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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르테의 꽃 Jun 27. 2022

딸 잃은 아버지의 절규, 오페라「리골레토」

쥬제페 베르디(Giuseppe Verdi, 1813-1901)

작곡가 쥬제페 베르디(Giuseppe Verdi, 1813-1901)는 1813년 이탈리아 부세토Busseto 근교의 작은 시골 마을인 레 론콜레 Le Roncole에서 태어났다. 가난한 집안에서 자란 그는 7세에 레 론콜레 성당의 오르가니스트로부터 기초적인 음악교육을 받기 시작했다. 10세에 부유한 상인이자 평생의 정신적·물질적 후원자인 안토니오 바레찌(Antonio Barezzi, 1798-1867)를 만나게 된다. 일찍이 그의 재능을 알아본 바레찌의 도움으로 부세토 음악학교장 페르디난도 프로베지(Ferdinando Provezi, 1771-1833)에게 기본적인 작곡 교육을 받게 된다. 베르디는 19세가 되던 1832년 밀라노 음악원Milano Conservatory에 입학 신청을 했으나 당시 연령제한으로 거절당하고 스칼라 극장Theatro alla Scala의 쳄발로 연주자였던 빈센쪼 라비냐(Vincenzo Lavigna, 1776-1836)에게 솔페이지와 작곡, 피아노 등 전문적인 음악교육을 받았다. 2년 동안 실력을 키운 베르디는 음악의 도시 밀라노에서 오페라 작곡가로 활동하고 싶었지만 은인인 바레찌의 요청으로 부세토로 돌아간다. 1836년 시립 음악학교의 교사가 되었으며 그 후 바레찌의 딸 마르게리따 바레찌(Margherita Barezzi, 1814-1840)와 결혼해 딸 버지니아Virginia와 아들 이실리오Icilio를 두었다. 그러나 1839년 딸이 죽자 그 슬픔을 잊기 위해 예전부터 꿈꾸던 밀라노로 돌아왔고 다시 도전한 신작 오페라 <산 보니파치오의 백작, 오베르토>(Oberto, Conte di San Boinifacio, 1839)가 밀라노의 스칼라 극장에서 성공적으로 공연되었다. 그것을 계기로 극장장이었던 바르톨로메오 메렐리(Bartolomeo Merelli, 1794-1879)로부터 3편의 오페라를 제안받았는데 그 첫 번째 작품이 2막으로 구성된 코믹오페라 <하루만의 임금님>(Un Giorno di Regno, 1840)이었다. 그러나 딸 버지니아가 태어난지 1년여 만인 1838년에 사망한데 이어 아들 이실리오까지 그 이듬해 병으로 잃었고 설상가상으로 그의 아내 마르게리따가 1840년 수막염으로 사망한다. 이러한 시련들은 코믹오페라인 <하루 만의 임금님>의 실패 요인이 되었으며 공연은 단 1회로 끝이 났다. 작품이 실패하자 베르디는 깊은 절망에 빠졌다. 그는 메렐리에게 계약 철회를 요청했고 음악뿐 아니라 삶까지 포기하려고 했으나 1842년 <나부코>(Nabucco, 1842)의 성공과 함께 작곡가로서 그의 운명이 뒤바뀌게 된다. 이 작품으로 베르디는 큰 성공을 이루었고 유럽 전역에 그의 이름을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Va, pensiero sull'ali dorate 날아가라 상념이여, 금빛 날개를 타고

나는 그 구절을 훑어보았고, 많은 감동을 받았으며 거의 대부분이 성경 구절이기 때문에 읽는 내내 기뻤습니다. 한 구절을 읽은 다음 다른 구절을 읽습니다. (중략) 그런 다음 더 이상 글을 읽지 않겠다는 결심을 굳히고 나는 대본을 덮고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쓸모가 없었습니다. 나는 <나부코>를 내 머릿속에서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잠을 잘 수가 없었고, 다시 대본을, 한 번이 아니라, 아침이 올 때까지 읽었습니다.


