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경제
2008년 리만 브라더스가 파산하면서 원자재 가격이 급락했고 산유국에는 큰 위기가 터졌다. 그 사태를 산유국에서 경험했다. 불과 2개월 만에 주가가 1/10으로 빠졌고, 달러 대비 환율이 두배 이상 튀어 올랐다. 산유국 정부는 경제를 살리기 위해서 돈을 뿌렸지만, 돈은 돌지 않았다. 은행엔 돈이 넘쳤지만, 신용도 높은 기업과 개인에게만 돈을 빌려주려고 했다. 필요한 사람에게는 돈이 가지 않고, 필요 없는 사람들에게만 돈이 몰렸다.
헬리콥터에서 뿌려진 돈도 마찬가지였다. 뿌리면 뿌릴수록 돈은 옷장 안으로 퇴장하지 옷장 밖에서 유통되지 않았다. 교과서에서 보던 유동성 함정이라는 것이 이런 것이었다. 그게 의외로 해법이 없는 굉장히 답답한 문제였다. 일부 나라는 아직도 2008년의 침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러다가 이번 코로나 함정에 다시 빠지게 되니 참으로 걱정되는 일이다.
유럽에서 불고 있는 휴지 사태를 보면서 바로 그 유동성 함정이 떠오른다. 현대 사회의 생산력이 엄청나고, 시장 대응이 탄력적이며, 유통 구조가 혁신적이어서 휴지의 공급은 얼마든지 증가시킬 수 있다. 고로 코로나 사태보다 더한 사태가 발생해도 공장에 폭격이 가해지지 않는 이상 인류가 사용할 휴지를 공급하지 못할 일은 벌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휴지는 대형 마트에도 없고, 온라인 쇼핑몰에도 없다. 왜냐면 휴지가 옷장으로 계속 퇴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개인들이 쟁여 놓을 수 있는 휴지의 규모도 엄청난 셈이다.
여섯 개들이 휴지 한 박스를 150파운드에 파는 걸 보고 충격을 받은 지인은 휴지를 얻기 위해 한시간이나 차를 타고 우리 집에 왔다. 물론 겸사겸사지만. 휴지도 돈처럼 유동성 함정에 갇혔다. 휴지를 헬리콥터로 뿌려도 당분간은 같은 현상이 일어난다. 그런데 사람들은 어느 순간 깨닫는다. 휴지가 너무 많이 풀렸다는 것, 계속 가지고 있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것, 그 순간 휴지의 가격은 휴지가 된다.
위기의 순간에 돈이 있다면, 여유 돈이 생긴다면, 헬리콥터에서 돈이 떨어진다면, 그 돈이 옷장으로 들어가면 안 된다. 그 돈은 결국 휴지가 되고 만다. 옷장으로 가는 것보다는 쓰는 것이 좋은 선택이고, 쓰는 것보다는 자산을 취득하는 것이 좋은 선택이다. 고로 경제 활동을 하라.
물론 지금이 가장 좋은 타이밍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휴지를 최고 정점에서 시장에 내놓겠다는 생각 한다면, 그 사람은 아주 높은 확률로 휴지를 시장에 영원히 내놓지 못할 수도 있다. 최저점에서 주식과 부동산을 사겠다고 한다면, 돈은 영원히 옷장에 갇혀 있을 확률이 높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은 창 문에 붉은 스티커를 붙이자는 아이디어가 있다. 좋은 생각이다. 초록색은 지금은 괜찮다는 의미다. 붉은색이 붙으면 이웃과 지역 공동체가 그 집을 돌보게 된다. 사람들은 위기를 극복할 지혜를 가지고 있다. 돈과 휴지는 어느 순간 사람들의 그 지혜에 무릎을 꿇고 휴지가 된다.
그러니 돈도 휴지도 지금 내놓아야 한다.
(2020년 3월 20일 씀)
(끝)