘레나와의 결혼을 선포하며 화합을 꾀한다. 하지만 시칠리아인들은 결혼식을 기회로 프랑스 세력을 습격하고 대규모 학살이 벌어지는 게 전체적인 줄거리다.

Giuseppe Verdi(1813-1901)

이 작품은 파리 오페라극장이 파리에서 열린 제1회 만국박람회를 기념해 베르디에게 의뢰한 작품으로 1855년 초연되었다. 파리 오페라극장의 의뢰로 만든 만큼 역사적이고 심각한 주제를 다루는 화려하고 규모가 큰 '그랑 오페라 grand opera' 스타일로 만들어졌다. 그러나 프랑스인이 학살당하는 내용이어서 프랑스에서는 인기를 얻지 못했고 대신 이탈리아에서 선보인 이탈리아어 버전이 꾸준히 공연되고 있다.




성악을 공부하지 않은 이들에게 오페라는 흔히 지루하고 어려운 장르로 인식되곤 하지만 요즘은 공연장마다 자막 서비스도 알차게 제공되고 있어서 사전에 줄거리를 알고 가지 않더라도 흐름을 파악하기가 어렵지 않다. 팁을 하나 제시하자면 오페라를 보러 갈 때 펜과 메모장을 준비해서 공연 도중 등장인물 및 각 막의 핵심 내용을 간단히 메모해 두면 내용 이해에도 도움이 되고 집에 돌아와서도 오랫동안 여운으로 간직할 수 있다. 5막의 이 대작을 보는 내내 틈틈이 메모를 해두었더니 3시간 30분이 지루할 틈이 없었고 나중에 놓친 부분에 대한 정보들을 더 찾아보는 재미도 건질 수 있었다. 오페라는 매 장면이 실제보다 느리게 흘러간다. '사랑한다'는 고백 한 마디 하는데 반복구에 카덴차까지 이어지는 아리아(Aria)의 경우 몇 분이 지속될 때도 있으니 성미 급한 사람들은 지루하고 답답해할 만도 하다. 하지만 원고지에 꾹꾹 눌러쓰는 글씨처럼 하나하나의 감정에 충실한 오페라가 나이 들수록 점점 더 좋아지는 것 같다. 세상이 어수선하고 뭐든 얄팍해져만 가는데 그래서인지 오페라가 지닌 깊이가 마음에 안식처럼 다가온다. 이번에 국내 초연으로 만나게 된 <시칠리아섬의 저녁기도 I vespri siciliani>는 소프라노 서선영, 바리톤 양준모 등 정상급 성악가들의 기량도 뛰어났지만 무엇보다 연출이 정말 감각적이고 돋보였다. 프랑스 왕실을 상징하는 '블루'와 오렌지의 섬 시칠리아를 뜻하는 '오렌지'로 양 대립의 관계를 미니멀하면서도 상징적으로 보여줬다. 이탈리아 출신 연출가 파비오 체레사 Fabio Ceresa는 "색을 강조해 프랑스와 시칠리아의 대립을 보여주려 했다"며 두 민족이 마침내 화해하고 평화를 이루는 유토피아는 하얀색으로 그려냈다.

https://www.youtube.com/watch?v=18nGlLoSaPg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사태를 비롯해서 지구상 전쟁의 역사는 현재에도 진행 중이다. 전쟁은 차치하고라도 사람들은 자신과 반대의 위치에 있거나 사소하게 대립할 경우에도 서로를 향한 차별과 경멸을 서슴지 않는다. 아돌프 히틀러의 적수 아서 네빌 체임벌린은 '전쟁에서 어느 편이 스스로를 승자라고 부를지라도 승자는 없고 모두 패배자뿐이다'라고 말했다. 전쟁은 결국 패자뿐 아니라 승자에게도 파괴적인 결과를 초래할 것이며 무엇보다 아무 죄 없는 가난하고 약한 사람들에게 어마어마한 고통을 안기게 된다. 살면서 누군가 내게 고약한 싸움을 걸어올 때 이 악물고 꼭 이기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때로는 여유를 가지고 침착하게 상대를 관조하는 배포도 필요하다.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전쟁이 가져올 경제적 파장에 대한 우려뿐 아니라 보다 인류애적 관점에서 전쟁의 빠른 종식을 기원하는 마음들이 많았으면 좋겠다. 세상 어느 곳에도 유토피아는 존재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모두가 행복한 세상에 대한 신념마저 포기할 수는 없으니까.. 음악은 오늘도 내게 사람답게 살아갈 작은 의미 하나를 깨우쳐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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