<나부코>는 당시 오스트리아의 통치 아래 있던 이탈리아의 시대적 배경에 영향을 받아 작곡한 작품이다. 바빌로니아에 포로로 잡힌 이스라엘 사람들의 모습은 당시 이탈리아 통일 운동(Risorgimento, 1796-1870)과 맞물려 이탈리아인들의 큰 호응을 얻었다. 당시 이탈리아 오페라계를 주도하던 로시니는 이미 은퇴하였고 벨리니는 사망하였으며 도니제티는 파리에서 정착하고 있었으므로 <나부코>의 성공은 베르디를 이탈리아 오페라의 왕좌에 올려놓았다. 대중의 기대에 응답하듯 베르디는 이후 17년 동안 이탈리아, 런던, 파리의 극장을 위해 20여 편의 오페라를 썼다. <나부코>에 이은 작품 <롬바르디아인>(I Lombardi, 1843)과 <에르나니>(Ernani, 1844)도 연이은 성공을 거두었다. 나부코 이후 <맥베스>(Macbeth, 1847), <루이자 밀러>(Luisa Miller, 1849)의 작곡을 거쳐 베르디의 3대 걸작이라고 불리는 <리골레토>(Rigoletto, 1851)가 탄생하게 되었다.

<리골레토>를 전후로 베르디의 창작활동을 1기와 2기로 나눌 수 있다. 1기에서는 당시 오스트리아의 지배 아래 있던 시대적 상황을 배경으로 민족주의적 요소가 반영된 애국심을 고취하는 작품들이 많았다. 2기에 들어서부터는 애국적인 면을 보여주었던 1기와 달리 인간 사회의 이면적인 모습에 분개하고 주류 사회로부터 소외되고 희생당하는 인간 군상을 그린 사회고발적인 작품들을 발표했다. 베르디는 사회적 통념과 도덕적 인습에 대해 몹시 못마땅해하면서 이 경험을 바탕으로 사회의 어두운 곳에서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는 인물을 탄생시켰다. <리골레토>에서는 궁정의 광대로 꼽추에 다리까지 저는 불구의 몸을 가진 인물의 비극적인 이야기를 그린다.

이 시기에 베르디 개인적으로 큰 변화가 있었는데 1859년에 그가 스칼라 극장에 데뷔할 무렵 알게 된 주세피나 스트레포니Guiseppina Strepponi와 재혼을 하였다. 또한 1861년부터 5년 동안 국회의원으로 재직하면서 이탈리아 3대 극장인 밀라노, 로마, 나폴리의 극장에 재정적인 원조를 추진하였다. 그 후 오페라 <아이다>(Aida, 1871)를 끝으로 은퇴 선언을 했지만 16년 뒤 <오텔로>(Otello, 1887)와 <팔스타프>(Falstaff, 1893)를 완성한다. 평생 비극적인 내용에 익숙했던 베르디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쓴 희극 오페라 <팔스타프>를 마지막으로 1901년 88세의 나이로 뇌졸중으로 쓰러져 세상을 떠났다. 당시 일반 묘지 이외의 장소에 매장되는 것은 시당국의 허가가 필요하여 한 달 동안 밀라노 기념묘지에 머물렀다가 이장되었다. 베르디의 이장 운구식은 토스카니니가 지휘하는 8천 명의 합창단이 <나부코>의 'Va, pensiero(히브리 노예들의 합창)'을 부르면서 성대하게 진행되었다. 이장된 시신은 자신이 밀라노에 세운 '베르디의 집Casa di Verdi'의 예배당 안으로 옮겨졌다.




<리골레토>는 프랑스의 대문호 빅토르 위고(Victor Hugo, 1802-1885)가 프랑스의 왕 프랑수아 1세(FrancisⅠof France, 1494-1547)를 모델로 한 희곡 <왕은 즐긴다, Le Roi s'amuse>를 배경으로 한다.

