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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르테의 꽃 Aug 16. 2022

사랑할 수 있는 용기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 La Traviata」by G. Verdi

작년 1월 휴가차 제주에 갔다가 동백꽃의 명소라는 '카멜리아 힐'을 방문했다. 동백꽃은 11월에 피기 시작해 이듬해 2,3월에 만발하는 겨울꽃이다. 동백(冬柏)이란 이름도 '겨울에 꽃이 핀다'라고 해서 붙여졌단다. 겨우내 피었다가 가장 아름다운 때에 송이째 떨어지기 때문일까.. 동백꽃은 어딘지 처연한 기개와 화려함을 동시에 간직하고 있는 것 같다. 꽃봉오리가 모아져 수줍은 느낌을 주는 튤립이 소녀의 이미지라면 만개한 동백꽃의 자태는 요부의 유혹처럼 요염한 구석이 있다고나 할까?


작곡가 베르디 Giuseppe Verdi(1813-1901, 이탈리아)가 1853년에 발표한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 La Traviata」의 주인공 '비올레타 발레리'는 동백꽃의 이미지를 고스란히 빼닮은 비운의 여인이다. 이 작품은 프랑스의 작가 알렉상드르 뒤마 피스 Alexandres Dumas fils(1824-95)의 자전적 소설 <동백아가씨 La Dame aux Carmellias>를 원작으로 한다. 뒤마 피스는 <삼총사>와 <몬테크리스토 백작>의 작가 알렉상드르 뒤마의 아들로 스무 살 때 당시 파리 사교계의 코르티잔이었던 마리 뒤플레시스 Marie Duplessis(1824-47)와 사랑에 빠졌으나 결실을 맺지 못했고 뒤플레시는 폐병으로 짧은 생애를 떠났다. 소설에 등장하는 여주인공 마르그리트 고티에가 바로 뒤마 피스의 실제 연인이자 파리 사교계에서 매춘부로 유명했던 마리 뒤플레시 Marie Duplessis다.


18세기 말 산업혁명이 완성되어 가던 프랑스에서는 '코르티잔 Courtesan - 프랑스 상류사회 남성의 사교계 모임에 동반하며 그의 공인된 정부(精婦) 역할을 하던 여성으로 동양의 기생이나 게이샤처럼 시, 음악, 춤에 뛰어난 여성 - 이라 불리는 고급 매춘부들이 존재했는데 극 중 비올레타의 직업이 바로 '코르티잔'이었다. 시작 詩作에 능하고 노래와 춤 등 재색을 갖춘 19세기 유럽의 코르티잔들은 권력자의 애인이나 정부로서 파티에 공개적으로 참석하곤 했다. 황진이로 대표되는, 양반들과 교류하면서 상당한 문학적 감수성과 예술적 소양을 지닌 것으로 알려진 조선시대의 기생과 유사하다 할 수 있다. 「라 트라비아타 La Traviata」를 '춘희椿姬'라고 일컫기도 하는데, 이는 뒤마 피스의 원작 '동백아가씨'를 일본에서 '동백나무 춘(椿), 아가씨 희(姬)'라고 번역한 것에서 유래되었다.




[제1막] 1830년대 파리 사교계의 여왕으로 불리는 비올레타 발레리의 저택 살롱에 호화로운 파티가 진행 중이다. 비올레타의 절친한 친구 플로라, 그녀의 열렬한 추종자 듀폴 남작, 주치의 그랑빌 그리고 시골 청년 알프레도가 모여 있다. 사실 알프레도는 꽤 오래전부터 비올레타를 연모하고 있었다. 권주가를 불러달라는 가스통 남작의 요청에 알프레도와 비올레타의 2중창 <축배의 노래 Brindisi>로 흥겨운 분위기가 이어진다. 폐결핵을 앓고 있는 비올레타가 기침을 하자 알프레도는 이를 걱정하면서 1년 전 그녀를 처음 만난 이후 얼마나 사랑해 왔는지 고백한다. 그때까지 진정한 사랑을 해본 적이 없었던 비올레타가 자신은 지금껏 환락의 삶을 추구해왔고 그런 감정이 자리할 곳이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마음이 흔들린 비올레타는 그에게 동백꽃을 한 송이를 건네면서 꽃이 시들면 다시 찾아오라고 말한다. 알프레도는 다음날 그녀를 다시 만날 수 있다는 희망을 갖고 떠난다. 모두가 떠난 후 혼자 남은 비올레타는 깊은 상념에 빠져 새로운 사랑에 대한 기쁨과 두려움을 노래한다. 여기서 부르는 아리아 <아, 그대인가 Ah, fors'e lui>는 그녀의 복잡한 감정을 잘 나타내고 있다.

