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4막으로 구성된 오페라 《라보엠》은 앙리 뮈르제의 소설 <보헤미안의 삶>을 원작으로 주제페 자코자 Giuseppe Giacosa와 루이지 일리카 Luigi Illica가 대본 각색을 맡았다. 푸치니는 그야말로 끊임없이 참견을 하면서 대본 수정을 요구해서 험악한 장면을 여러 번 연출했다. 출판업자이자 푸치니의 멘토였던 줄리오 리코르디 Giulio Ricordi가 슬기롭게 중재하지 않았다면 대본은 아마 완성되지 못했을 것이다. 대본은 1894년 여름, 대충 짜임새를 갖추면서 동시에 작곡 작업도 진행되었다. 푸치니는 집 근처 호숫가에 있는 여관을 매입해서 '라보엠 클럽 Club La boheme'이라 이름을 짓고 당시 친하게 지내던 화가와 문인, 친구들을 모아 술도 마시고 게임도 즐기면서 작곡을 했다. 끊임없는 수정 작업의 결과로 1895년 여름에 완성된 대본은 많은 변화가 이루어졌다. 특히 3막은 새로 만들다시피 했고 등장인물의 성격도 바뀌었다. 가령 여주인공 미미의 경우 원작에서는 자유분방하고 성깔도 있는 아가씨였지만, 오페라에서는 다른 인물의 캐릭터를 흡수해서 청순가련한 여인으로 탈바꿈했다. 또 푸치니는 본래 2막과 3막 사이에 있었던 막 하나를 통째로 들어내어 줄거리를 간결하게 다듬었다.
원래 뮈르제의 원작은 곤궁한 젊은 예술가였던 자신의 경험이 녹아있는 자전적 소설이었다. 가령 2막에 나오는 카페 모무스 Cafe Monus는 실제로 뮈르제의 단골집이었고, 등장인물도 대부분 실존 인물에 바탕을 두었다. 그가 그려낸 파리는 비참한 현실과 매혹적인 환상이 공존하는 곳으로 1830-40년대에 오스망 Georges-Eugene Haussmann의 대대적인 도시 개조가 이루어지기 직전 중세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파리를 배경으로 한다. 비록 낭만적으로 묘사하기는 했지만 여기에는 프랑스 루이 필리프의 7월 왕정과 제2공화정 시대(1830-52) 파리 서민들의 비위생적이고 열악한 주거 환경, 굶주림과 질병에 시달리는 빈민 계층, 바느질로 먹고사는 가난한 아가씨들과 그들을 성적으로 쉽게 착취하는 부유한 부르주아 계층이 모두 등장한다. 당시 4,000개가 넘었다는 파리의 카페(여관과 카페가 하나로 묶인 개념이었던)에는 실제로 로돌포와 마르첼로 같은 젊은 예술가와 지식인들이 모여 거대한 보헤미안 공동체를 이루었다. 뮈르제는 중세 시대 이래 사람들이 공감했던 자유로운 예술가와 청춘 남녀의 비극적인 사랑 이야기를 파리라는 배경 안에 교묘하게 녹여냈다.
푸치니는 1895년 12월 10일 오페라를 완성했고, 이듬해 2월 1일에 토리노의 레지오 극장 Teatro Regio에서 초연이 이루어져다. 지휘는 당시 떠오르는 젊은 지휘자 토스카니니 Arthuro Toscanini가 맡았다. 푸치니는 극장의 음향과 가수진에 불만이 많았고 또 앙코르를 금지하는 관습도 싫어했는데, 초연 역시 미지근한 성공을 거두었을 뿐이다. 하지만 상연이 이어지면서 점점 더 인기를 얻기 시작했고, 《라보엠》은 현재 전세계 오페라 무대에서 가장 사랑받는 오페라 중 하나가 되었다. (참고: 연주회 프로그램 _이준형 음악 칼럼니스트)
시인 로돌포, 화가 마르첼로, 음악가 쇼나르, 철학자 콜리네는 다락방에 거주하는 젊은 예술가들이다. 이들처럼 세속적인 성공을 탐하지 않고 가난을 멋으로 자유롭게 사는 젊은 예술가들을 보헤미안 Bohemian이라 일컫는다. 그러나 사랑과 낭만을 꿈꾸며 예술을 노래하는 보헤미안들에게 현실은 늘 춥고 배고픈, 밀린 방세도 해결하지 못하는 매몰찬 것이었다. 외롭고 배고픈 상황에서 만난 연인에게는 아무것도 해줄 수 없고 죽어가는 연인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남에게 빌린 돈으로 겨우 목도리 하나쯤 사줄 수 있는 것뿐이다.
가난과 열악한 환경 속에서 비참하게 사는 삶을 원하는 이들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간혹 예술가나 문학가들처럼 창조적인 일을 하는 사람들 중에 자발적 가난을 선택하는 이들이 있긴 하지만 그건 누가 보더라도 일반적이진 않은 경우다. 가난은 그 자체로 시(詩)가 될 수 없으며 낭만적인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래서일까? 세상 모두가 가난을 두려워하고 오직 부를 쫓는데 혈안이 되어있는 것 같다. 그나마 신분을 보호받던 학생 시절을 벗어나 사회에 합류하게 되면 자기 삶의 대부분을 스스로 결정하고 해결해야 하는 시기가 온다. 경제활동을 하고 소비가 늘어나다 보면 돈은 자연스레 인생 최대의 화두가 된다. 친구도, 연인도, 배우자도, 가족도.. 그 어느 것도 계산기를 두들기지 않고 결정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는 세상이 되어버렸다. 자유롭고 낭만적이지만 가난한 보헤미안 삶을 택하기보다 적어도 궁색하지는 않은 부르주아의 삶을 쫓는 현대인들의 가치관은 매우 영악하고 지혜롭기 그지없다. 하지만 돈이 삶의 목적이 되는 인생도 애석하고 처연하기는 결국 마찬가지다. 돈은 분명 어느 정도 삶의 일부를 해결해 줄 수는 있겠지만 그 자체로 삶을 대신해 줄 수는 없으므로..
연말을 맞아 모처럼 성남아트센터를 찾아 국립오페라단의 연주로 오랜만에《라보엠》을 감상했다. 우리 젊은 보헤미안들의 가난과 그로 인한 궁핍은 여전히 나를 슬프게 했지만, 그들의 계산 없는 우정과 조건 없는 사랑은 각자의 꿈과 젊음 속에서 늘 당당히 빛난다. 노래했던 시간과 사랑했던 기억을 빼면 더 잃을 게 없는 나의 20대도 마냥 녹록지만은 않았다. 노래도 잃고 사랑도 잃고 꿈도 잃고 어딘가에 쓰러져 마냥 울고 있을 나에게, 지금 이렇게 다소 멀리서나마 기꺼이 안부를 전한다. 슬픈 나의 보헤미안.. 괜찮다고 다 괜찮다고!
작품설명발췌 및 참조: 프로그램북_오페라라보엠(성남문화재단 2022, 이준형 음악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