위고는 이 희곡에서 프랑수아 1세를 방탕하며 신이 나서 죽음마저 두려워하지 않는 악한으로 묘사했다. 이 작품은 단 하루 만에 상연 금지 처분을 받았으나 잊힐 뻔했던 이 작품을 되살린 이가 바로 베르디였다. 그는 대본가 프란체스코 마리아 피아베(Francesco Maria Piave, 1810-1876)에게 '<왕은 즐긴다>는 우리 시대의 가장 위대한 이야기이자 아름다운 희곡'이라며 '왕의 광대인 트리불레는 셰익스피어에 비견할 만한 인물상'이라는 편지를 보냈다. 에르나니(Ernani, 1844) 때부터 작곡가와 대본가로 호흡을 맞췄던 피아베와 베르디는 ‘이런 주제라면 결코 실패할 리 없다’는 확신을 가지고 40여 일 만에 곡을 완성했다. 하지만 원작과 마찬가지로 검열이 문제였다. 당시 이탈리아 북부를 지배하고 있던 오스트리아 당국이 작품의 개작을 요구한 것이다. 결국 원작의 배경인 파리는 이탈리아 북부의 만토바로 바뀌었다. 프랑수아 1세는 만토바 공작, 광대 트리불레는 프랑스어의 '익살꾼Rigolo'에서 유래한 '리골레토Rigoletto'로 바뀌는 우여곡절을 겪으며 1851년 라 페니체 극장(Tearto La Fenice)에서 초연되었다. <리골레토>는 초연 후 10년 동안 전 세계 250여 개의 오페라하우스에서 공연되었으며 만토바 공작이 제4막에 노래하는 유명한 아리아 '여자의 마음'(La donna e mobile)은 초연되기 3일 전까지 극비에 부쳐졌으나 초연이 끝나자마자 전 베네치아 시내에 퍼져 유명해졌다. 하지만 그 곡 역시 검열자들의 요구로 두 번이나 수정한 후에야 무대에 오를 수 있었다.


[줄거리] 호화로운 만토바 공작의 성에서 한창 파티가 열리고 있다. 그 자리에 고집쟁이 귀족 노인 몬테로네가 들어와 자기 딸이 공작에게 농락을 당했다고 분노를 터뜨린다. 공작의 광대인 리골레토가 그런 백작을 조롱하고 놀려대자 몬테로네는 "이 개 같은 놈, 영겁까지 저주받을 놈"이라며 심한 저주를 퍼붓고는 만토바 공작의 부하들에게 끌려 감옥으로 옮겨진다. 그러나 리골레토는 자신에게 유일한 희망이자 전부와도 같은 딸 질다가 공작에게 농락당하자 청부살인을 감행할 정도로 분노하며 복수를 다짐한다. 질다는 공작을 진심으로 사랑하기에 용서를 간청하지만 리골레토의 복수심은 더욱 불타오른다. 리골레토는 자객 스파라푸칠레에게 공작을 죽이는 대가로 돈을 주기로 약속하며 살인을 청부한다. 하지만 우연히 이 모든 걸 알게 된 질다가 공작을 대신해 스스로 죽임을 당한다. 자객에게서 시체 자루를 건네받은 리골레토는 그 속에서 칼에 찔린 채 죽어가는 딸을 발견하게 된다. 질다는 아버지에게 너무 사랑하는 그를 대신해 죽음을 선택한다며 용서를 구한다. "아! 이 저주!" 리골레토는 고통 속에 절규하며 기절한다.




지난 주말 서초동 예술의 전당에서 글로리아 오페라단의 <리골레토>를 관람했다. 딸 잃은 아버지의 절규.. 자식이 부모보다 세상을 먼저 뜨면 그것을 참척(慘慽)이라고 한다. 참(慘)은 '참혹하다', 척(慽)은 '근심하다'로 깊은 고통을 뜻한다. 고 박완서(1931-2011) 작가도 참척의 고통을 겪었다. 남편을 잃은지 석 달만에 스물다섯 젊은 외아들을 사고로 떠나보냈으니 말이다. 박완서는 죽기 1년 전 2010년에 출간한 산문집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에서 그 일에 대해 이렇게 회상한다.