https://youtu.be/3GKejeUgw_Y

조심스럽고 수줍은 이 사람

나의 병상에 유령처럼 나타났다 사라지곤 했었구나

그리고 나의 열병을 불타오르는 사랑으로 바꾸다니!

온세상이 고동치고, 신비롭고 도달하기 어려운

그 사랑,

내 마음의 고통과 기쁨

_'아! 그대인가'


[제2막] 파리 근교의 시골집. 비올레타는 알프레도의 사랑을 받아들여 파리 사교계를 청산하고 달콤한 생활을 즐긴다. 하지만 알프레도는 이런 즐거운 시간이 비올레타가 자신의 재산을 팔아왔기에 가능하였음을 알게 되고 부끄러운 마음에 돈을 구하러 파리로 떠난다. 알프레도가 파리로 떠난 후 파리에 사는 친구 플로라가 비올레타에게 사교 모임에 초대하는 편지를 보내지만 그녀는 더 이상 그런 사교 활동에 신경을 쓰지 않겠노라며 무시한다. 알프레도가 없을 때 그의 아버지 제르몽이 비올레타를 찾아오는데 그는 아들이 화류계 출신의 여자와 사귀고 있는 게 알려지면 딸의 혼사를 망칠 수도 있으니 알프레도와 헤어질 것을 종용한다. 이에 비올레타는 "과거는 이미 지나간 거잖아요. 저는 과거를 뉘우쳤고 하느님은 저를 용서해주셨어요. 알프레도를 사랑합니다"라며 애원하자 제르몽은 아들과 헤어질 것을 단호하게 요구한다. 비올레타는 결국 제르몽의 의견을 받아들이고 알프레도에게 거짓으로 이별의 편지를 쓴다. 알프레도가 돌아와 비올레타가 남긴 편지를 읽는 동안 제르몽은 그를 위로하며 고향으로 돌아가자고 설득한다. 이때 제르몽이 부르는 <프로방스 네 고향으로 Di provenza il mar, il suol>에는 아들을 향한 부정(父情)과 안타까운 마음이 단순하지만 아름다운 선율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아버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알프레도는 테이블 위에 있는 플로라의 파티 초대장을 보고 비올레타가 화려한 생활이 그리워 자신을 배신했다고 분노하며 그녀를 뒤쫓아 파리로 떠난다.


플로라의 호화로운 살롱. 비올레타가 떠난 후 파리의 사교계를 장악한 플로라가 주최하는 파티다. 알프레도가 먼저 도착해 있고 비올레타는 예전 후원자인 듀폴 남작의 팔짱을 끼고 입장한다. 알프레도는 몇몇 남자와 카드 놀음을 하다가 거듭 승리해 큰돈을 딴다. 알프레도는 비올레타가 변심하여 듀폴 남작과 사귀는 것으로 오해하고 그녀를 경멸하며 그동안 신세 진 것을 갚는다며 카드 놀음에서 딴 돈을 화대를 주듯 비올레타의 얼굴에 던져버린다. 황급히 뒤따라온 아버지 제르몽이 이 광경을 목격하고 아들의 경솔한 행동을 꾸짖는다. 충격을 받은 비올레타는 쓰러지고 듀폴 남작은 그녀의 명예를 위해 결투를 신청한다.


[제3막] 비올레타의 침실. 떠들썩한 사육제가 열리는 날, 비올레타는 병마와 싸우며 침대에 누워 있다. 그랑빌 의사는 비올레타에게 회복될 날이 멀지 않았다고 말하지만, 하녀 안니나는 "그녀가 오늘 저녁을 넘기기 힘들겠다"라고 말한다. 의사는 돌아가면서 하녀에게 비올레타의 생명이 몇 시간 남지 않았다고 귀띔한다. 창밖에서 들리는 축제의 떠들썩한 음악 소리에 비올레타는 안니나에게 돈이 얼마나 남았는지 물은 뒤 남은 돈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라고 말한다. 하녀가 나간 후 비올레타는 가슴속에 품고 있던 편지를 꺼내어 읽는다. 알프레도의 아버지 제르몽의 편지다. 편지에는 알프레도가 듀폴 남작과 결투를 벌인 후 외국에 잠시 피신해 있으며 진실을 알게 된 알프레도가 곧 비올레타를 찾아갈 것이라는 내용이 담겨 있다. 그러나 비올레타는 이미 늦었다며 탄식하고 거울에 비친 창백한 자신의 얼굴을 보면서 지난날을 쓸쓸히 반추한다.


안녕, 지난날의 행복한 꿈이여

이미 사라진 장밋빛 내 뺨이여

알프레도의 사랑도 이젠 없네

내 영혼을 위로하고 돌봐주소서

오, 상처받은 영혼을 위로하고 격려해주소서

신은 나를 용서하고 거두어주시리라

아, 모든 게 끝나버렸네

이제 모든 게 끝나버렸네

_'지나간 날이여, 안녕'


하녀가 황급히 들어와 비올레타에게 알프레도가 도착했음을 알리고 두 사람은 뜨겁게 포옹하며 재회의 기쁨을 나눈다. 알프레도는 비올레타에게 파리를 떠나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자고 노래한다. 이에 화답하며 비올레타 역시 그런 희망을 노래해보지만, 이제는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안다. 비올레타는 알프레도가 좋은 여자를 만나 행복하기를 바라며 알프레도의 품에서 숨을 거둔다.




학부시절 모교 앞에 있는 어느 카페에 마주 앉아 있을 때 그가 내게 물었다. 널 좋아해도 되냐고.. 곧바로 답을 주지 못했던 이유는 그에게 호감이 없어서가 아니라 스스로에 대한 확신이 없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지금은 안다.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입술을 바들바들 떨며 묻던 그의 고백도 그리고 함께 걸을 때마다 슬쩍슬쩍 엿보았던 그의 옆모습이나 순간순간의 인상이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수시로 떠오르기 시작하던 그 당시의 내 감정도 그때만큼은 진심이었다는 걸.. 누군가와 가까워지고 그를 좋아하게 되면서 설레고 가슴 벅찬 순간도 많았지만, 내 안에 있는 낯설고 혼란스러운 감정들을 마주할 때면 당혹스러웠다. 사랑할 때 온전히 사랑 그 자체의 감정들만 따라오면 참 좋겠지만 현실은 그렇지가 않다. 인간의 마음이란 쓸데없이 복잡해서 단순하게 생각해야 할 것조차 심각하게 만들어버리곤 하니까. 극의 초반에 알프레도의 고백의 듣고 좋아서 펄쩍 뛰기는커녕 홀로 쓸쓸히 'E Strano, E Strano 이상하다 이상해'라고 읊조린 비올레타의 심경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사랑이 인간의 의지와는 달리 때로는 감당하기 벅찬 고통과 자책, 아픔으로 돌아올 수 있음을 알면서도 누군가를 진심을 다해 사랑할 수 있는 사람들은 용기 있는 이들이다. 극 중 비올레타나 알프레도, 제르몽 모두 제각기 지키고 보호하고 싶은 사랑 때문에 고통을 겪는다. 그럼에도 그들은 비겁하게 물러서지 않고 두려움 앞에 당당히 맞선다. 진정한 어른이 된다는 건 누군가를 보듬고 사랑할 수 있는 능력과 자격이 생겼다고 되는 것은 아니다. 누군가를 사랑하므로 꼭 그만큼의 희생과 아픔이 따를 수 있음을 알면서도 기꺼이 용기 있게 그 길을 갈 수 있는 사람.. 그 정도는 돼야 진짜 어른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이렇게 말하는 나는 어느 순간 사랑하기를 아예 포기해 버린 것도 같다. 기쁨도 환희도 없겠지만, 아픔도 두려움도 없는 어쩌면 가장 안전하게 나를 지킬 수 있는 길.. 그래서 난 이따금 내가 '성장을 멈춘 아이'는 아닐까 의심하게 된다.


[참고도서]

오페라 인문학(박경준, 2021)

봉주르 오페라(김성현, 2016)

금난새의 오페라 여행(금난새,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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