'나도 이십 년 전에 참척을 겪은 일이 있다. 너무 고통스럽거나 끔찍한 기억은 잊게 돼 있다던가. 기억력의 그런 편리한 망각작용 때문인지 그 당시 일이 거의 생각나는 게 없다. 나중에 딸들한테 들은 건데 아들의 장례를 치르는 동안 나는 우리 집 아닌 어딘가에 자리보전하고 드러누워 있었다고 한다. 장례를 치르고 온 딸들이 엄마가 듣건 말건 위로가 되라고 한 말이, 장례식에 아들 친구들이 많이 와서 성대했다고 전했다고 한다. 그걸 전해 듣자 내가 눈을 번쩍 뜨더니 그 친구들 뭣 좀 잘 먹여 보냈느냐고 물었다고 한다. 그 소리를 듣고 아이들은 아아, 고통스럽긴 하겠지만 엄마는 다시 삶을 이어갈 수 있겠구나 안도했다는 것이다. 삶이란 존엄한 건지, 치사한 건지 이 나이에도 잘 모르겠다.'


세계 3대 록 기타리스트인 가수 에릭 클랩튼(1945~ 영국) 또한 사랑하는 아들을 사고로 먼저 떠나보냈다. 유복하지 않은 가정에서 성장한 그는 음악으로 커다란 성공을 거두었으나 그래도 늘 외로웠다. 1960-70년대는 많은 록 스타들이 마약과 알코올에 중독돼 있었는데 에릭 클랩튼도 마찬가지였다. 그랬던 그가 비교적 늦은 나이에 첫아들을 얻게 되자 그동안의 삶을 반성하고 술과 마약에서 벗어나기로 신에게 맹세한다. 그러나 그는 아들이 태어난 이후에도 음악과 술, 마약에 빠져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 에릭 클랩튼은 아들이 노래하는 모습이 담긴 영상을 보고 술과 마약을 끊겠다고 결심했다. 하지만 작업이 마음대로 풀리지 않자 술과 마약을 다시 시작했고 결국 아내는 아들 코너를 데리고 떠난다. 이에 그는 아들과 다시 만나기 위해 자발적으로 알코올 중독 치료소에 들어갔다. 차츰 중독에서 빠져나온 그는 1991년 3월, 아들이 살고 있는 뉴욕 맨해튼에 찾아간다. 하지만 아들과의 만남을 하루 앞두고 비보를 듣게 된다. 아들 코너가 아파트 침실의 열린 창문 사이로 떨어져서 추락했는데 무려 53층 높이였다. 아들의 죽음으로 죄책감에 시달리던 에릭 클랩튼은 사고 직전 죽은 아들이 보낸 'I love you'라는 단 한 문장이 적힌 편지를 접한 뒤 하늘에 있는 코너에게 'Tears in Heaven'이라는 곡을 써 답장을 보냈다. 이 곡은 1992년 빌보드 차트 1위에 오르며 세계적인 인기는 물론 2,000만 장 이상의 음반 판매고를 올리며 그를 최고의 가수로 만들었다. 결국 그는 아들을 잃고 난 뒤에야 술과 마약을 끊을 수 있었던 셈이다. '신은 감당할 수 있는 만큼의 시련만 주신다'는 말도 있지만 참척(慘慽)의 고통이 어떤 무게 일지 나는 감히 상상조차 하기 어렵다. 어쩌면 내 부모, 내 자식과 소중한 이들이 내 곁에서 그저 숨 쉬고 있다는  그 자체로 이미 기적인지도 모른다. '사랑한다'는 그 한마디 수백 번 외쳐봐야 잃고 난 뒤에는 아무 소용이 없다.

https://youtu.be/fvVqPi92CcY

Eric Clapton Slowhand at 70 Live at The Royal Albert Hall 2015


내가 너를 천국에서 만난다면 너는 내 이름을 알까
천국에서 널 만나면 내 손을 잡아 주겠니
저 문 밖에는 평화가 있을 거라 확신해
더 이상 천국에서 흘리는 눈물도 없을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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